〈 40화 〉이수현-5
왜? 화나?
파르르한 안색으로 째려본다고 해도 별로 안 무섭거든?
네가 화내면 안 되지, 피해자는 난데 왜 네가 지랄이니?
"기사님 몸 가지고 장난질치지마."
얘는하연이랑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인격이 다르니까 이수현 취급을 안 해주는 구나?
"장난 아니야. 진짜 죽으려고 쏜 거거든? 너 같은 애한테 잡혀 사는 이수현도 불쌍하니까 그냥 편하게 죽어버리려고 했지."
물론 거짓말이지만, 죽는 게 편할리가 없잖아.
"네가 기사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강한 기세가나를 내리 눌렀다. 본능적인 공포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죽으려고 머리에 총까지 쏜 사람이 겨우 이 정도 공포에 굴복 할 것 같아?
"기억말고 모든 걸 다 알고 있지. 어떤 상황에서 화가 나는지, 어떤 상황에서 괴로운지, 나한테 집착하는 썅년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 지 전부 알고 있지."
"지랄하지 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수현의 모습에서 기억만 사라진 모습이야. 그러니까 너에 대해서 아무런 기억이 없는 이수현은 너를 이렇게 대했을 거라는 거지."
씨익하고 웃음을 지었다. 이런 짜릿함, 가슴이 저릿하긴 하지만 좋을지도?
"백 번 양보해서 네가 내 인생을 구원해 줬다면, 나는 이수현을 존중해 줄 수 있어. 자신을 구원해 준 여자인데 집착을지배를 하든, 참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아니잖아?
"그런데 네가 오히려 이수현한테 목숨을 빚졌다며? 네가 이수현한테 한 행동이 생명의 은인한테 하기에 적합한 행동이야?"
"내 생명을 구해 주신 것엔 나도 늘 감사하고있어."
"말로만 그러면 쓰나, 행동으로 보여야지."
"기사님이 굳이 바라시지 않으셔서 말이야."
나도 내가 도움을 준 이의 감사함을 받으면 부담을 느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말이야, 이건 도리가 아니잖아.
"나는 제 3자의 입장에서 말하는 거야. 이수현이 괜찮으면 다야? 걔가 받을 부담은 생각 안 해? 이수현이 괜찮다고 말해도 내가 보기엔 그냥 쓰레기들 사이에서 고통 받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거든?"
그렇게 노려봐서 뭘 어쩌게? 죽이기라도 할 거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
오른손에 마나가 모이는 게 느껴졌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너 같은 건 없어져야 해,"
강대한 마력이었지만 몸에 상처를 입힐 것 같진 않았다.
"기억이 돌아오면 평소의 기사님으로 돌아가시겠지."
커다란 마력이 내 몸을 휩쓸었다
***
신기한기분이었다.
어떤 무게감도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 된 것처럼 그 어떤 저항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어디를 보든 흐릿한 세계였다.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단 하나 빛을 내는 곳이 있었다.
달리 갈 수 있는 곳 도 없었기에 빛이 존재하는 곳으로 갔다.
걸어가는 수고 없이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기분은 굉장히 묘했다.
빛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보인 것은 수십 명의 어린 아이들이었다. 4살에서 5살 정도? 굉장히 어려보이는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반듯하게 서있는 모습이 기괴했다. 10곱하기 10으로 서있는 아이들의 간격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100여명의 아이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으니.
두번째 줄의 7번째에 서 있는 아이였다.
특이하게 생기거나 튀는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눈길이 갔다.
내가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가진 이후 부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아이의 이름은 17호였다.
아이의 생활은 아주 간단했다. 하루 종일 시설의 교관들한테 교육을 받았다.그리고 잘 때는 물로 가득 찬 통 안에서 잠을 청했다.
어떻게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지는 몰랐지만 매일 그렇게 힘들게 훈련 해도 다음날 평온한 얼굴로 깨어나는 걸 보면 평범한 액체는 아니구나 싶었다.
거의 똑같은 하루였지만 약간의 차이 정도는 존재했다. 일단 교관이 가르치는 자세가 매일 달라졌고,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달랐다.
그렇게 400일 정도가 흐른 후에 나는 이곳이 무엇을 위한 시설인지 알 수 있었다.
'인공 각성실험' 인간이 스스로 마나를 깨우치는 각성현상을 인공적으로 구현하려는 장소였다.
매일 마나를 녹인 특수한 용액 속에서 잠을 재우고 혹시라도 각성한 인재가 있다면 즉시 가용이 가동하도록 훈련시킨다. 아주 단순한 방식이었다.
본능적으로 이 실험이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주먹구구식 방법이었으니까.
그로부터 100일쯤 지난 뒤 매일 똑같은 삶을 살아가던 아이의 삶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낙제생 97호.'
시설에서 가장 뒤쳐지는 여자아이였다.
한 번 설명하면 알아듣는 일이 없었고 그녀 한 명 때문에 아이들 전체의 교육이 지체된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녀 하나 때문에 교육이 계속 늦추어 지는 것이 싫었던 아이는 97호에게 다가갔다.
얼마 없는 쉬는 시간에 그녀를가르쳐 줬다.
밥을 먹을 때도, 잠깐의 이동 시간 때도 그녀의 옆에 붙어있었다.
두 아이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서로 편하게 부르는 사이까지 발전했다.
97호는 17호 덕분에 시설에서 탈락하지 않을 수 있었고 17호는 더 이상 교육시간에 손해를 보지 않게 됐다.
그로부터 다시 100일,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둘은친구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늘 밥을 같이 먹었으며 여유 시간이 생기면 둘이서 대화를 했다.
대화를 나눌 때 마다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에 매일 같은 하루를 보내던 소년의 인생이바뀌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인생이겠지.
죽은 것도 아닌데 남의 기억을 이렇게 보여줄리가 없지, 이건 나의 기억임이 틀림없었다. 아마 하연이도 월하도 모를 어린 시절의 이야기.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었다. 나는 각성을 하지 못 했다는 것도 97호와는 결국 헤어졌다는 것도.
시간이 계속 흘렀다.
내가 자라서 8살 쯤 되었을 때 사건이 터졌다.
97호가 돌연 각성해 버린 것이었다.
시설은 당연히 난리가 났다.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자연적으로 각성한 것인지, 아니면 시설의 조치 덕분에 각성한 것인지 얼마나 강한 각성자로 각성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97호는 더 이상 다른 아이들이랑 같이 지내지 않았다.
한참을 돌아오지 않던 97호가 돌아 온 것은 한달이 넘어서였다.
97호가 말하기를 자신은 시설에 의해 각성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각성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내가 다시 이곳으로 온건 각성한 사람이 근처에있으면 각성률이 올라갈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17호는 기뻐했다. 오랜 친구가 다시 곁으로 돌아왔었으니까.
그 시점부터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다가왔다는 듯,
"옷 이쁘다."
"언니들이 줬어! 어때?"
97호의 복장은 17호의 복장과 확연히 달랐다. 무채색의 수련복을 입고 있는 17호와는 다르게 97호는 원피스처럼 생긴 이쁜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이젠 97호라고 부르지 말고 이수아라고 불러."
이름도 생겼다. 이미 각성한 만큼 다른 아이들이랑 같은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일까? 17호는 내심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네 이름도 지어줄게, 이수현 어때?"
자기 이름에서 한 글자만 바뀌었을 뿐이지만 17호는 뛸 듯이 기뻤다. 97호와 둘만 공유하는 공통점이 생긴 것이니까.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수아는 더 이상 낙제생이 아니었다.
아이들로 이루어진 작은 사회의 최상위에 존재하고 있는 여왕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거스를 수 없었다.
"이젠 괜찮아."
"도와주지 않아도 돼."
"혼자 할 수 있어."
내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도 점점 사라져갔다.
그녀에게 힘이 되고 싶었지만 내가 뭘 하든 그녀가 나보다 훨씬 잘했다.
"내가 해줄까?"
늘 도움만 주던 수아에게 들은 그 한 마디에 소년의 머리에 각인 되어있던 둘 사이의 관계가 깨졌다.
수아에겐 더 이상 내가 필요 없다. 그 사실 하나가 내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이 시설에 더 이상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 수현은 시설에서의 탈출을 감행했다.
나도 솔직히 제가 왜 저러는 지 모르겠다. 어린애의 관점과 다 큰 어른의 생각의 차이일까? 아니면 직접 경험한 기억과 그저 관찰만 하고 있는 기억의 차이일까.
확실한 건 내가 보고 있는 수현의 멘탈은 단단히 나가있었다는 것이다.
탈출하는 장면은 생략됐다. 아마 원래의 수현도 잊어버린 모양이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커다란 숲 가운데에 있었다.
***
"으윽..."
길고 긴 꿈을 꾸었다. 체감상 한 달은 훌쩍 넘게 잔 것 같지만, 그렇게 오래 잤을리가 없지.
주변을 돌아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옆에서는 썅년들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있었다.
"기사님 괜찮으세요?"
일단 내가 기억이 완전히 돌아왔다고 믿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이있던거야?"
정신 좀 차렸나 확인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