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이수현-7
눈을 뜨니 보이는 것은 하연이와 월하가 나를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익숙한 상황이네,'
내가 직접 경험하진 않았지만 생생하게 남아있는 기억이었다.
'사현이는 일단 입막음 해놓은 건가?'
나라면 아예 다른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을텐데.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월하야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아는 기사님이 맞아.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데이트 중에 갑자기 기력이 없으셨는지 쓰러진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결국 속이려고 드는 구나? 하연이에 대한 호감도가 뚝뚝떨어졌다.
"오빠, 다 기억하고 있는데, 계속 속일거야?"
월하가 슬며시 마력을모으는 게 느껴졌다.
"나 맞아, 너희에 대한 기억 전부 가지고 있고, 월하는 저번에 반란있었을 때 S급으로 승급했고, 하연이랑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는 기세를 못 버티고 쓰러졌지."
얘들이 아직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네.
"나 섭섭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믿어줄 거야?"
"아니에요. 믿을 게요."
"월하는?"
"저도 믿을 게요."
좋아,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 볼까?
"기억을 잃은 상태일 때 나 되게 날카로웠지? 자살한다고 협박한 건 나도 미안하다고 생각해."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이런 말은 진지함을 가득 깔고 말해야 효과가 있으니까.
"그런데, 너희가 조금 미워지더라."
두 사람의 몸이 한 번 크게 떨렸다. 그래도 죄책감은 있는 모양이네, 다행이다.
"기억 잃어버렸던 거 아예 말도 안해주려고 하고, 평소에도 나를 지배하려고 들잖아?"
"그런 적..."
없다고는 차마 말 못하겠지.
자신들의 소유욕과 집착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면, 이후의 대화는 꽤 깔끔하게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기억을 잃었을 때의 내 모습을 천천히 떠올려 보면 내가 그동안 진짜 병신같이 살았구나 싶어."
과거에 붙잡혀서 너무 남 눈치만 보고 살아왔다. 내가 그녀들의 '필요'에 의해서 옆에 붙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나아지려고 생각만 하고 정작 행동은 바꾸지 않았다.
나는 개 병신이었다.
"이젠 병신 같이 살지 않을 거거든? 너희 눈치도 덜 보고, 죄책감이나 책임감에 얽매이던 것도 줄여나가려고 노력할거야."
아직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지 별다른 반박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조금 더 밀어붙여야지.
"참고로 이건 너희 허락을 맡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냥 통보하려고 하는 거지. 혹시 싫으면 말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니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진작 빼갔구나.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면 진짜로 죽어줄 테니까."
방긋하고 웃었다.
진짜로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블러핑일 뿐.
"너희가 내 힘줄을 자르든, 나를 가둬서 절대로 자살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든, 상관 없어. 나는 틈 한 번만 보면 그대로 죽어 버릴 테니까. 개복치를 키우는 심정으로 잘 감시해야겠지?"
왜 대답이 없어? 설마 진짜 그런짓을 저지를 생각은 아니지?
"얘들아 대답 좀 해줄래? 나는 벽을 보고 대화하고 있는 게 아니거든?"
"알았어요. 오라버니의 자유를 존중해드릴게요. 대신..."
"대신은 무슨 대신이야, 조건 달지마, 그리고 사과 안 해?"
잘 못한 건 사과해야지, 그래야 우리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겠어?
"오라버니의 자유를 무시하고 맘대로 다루려고 한 것, 오라버니가 없는 곳에서 오라버니와 상의 없이 오라버니를 어떻게 할지 결정 한 것 전부죄송해요."
하연이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괜찮다. 당장 진심이 아니어도, 앞으로 생활하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하나하나 다 지적해주면 되니까. 그러다가 하연이가 터지면? 나도 같이 터지는 거지뭐.
"월하는?"
"저도 죄송해요. 지금까지 저희가 기사님께 해왔던 짓들이 절대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고, 죄송하다는 감정도 들어요."
다음에 올 말로 알 맞은 것을 고르시오.
1번 하지만,2번 그런데, 3번 그래도.
"하지만, 다신 똑같은 짓을 하지 않을거라는 말씀은 못 드리겠어요. 저는 기사님을 괴롭히고 싶은 욕구가 있고, 그 욕구를 굳이 참고 싶지않거든요."
월하가 지글거리는 눈빛으로 내 몸을 훑었다. 월하가 S성향이 있는 것이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까 색다르네.
"그럼 이렇게 하자, 일상생활에서는 정상적으로 대해줘. 강압적으로 굴지말고, 괴롭히지도 말고 기세로 압박하지도 마. 대신, 가끔 컨셉플레이를 해줄게."
"컨셉... 플레이요?"
"적당히 욕구가 쌓이면, 아예 한 번에 풀어버리라고, 아기 고양이든, 연약한 기사님이든 다 해줄테니까, 일상에서는 절대로 나를 마음대로 다루려고 하지마."
월하가 눈을 크게 뜨더니 고민하듯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쁘지 않을지도? 아니, 좋을 것 같아요. 윈윈하는 방법이네요."
월하가 활짝하고 웃었다. 미래가 불안정해지긴했지만 정 힘들 것 같으면 어둠의 이수현한테 모든걸 맡기고 도망치면 되겠지.
"저, 오라버니... 저도..."
"응? 설마 하연이도 오빠를 괴롭히고 싶은거야?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자기 오빠를 괴롭히고 싶어하는 변태가 이 세상에 어딨겠어?"
사현아? 은근슬쩍 아리 가리키지 마라, 그러다가 들키면 진짜 큰일 나.
"저도 보상을 원해요."
"보상은 무슨 보상이야. 보상은 잘 하면 주는 거고, 나 사람 취급해 주는 게 그렇게 잘한 일이야? 당연한 일이지."
"이 세상에 나쁜 여동생이 얼마나 많은데요. 착한 여동생으로 남아있는 것 만으로도 잘한 일이죠."
얘봐라? 진짜 여동생도 아닌 주제에 뭐가 이렇게 당당해?
"그래, 네가받을 보상은 나중에 둘이 있을 때 얘기하자."
얼추 얘기가 끝났나? 더 할 얘기는 딱히 없어보였다.
혹시나 추가적으로 얘기할 게 있으면 그 때가서 얘기하면 되니까.
"근데 오빠 배고프거든... 밥 좀 먹을 수 있을까?"
계속 기절해 있다 보니 배에서 밥 달라고 난리다.
***
하연이와 연하의 강력한 추천으로 도착한 한정식 집, 7명이나 되는 대인원이다 보니, 4명 짜리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앉았다.
한 테이블에 어른들이 앉고 다른 테이블에 아이들이 앉는 식으로 하면 될 텐데 월하랑 하연이 모두 내옆에 앉고 싶어해서 자리 배치가 굉장히 이상한 모양이 됐다.
월하가 아이들이 앉은 테이블에 앉고, 그 왼쪽에 내가 앉고, 다시 한 번 더 왼쪽으로는 하연이가 앉았다.
내 앞에는 연하가 앉아있었고.
솔직히 연하라고 부르기엔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실질적으로는 처음 본 사람인데다가 태양길드의 수도라 불리는 솔의 경비대장이었다. 아마 하연이를 통해 만난게 아니라면 반말은 커녕 말도 못 걸었을 정도로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하면 반말이썩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어떡하냐. 약속을 했으니까 일단 연하라고 불러야지.'
그리고 기억을 못했다간 삐져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했으니까, 피는 안 섞였지만 그래도 하연이 동생이다 보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 비위를 맞춰줘야지.
내 맘대로 살겠다. 에서는 벗어나는 행동이었지만, 연하가 하연이나, 월하처럼 특정한 욕망으로 나를 제어하려 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여동생으로 삼아달라는 것 뿐이니 못지킬만한 일은 또 아니었다.
도착 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리 예약을 해놨나 싶었지만 아무리 S급 각성자여도 내가 정확이 언제 깨어날지는몰랐을 테니 아마 상위 각성자가 왔다고 부리나케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거겠지.
음식은 상당히 퀄리티가 좋았다. 고기는 딱 봐도 맛있어 보였고 반찬들도 많았으며 하나하나가 전부 맛있었다.
"어때? 내가 말했지? 너희 건물 음식은 내가 먹어본 음식 중에서 10위권에도 못 든다고."
"할 말 없네요. 확실히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저도 먹어본적이 없네요."
하연이랑 월하 조차 열심히 음식을 집어먹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어떨까,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을 애들을 상상하며 아이들을 바라보니 아리랑 가연이 모두 각자의 젖가락에 음식을 들고 사현이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오빠, 내가 준 거부터 먹어."
"아니야! 내거 부터 먹어."
"나 혼자 먹을 수 있는데..."
어린애들 답게 귀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 이 나왔다.
"오라버니 아~ 하세요."
"어? 어어."
갑자기 다가온 고기 쌈 하나에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어서 먹었다.
쌈의 아삭함과 밥의 단맛, 고기의 감칠맛이 합쳐져 만들어내는 하모니가 내 입안을 덮었다.
"고마워."
당연히 하연이가 싸줬거니 싶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연하가 방긋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오
저기 하연아? 월하야? 하던 얘기 계속하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