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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화 〉 어릴 적 이야기­2(과거 외전) (45/265)

〈 45화 〉 어릴 적 이야기­2(과거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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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빠져나왔다.

평소와 같이 몸의 피로는 모두 사라져 있었지만, 뭔가 계속 마음이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심장이 터질 듯 한 마음을 뒤로 하고 일단 조식을 먹으러 갔다.

평소라면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을 97호가 보이지 않았다. 얘가 늦잠을 자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봐도 97호의 모습은 코빼기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지? 저번에 퇴출될 뻔했던 것도 무사히 넘겼잖아. 안 나올이유가 없는데?

"97호를 찾고 있는 겐가? 안타깝지만 아마, 그녀는 오지 않을 게다."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잠결에 들었다. 97호가 각성을 한 모양이더군,"

각성, 인간이 마나를 깨우치고 인간을 초월한 힘을 얻는 현상.

이 시설이 새워진 이유이기도 했다.

"각성? 하하, 말도 안돼."

진짜 말도 안됐다. 97호는 재능도, 노력도, 의지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많이 뒤쳐지는 애였으니까, 하기 싫다고 때 쓰던걸 겨우겨우 붙잡아서 시켰던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억울한 감정이 살짝 스쳐지나갔다. 내가 걔보다 더 노력했는데? 내가 걔보다 더 재능있는 데, 나는 주변의 압박 없이도 혼자서 잘하는 데?

다행이 어두운 감정은 금세 사라졌다. 다른 애가 각성했따는 소식을 들었으면 시기감에 가득 찼을 지도 몰랐지만 97호는 내 친구였으니까.

굳이 나 자신을 세뇌할 필요도 없이 금세 좋은 감정으로 머리가 가득찼다.

기관에서 나온 아마도 첫번째 각성자니, 해부를 당하진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시설 놈들이 생각이 있으면 살려 놓고 연구를 하겠지, 설마 죽을 가능성이 있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7호는 친구를 참 잘 뒀군, 너 같은 아해가 친구라니 말이야."

"너는 근데 왜 나한테만 아해라고 하는 거야?"

"아해를 아해라고 하지 뭐라고 말하겠나?"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 1호의 얼굴에 죽빵 한방을 날리고 싶었지만, 날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땅바닥에 매쳐져 버렸기에 내 생각을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괴물 같은년..."

"본좌는 괴물이 맞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겨우 일어났다.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도 못 했다. 모르면 몰라도, 저년 정도면 이미 조교보다도 훨씬 강한 것이 아닐까?

"일단 아침이나 들거라, 공복상태로 수련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1호를 무시하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97호를 기다리느라 거의 10분을 쓴데다가, 1호와도 다툼이 있어서 시간은 상당히 촉박했다.

모든 음식을 마시듯 먹은 뒤에 수련장으로 이동했다.

"전달 사항이 있다. 97호가 지내던 침실이 어제 밤 사이 깨져서 97호가 큰 부상을 입었다. 당분간은 치료 때문에 수련에 나올 수 없으니 그렇게 알도록."

1호의 말과는 상반되는 말이었다.

누구의 말이 거짓인지는 아주 명확했다.

교관은 틈만 나면 거짓을 입에 올리는 인간이었지만, 1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짓을 한 적이 없었다.

1호의 말이 진실이다. 97호는 다친 것이 아니라 각성한 것이었다.

오전 수련이 끝나자마자 교관실로 이동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그래도 3년 정도를 같이 지내서 그런지 교관들 과도 나름 친해졌다. 직접적인 친분을 표시할 순 없어도, 처음에 비해선 상당히 유해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97호의 병문안을 가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 말에 교관들 모두가 굳었다.

교관들의 표정을 바라봤다. 친구 병문안도 못 가는 17호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얘를 어떻게 설득해서 돌려보내지? 라는 생각이 가득 담겨있는 표정이었다.

'이정도면, 굳이 1호한테 언질을 듣지 않아도 다치지 않았다는 건 눈치 챘겠네.'

내 눈치가 빠른 건 교관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니까, 내가 1호에게 정보를 들은 걸 의심하진 않겠지.

"97호, 다친게 아니군요?"

교관들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냐, 다친 거 맞아. 요양해야 되니까, 병문안은 못 할 것 같다. 그만 돌아가서 오후 수련 준비해."

오랜만에 나잇값을 해야겠는데?

"거짓말! 아픈 거 아니잖아요! 근데 왜 못 만나게 하는 거에요? 설마 다친 거 보다 더 큰일이 난 건 아니죠?"

내가 울먹이며 소리치자, 교관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속삭이는 게 들렸다.

그래도 친구인데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 17호는 입 무겁잖아. 하는 소리가 귀로 들렸다.

'좋아, 이 정도면 됐어.'

내 눈치라면, 이쯤에서 각성이라는 두 단어를 떠올리지 못 했을리 없다.

"설마, 각성한 거에요?"

"헙!!"

가장 어리고, 멍청한 교관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이제 확신에 차서 행동해도 되겠네.

"진짜 각성한거죠? 그래서 기관에서 따로 불려간거죠?"

"이제 그만, 수련실로 돌아가도록."

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교관의 단호한 한 마디에, 안심 했다는 듯 미소를 짓고 교관실 밖으로 나섰다.

"가만 보면, 아해는 어린애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뭐래, 애늙은이가."

교관실 앞에 서있던 1호를 지나쳐서, 수련실로 향했다.

다시는 97호는 못 걸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살짝 아릿해지긴 했지만, 괜찮았다.

97호는 앞으로 행복하게 지낼테니까...

***

한달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교관들은 이미 나한테 97호의 각성을 들켰다는 걸 알았는지 3일 만에 모든 아이들한테 97호의 각성사실을 털어놨다.

현재는 자연 각성인지, 아니면, 시설에 의해서 각성한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당분간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만 반복했다.

'97호 보고 싶다...'

그녀의 활기찬 웃음을 보지 못한 시간이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슬슬 잊을 법도 했는데, 눈만 감으면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해야, 그녀에게 너무 집착하지 말거라, 97호가 돌아오면, 그녀는 네가 아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있을 텐데, 그 충격에 네 마음이 깨질까 걱정이 되는 구나."

"시끄러..."

1호의 말을 무시한 채, 수련실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어수선한 수련실의 분위기에 혹시?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빠르게 문을 열고 앞쪽으로 뛰어가니,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97호가 교관의 옆에 서있었다.

"97호!"

"아! 17호 안녕?"

오랜만에 본, 97호의 모습은 한 달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단 옷 부터, 예쁜 원피스 차림이 되었고, 늘 해맑았던 모습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지만, 이전에는 없던 여유가 느껴졌다.

굳이 말하자면 강자의 여유랄까? 그녀가 직접 입으로 내뱉진 않았지만, 이곳에서 나를 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 당당한 모습이, 대놓고 느껴졌다.

"교관님, 저 17호랑 단 둘이서 얘기해도 되죠?"

물음표가 제대로 붙은 의문문이었으나, 한국어 답게 속 뜻은 전혀 달랐다.

나는 17호랑 둘이서 대화를 하겠다는 통보에 불과한 말이었고, 곧 교관은 나와 17호 단 둘이서 얘기할 수 있는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무슨 말 부터 해야할까?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예전엔 나를 듬직하다는 듯, 의지한다는 듯 바라봤던 97호의 시선이 마치 나를 귀여워 하는 듯 보여서, 감정의 요동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일단 진정하고, 칭찬으로 시작하자.'

"옷 이쁘다."

"언니들이 줬어! 어때?"

이쁘다고 방금 말했잖아.

원피스를 잡아서 한바퀴 빙그르르 도는 97호의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이젠 97호라고 부르지 말고 이수아라고 불러."

이수아... 라고?

그래, 이미 각성한 97호니까 다른 애들이랑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는 거겠지,

머리로는 이해가 됐지만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항상 나랑 동등한, 혹은 나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 97호가, 각성을 하고 이름을 가지게 됐다는 점이, 내 가슴을 시리게 했다.

"설마 17호, 나만 이름을 가졌다고 삐진 건 아니지?"

장난스래 웃으며 놀려오는 97호... 아니, 이수아의 모습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원래 이렇게 장난스러운 애가 아닌데...

"그럼 내가 네 이름도 지어줄게. 이수현 어때?"

이수아는 분명 착한 아이었다. 말도 잘 듣고, 나한테 의지하는 착한 아이,

그런데... 그런데 왜...

"내 이름이랑 비슷하게 지어줬어."

왜 이 아이의 눈에서, 너는 이제 나보다 아래야, 너는 내 것이야, 하는 탐욕의 눈빛이 깃들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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