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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화 〉 어릴 적 이야기­1(과거 외전) (44/265)

〈 44화 〉 어릴 적 이야기­1(과거 외전)

* * *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알 수 없는 실험실에서 보낸 기억들이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없다. 너무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안 나는 걸 수도 있고 실험실에서 무슨 조치를 취한 걸 수도 있지.

이 이야기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내 유년기의 기억이다.

***

"똑바로 서."

교관이 우리를 보고 말했다. 내가 보기엔 이미 간격 맞춰서 잘 서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시작하면 안되나?

시간 아까운데.

"너희가 이전에 무슨 일을 했든, 무엇을 했든,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었든 아무런 상관 없다. 여기서 너희들은 숫자로 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교관님, 어린애들한테 그렇게 말씀하셔 봤자 못 알아듣거든요? 우리 같은 꼬맹이를 데려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주변을 둘러 보니 내 또래 애들이 이게 뭔소리지? 하는 표정으로 갸우뚱 거리고 있었다.

"17호 가만히 있도록."

'네네, 알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그 나이 또래 같지 않은 점이 많았다. 어른스러웠다고나 할까?

좋게 말해서 어른스러웠던 거지, 나쁘게 말하면 애 같지 않았다.

"지금부터 훈련을 시작하겠다."

다른 애들은 힘겹게 따랐던 수업을 나름 잘 헤쳐나갔다. 남들은 수십 번 씩 교관과 개인적인 교습을 받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교관에게 불려간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아이 중 가장 뛰어났냐고 묻는 다면 그건 아니었다.

1등한테 밀리는 만년 2등, 그게 나였으니까.

1호, 내가 엄청난 노력을 한 건 아니지만, 1호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를 가진 아이를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1호는 그냥 미친년이었다. 자라고 있는 물통 속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나, 밥 먹을 시간도 아깝다면서 입에 밥을 물고 운동을 하고 있지를 않나, 쟤가 내 또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비정상적이었다.

솔직히 1호는 존나 셌다. 내가 기억하는 시설에서의 첫날 치뤄졌던, 모의 평가에서 교관을 상대로 무려 7분을 버텨냈으니까, 당황해서 떨리던 교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교관을 상대로 그 정도 하는 년을 일반 아이들이 이길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것에서 끝나면 미친년이라는 말도 안 한다. 말투도 어린애같지 않았고, 행동도 어린애 같지 않았다.

나처럼 적당히 어른스러운 것도 아니고 무슨 노인이 말하는 말투 같았다.

"내 비록 어린 몸을 빌리고 있지만, 너 같은 아해한테 질 정도로 약해지진 않았단다."

지금 생각 해보면 어떻게 중2병이 5살 때 올 수 있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애인가 보다 싶었다.

그렇게 만년 2등으로 한참을 살았다.

매일 밤 들어가는 물통에 특별한 효과가 있었는지 달리 근육통이라는 걸 느껴본 적도 없고 아침에 일어날 때도 아주 상쾌했다.

1호를 제외한 모든 애들한테는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1년하고도 반년 정도가 더 지났을 때, 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나이대에 맞게 짝사랑을 시작했냐고? 그건 아니었다. 낙제생,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97호는 첫 날 부터 천천히 뒤쳐지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교관이 그 아이한테 붙어있는 시간만 전체 시간에 1할이 될 정도로 늘어났다.

그냥 교관의 시간을 뺏는 정도면 말을 안 하겠는데 그 때 문에 자꾸 수업이 늦게 끝나는 게 문제였다.

며칠간 고민한 나는 기막힌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네가 97호를 도와주겠다고?"

"네, 어차피 저는 교관님 수업에 완전히 집중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건 그래, 너나 1호 같은 애들은, 솔직히 슬슬 내가 가르칠 게 없어지고 있으니까."

교관도 쉽게 ok사인을 내렸다.

미룰 필요 없이 당장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야! 97호."

"어? 누구야?"

"명찰 보면 몰라? 17호잖아."

97호와는 단 한 번도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주로 이야기하는 건 주로 우등생이었고, 그들과도 하루에 한 두 마디 겨우 섞을 정도로 말 수가 없었으니까.

97호도 마찬가지였다. 이후에 알게 된 그녀의 성격은 붙임성있고 활발했지만, 낙제생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다른 애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없었으니까.

"응, 근데 왜 불렀어?"

"네가 너무 뒤쳐져서 자꾸 쉬는시간이 밀리잖아. 내가 그 꼴 보기 싫어서 앞으로 널 도와줄게."

"헤헤, 고마어!"

97호가 해맑게 웃으며 나를 껴안았다. 그 때는 부끄러워서 빨리 떼어냈지만, 당시 97호의 나이를 생각하면, 먼저 다가 와주는 또래아이를 껴안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겠지.

"자, 따라해봐 이렇게 하는 거야."

"이러케?"

97호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재능이 없었다.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들었다. 결국 그녀의 몸을 잡고 직접 움직여 줘야 겨우 알아들었다.

그렇게 수업시간 내내 그녀의 곁에 붙어있으니 겨우 오늘 진도를 따라갈 수 있었다.

"17호 대다네!"

"일단, 특훈이 필요할 것 같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생각으로 깨어있는 모든 시간을 97호한테 투자했다.

한 번 제대로 가르쳐 놓으면 그 때부터는 혼자서 잘 하겠지라는 마음으로 계속 그녀의 곁에 붙어 있었다.

"아해야, 요즘 너의 얼굴이 매우 보기 좋구나, 97호가 그리 좋더냐?"

"뭐래..."

절대로 97호가 좋은 게 아니었다. 헤헤, 하고 안겨 오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솔직히 좋다기 보다는 귀찮은 대상에 훨씬 가까웠다.

"17호! 이거 어떻게 해?"

"17호! 이거 도와줘!"

"17호는 대다네! 항상 고마워!"

97호한테 한 번 관 심을 갖게 된 이후 97호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불렀다. 작은 시설에서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 생기겠냐만은 정말 별 것도 아닌 일도 나한테 의지했다.

97호한테는 내가 필요했고, 그 사실이 내 가슴 속에 무언가를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97호에게 힘이 될 수 있다. 97호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97호에게 나는 쓸모 있는 존재다.

이런 감정이 극에 다다른 것은 97호가 퇴출 될 뻔한 걸 모든 힘을 다해서 막아냈을 때였다.

"너희도 알겠지만, 슬슬 많이 뒤처지는 인원이 나타나고 있다. 시설의 운영비가 부족한 건 아니지만, 다른 인원에게 방해만 되는 이들을 굳이 남겨둘 필요도 없겠지, 한 달 후에, 하위 20명을 대상으로 시험을 진행하겠다. 그 시험에 합격하지 못 한다면 퇴출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내가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줘서 꼴등은 탈출한 97호였지만, 솔직히 시설장이 말하는 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험에 붙게 하도록 애썼다.

지금까지 내 시간을 방해만 하던 애니까, 그냥 떨어지게 내버려두는 게 이득 아니냐고?

지금까지 투자한 게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 없었다.

그 때는 매몰비용이 뭔지 몰랐거든.

"응? 퇴추울?"

"응! 퇴출 당하지 않게, 최대한 노력해 보자. 아니, 절대로 퇴출 안 되게하자."

"그냥, 퇴출 되도 되는 거 아니야?"

초조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97호는 태평했다.

"그냥 같이 퇴출되면 안돼? 밖으로 나가서 우리끼리 사는 거야."

"이런 시설에서 퇴출 시키는 건데 그냥 내보네 주겠냐, 분명 죽임 당하거나 칼에 잘려서 해부당할 거야."

"히익! 그건 싫어!"

직접적으로 공포를 넣어주고 나서야, 내 말을 따라줬다.

한 달 간 빡 세게 교육을 하니 진짜 아슬아슬하게 붙었다.

"교관님! 97호 정도면 60점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채점은 내가 진행한다. 97호는 59점이 맞아, 아깝긴 하지만, 내 눈이 판단하기엔 그렇다."

"제 1점을 빼서 97호에게 주겠습니다!"

아마 그 대사가 내가 시설에서 한 모든 말 중에 가장 어린 아이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단 1점차이로 97호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초조해 하며 기다렸지만 다행히 점수컷은 55점이었다. 꼴등의 점수가 54점이었으니,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퇴출 된 사람이 없었다.

"17호! 나 붙었어."

"그래 그래 잘했어."

97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17호 덕분이야!"

그래 내 덕분이지, 내가 97호의 목숨을 구했다는 생각, 97호가 나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다는 생각, 내가 97호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해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너무 집착하지 말거라, 언젠간 그 생각들에 의해 큰 피를 보게 될 터이니."

그 말을 무시하고 넘겼다.

1호는 나와 97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그녀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져, 내 정신이 박살날 줄 누가 알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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