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이수현-8
내가 자살을 언급하면서 까지 협박을 한 것이 의미가 있긴 했는지 다행히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긴, 고작 쌈 하나 먹여준걸로 유혈사태가 벌어질 거였으면 나는 진작에 사지가 잘려서 어딘가에 박혀있었겠지.
"오라버니 아~ 하세요."
사현이가 당하는 걸 봤을 때는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는 데 정작 내가 대상이 되니까 웃을 수가 없어졌다.
일단 입을 벌려서 하연이가 싸준 쌈을 먹자마자 반대쪽에서 젓가락이 나에게 다가왔다.
"기사님, 제 것도요."
일단은 받아 먹었다. 손을 안 써도 돼서 편하기도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불편하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밥을 먹고 있었는데, 연하가 가지고 있던 검은색 직윤면체 모양의 무언가(앞으로는 무전기라 지칭하겠다)가 울렸다.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분명 밥 먹으러 온다고 했는데..."
연하가 무전기를 들었다.
"왜? 나 밥 먹는 중이라고 했잖아... 응? 길드장님이 돌아오셨다고?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오셨네? 적어도 일주일은 게이트에서 계시겠다더니,"
중요한 얘기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줄였다.
"붉은 달이 날뛴 건 간신히 진압했다고 말씀 드렸어? 그래 그러면 됐지."
연하의 무전은 잠깐 정도 더 계속되다가 끊겼다.
"아무래도 밥 다 먹고 길드장님께 잠시 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보고 해야할 것도 있고, 요구해야할 것도 있으니까요."
"요구할 거?"
"오랜만에 휴가 좀 받아야 겠어요. 붉은 달을 막아낸 공로가 있는 데 설마 휴가 따위를 반려하시진 않겠죠. 저는 오라버니랑의 추억이 적으니까, 지금부터라도 많이 만들어 나갈거에요."
순간적으로 하연이와 월하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리고 언니들이랑도요."
연하가 하연이와 월하를 바라보며 윙크를 한 번 하자, 살얼음 같던 분위기가 풀려갔다.
확실히 연하는 인상이 귀엽고 세지 않은 편이라서, 이렇게 애교를 부리면 상당히 귀여웠다.
그래도 월하까지 분위기가 누그러 든 건 의외였다. 하연이야 자주 봐오던 동생이니 귀엽다고 넘어간다고 해도 월하까지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는데.
"하연이 언니, 저랑 오라버니가 정식으로 남매가 됐으니 언니랑도 정식으로 자매가 된거에요! 이젠 밀어내지 마요."
"하아, 알았어, 길드장님이 부른다면서? 일단 거기나 갔다와."
"넹! 다녀오겠습니다!"
연하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엘리베이터나 계단을 사용하는 것 보다 자유낙하가 확실히 빠르기는 하겠지만, 오빠 심장 떨어질 것 같다 야...
"순식간에 가버리네, 그렇게 급한 일인가?"
"급할 수 밖에 없죠. 연하는 지금 길드장까지 붉은 달이랑 한 통속이 아닌 가 의심하고 있거든요."
뭐?
***
이번에 솔에서 벌어진 붉은 달의 테러는 곱씹어 볼 수록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일단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 치고는 붉은 달의 테러가 굉장히 계획적이었다. 아무리 미친놈들이 가득한 붉은 달이라고 해도, 감옥에서 풀려나자마자 각자 자리 잡고 테러를 저지를 정도로 용한 대단한 놈들은 아니다.
내가 직접 고문을 해봐도 그냥 위쪽에서 시켰다는 말만 돌아오는 걸 보면, 아마 붉은 달 소속 빌런 중에서 진위 여부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겠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지간한 협박으로 자백시킬 수 있는 빌런 중에선,
붉은 달에도 A급 각성자들이 존재한다. 가장 유명한 루시아부터 지금껏 음지에서 몸을 숙이며 살아온 라이론, 감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건물 몇채를 엎어버린 놈까지, 그런 놈들에게 고작 고문만 가지고 정보를 얻어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붉은 달의 배후에 누가 있는 지에 대한 어떤 증거도, 증언도 확보할 수 없었지만, 심증이 가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이서희'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먹은 괴물, 현 태양길드의 수장이자, 전대 태양길드장의 딸.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먹었다는 괴소문을 가지게 된 데에는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이 있다.
첫번째로, 8년 전에, 단지 큰 상처를 입었을 뿐 사적인 자리에선 멀쩡했던 이승호가 하루 아침에 죽어버렸다는 점, 그리고 이승호가 죽은 바로 다음 날 이서희가 S급 각성자가 되어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 이승호의 시신을 본인도 찾지 못했다고 주장한 다는 점, 등 다양한 이유에서 태양길드의 고위 간부들은 그녀를 아버지를 잡아먹은 괴물이라 불렀다.
각설하고, 그녀의 성향은 아버지인 이승호와는 너무 달랐다. 모든 길드원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며, 길드 뿐만이 아닌, '솔' 전체를 자신의 가족으로 여겼던 이승호와는 다르게 이서희는 모든 것을 자신이 지배할 대상으로 봤다. '솔'은 태양길드의 사유지이며, 솔의 시민들은 자신들 덕분에 이렇게 안전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다.
물론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시민들을 다루기가 귀찮아 진다는 이유로.
'붉은 달 놈들이랑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야 한다는 큰 틀은 같았지만, 이서희는 그 정도로 타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단순히 약자를 지배하고 갈취해야 한다는 붉은 달과는 다르게 너희를 지켜주는 대가로, 너희들을 지배하겠다는 논리이니, 솔의 입장에서는 기생충이나 다름 없는 붉은 달 놈들을 직접적으로 키워줬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정치적인 용도로 사용할 순 있겠지.'
붉은 달로 엉망이 된 도시를 깔끔하게 복구한, 길드장, 얼마나 평판에 좋겠어? 어디 놀러간 것도 아니고 게이트를공략하러 떠났다가 늦게온 것이니, 제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욕도 덜 먹을 테니까.
아마 하연이 언니가 우연히 솔로 오지 않았다면, 이서희의 평판만 엄청 올라갔겠지.
단지 심증 뿐이었지만, 거의 확정 짓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 일어난 붉은 달의 테러에 이서희가 깊이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뭐, 나랑 관련 없는 일이지만.'
나도 썩어 빠진 기득권층이라, 나한테 해만 안 가면 길드장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 없었다.
-똑똑
"저 왔습니다. 길드장님."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젊은 여성이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자기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음에도 길드장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없을 때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니, 하연이 없었으면 진짜 큰일 날뻔했어,"
"정말 다행이었죠."
"연하도 아주 칭찬해, 덕분에 도시의 피해도 최소화 됐고, 수습도 잘 됐어."
겉으로만 보면 참 좋은 길드장이란 말이지. 목소리도 사근사근 하고, 나름 붙임성도 있다.
속이 아주 시꺼매서 그렇지.
"언니 없이도 이렇게 잘 해낼 수 있는 거 보면, 내가 사람은 잘 뽑았다 싶어."
"저보다 잘난 사람은 많을 거에요. 제가 경비대장에 있는 이유는 A급 각성자라서 그런거잖아요?"
"글쌔? 능력이 미친 듯이 뛰어나다면 비각성자여도 경비대장까지 올라올 수도 있지, 너의 능력엔 A급 각성자라는 축복도 포함되어 있는 거니까. 비각성자라는 패널티를 딛고 일어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 사람도 높은 직위를 줄거야."
환하게 웃고 있는 길드장의 얼굴을 보자면, 자신의 도시를 테러하게 만든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리 연하 가지고 싶은 거있어? 큰 일을 했으니까, 너무 힘들지 않은 선이라면 다 들어줄게."
"너무 힘들지 않은 선이 어느정도 까지인데요?"
"개인노예 한 명 지급하는 정도까지는 무리 없이 가능해."
아주 화끈하시네. 개인 노예라고 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있었지만, 노예보다는 오라버니일 때 훨씬 빛나는 사람이니까 0.1초도 지나지 않아서 잊어버렸다.
"휴가나 주세요. 테러 터지고 얼마 안돼서 휴가를 바라는 게 죄송하긴 한데, 솔이 안정화 되고 시간이 꽤 흘러서 저 말고도 좋은 인재 많잖아요? 덜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주세요."
길드장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드디어 본색을 들어내는 건가?
"우리 연하, 관심있는 사람 생겼어? 지금까지는 자는 시간 5시간, 하연이랑 붙어있는 시간 2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종일 일만하던 애가 갑자기 휴가를 다 달라고 하고 말이야."
"아니거든요?"
"누군데?내가 아는 사람이야?"
장난스럽게 물어오는 길드장의 표정에 미간을 부여 잡았다.
"알았어, 더 말 안 할게. 바로 휴가를 주는 건 안 되고, 이틀 정도만 더 일하다가가, 그리고 내일 저녁은 하연이까지 불러서 같이 저녁 먹자. 그렇게 찾아다니던 오라버니도 찾았다면서? 그 분도 같이 불러서 먹자,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눈으로 봐야겠어."
큰일 났다. 시동 걸린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하연이 오라버니면 네 오라버니이기도 한 거 아니야? 너 자존심 엄청 세잖아. 만약 비각성자에 엄청 약한 사람이면 그 사람한테도 오라버니라고 부를 수 있어?"
우리 길드장은 꽤 투머치 토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