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대삼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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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처음 보는데 키도 작고 귀염상이다. 보니, 하연이 처럼 무섭진 않았다.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왜 그래? 이 검에 무슨 문제 있어?"
"문제는 없죠. 성능이 지나치게 좋다는 것만 빼면요."
하긴, 이 검이 워낙 좋긴하지, 각성자의 마나도 견딜 수 있는 데다가, 절삭력도 미쳤으니까.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구한 거에요?"
"어릴 때 주웠어."
누가봐도 거짓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밝힐 순 없으니까.
"이거 절대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꺼내지 마요. 어지간한 각성자라면 탐욕에 눈이 멀어서 무슨 짓을 저지를 지 몰라요."
나를 바라보는 연하의 눈빛이 너무나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알았어. 안 꺼내면 되잖아. 너무 진지하게 있지 마."
분위기를 풀어보려 가볍게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연하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긴장감을 가지세요. 그 검, 오라버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걸 봤으면, 심지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비각성자였으면 저도 바로 죽이고 빼앗았을 거에요."
연하가 살기를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살기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고, 연하 스스로도 제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겁에 질리진 않았지만 몸이 자동으로 떨려왔다.
"솔직히 지금도 그냥 오라버니한테서 검을 빼앗고 싶어요. 솔직히 오라버니가 사용하기엔 과분한 물건이니까요. 하지만, 오라버니의 물건이니까, 여동생이 탐내면 안 되겠죠."
단검에 대한 정보는 하연이도 잘 모른다. 연하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단검을 빼앗고 입 닫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인데, 스스로 참는 걸 보면, 말로만 오라버니 대접을 해주는 건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내가 그렇게 잘난 사람도 아닌데 하연이의 오라버니라는 이유로 오빠취급을 해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나를 오빠라고 받아들여 주는 걸까?
하긴 여동생 취급 안 해주면 죽일 듯이 노려보던 애니까,
"아무튼 대산림에 갈 때 나도 따라가도 되는 거지? 약속했잖아."
"안 돼요! 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검을 못 쓰면 다시 평범한 일반인이 되는 거잖아요."
"오빠한테는 총도 있단다."
연하가 입을 앙 다물었다.
역시 귀엽네.
"약속했잖아. 자꾸 안된다고 그러면 오빠 삐진다? 일주일 동안 말도 안 붙힐거야."
"하아... 알았어요. 대신 절대 나서지 말고, 위험할 것 같으면 하연 언니 뒤에 숨으세요. 하연이 언니 뒤도 위험할 것 같으면 도시쪽으로 뛰시고요."
"어떻게 동생을 버리고 도망... 을 잘 갈 수 있지, 아무렴 동생들이 고위 각성자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허매, 눈빛 매서운 거 보소.
쪼매난 애가 저렇게 쳐다봐 봤자 무서움 보다는 귀여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지만, 귀여움이 A급 각성자라는 능력을 이겨내지는 못 했는지, 매서운 눈빛에 나도 모르게 움찔해 버렸다.
어떻게 보면, 나를 강제로 제어하려고 하는 걸로 볼 수도 있지만 오빠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화를내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슬슬 돌아갈까? 계속 게이트 안에 있을 순 없잖아."
"가기 전에 게이트 한 번 싹 비우고 가죠.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고, 괜히 밖에서 대기 타고 있는 불쌍한 각성자의 일도 줄여줄 수 있으니까요."
연하의 몸이 하얀색으로 반짝 하더니 모든 게이트 내부의 모든 부분을 훑고 지나가는 빛의 파장이 발산됐다.
"됐어요!"
음산하게 웃는 모습이 꼭 나에게 실력행사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기분탓이겠지?
주변을 훑어보니, 멀찍이서 보이던 초록초록한 괴물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연하의 권능은 전투 계열이 아닌 걸로 알고 있었는데 A급 각성자쯤 되면 단순히 마력만 가지고도 이런 현상을 발생 시킬 수 있는 건가?
하긴, 연하도 비전투 계열 능력인데 싸움도 잘했지.
"그러면 돌아가자."
돌아가는 일은 굉장히 심심했다.
워낙 외괵지역으로 온 것이라서 걸어가는데 꽤 시간이 걸렸는데 방금 전까지 싸운 느낌이 되버려서 둘이서 대화도 하지 않고 마냥 걸었다.
'근데 길이 꽤 익숙한데?'
아니나 다를까 하연이를 만나기 전에 내가 살던 길목이었다.
이미 짐까지 다 뺀 집이었... 안 뺏구나? 새 집을 사고 짐을 옮기려고 했는데 하연이가 우리총포상에 오고, 불안감에 뛰어가고, 둘이서 잠시 대화하다고 정신 차리고 하연이를 따라가 버리는 바람에 이전에 쓰던 짐이 그대로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중요한 짐은 없었고, 옷가지 정도 있는 게 전부인데,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은 하연이가 사준 고오급 옷들이라 굳이 짐을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다.
"무슨 생각하고 계세요?"
내가 다른 생가글 하고 있는 것이 티가났던 걸까? 연하가 고개를 가볍게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이 근처가 내가 예전에 살던 집이어서,"
연하의 눈이 땡그랗게 떠졌다.
"구경해봐도 돼요?"
"그래,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할 것도 없으니까."
터덜터덜 걸어서 옛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골목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구걸하는 벙어리 아저씨도 없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저번에 한 번 하연이가 이 근처에 있었다고 사람의 왕래가 없어진게 신기하긴 했지만, 그렇게 이상한 현상은 아니었다. 빈민가는 쓸데 없이 넓은 구역이니까, 이런 작은 골목 쯤, 못 들어온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올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여기야."
판자 몇 개에 겨우 의지해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작은집, 내버려 둔지 시간이 꽤 지나서 그런지 먼지가 잔뜩 끼얹어 있는 모습이었다.
"에이, 거짓말하지 마요. 어떻게 이런데서 사람이 살아요?"
"살아, 그냥 땅에서 사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오라버니가 이런곳에서 살진 않으셨을 것 같아서요. D급 몬스터도 혼자 때려잡는 분인데 이런곳에서 살 이유가 없잖아요."
"돈 아끼려고 여기서 살았지, 크게 불편하진 않았으니까."
잠만 자는 공간인 만큼, 굳이 좋은 곳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부도 구경할래? 아니면 그냥 갈까?"
"... 그냥 갈래요. 내부까지 구경하면 오라버니의 어두운 과거랑 직면할 것 같은 기분이에요,"
"뭔소리야."
실없이 웃고, 집으로 향했다.
***
대산림으로 향하기 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야 비각성자인데다가 일하던 곳도 사장님이 사라지셔서 일도 못하는 상태고, 연하는 일단 명목상 휴가 중이었기에 따로 할 일이 없는 상태라서 괜찮았지만 하연이가 굉장히 바빴다.
도시 일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던 애가 갑자기 도시를 전부 지배할 것 처럼 바삐 움직이고 있었기에 일주일 정도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잉여력을 자랑하고 있기엔 너무 심심했기 때문에 애들 수련하는 거나 도와주기로 했다.
"하아... 하아... 언제까지... 하아... 뛰어야 해요..."
"아직 한참 남았다. 동생들도 쉽게 뛰는 걸, 그렇게 힘들어 하면 어떡하냐."
"걔네는 각성자잖아요!"
결국 바닥에 쓰러져 버린 사현이, 땀을뻘뻘 흘리며 넘어지는 모습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아리와 가연이가 보였다.
"한눈 팔지 마!"
곧바로 연하한테 꿀밤을 맞는 신세가 돼 버렸지만.
"월하도 바쁘고, 조만간 우리 남매도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울텐데 네가 동생들을 지켜줘야지."
"동생들이 저를 지켜주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는 연약한 일반인이고 쟤네들은 강력한 각성자들인데..."
"그래서 동생들 뒤에 숨어서 도움만 받겠다는 거야?"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봐주니 눈에서 불이 튀는 게 보였다.
역시 효과 확실하다니까, 의욕 살리는 데에는 역시 비웃음 최고지.
"그럼 계속 뛰어!"
사현이 정도면 충분히 재능이 있는 애였다. 지금부터 빡 세게 가르치면 어른이 될 때쯤엔 E급 몬스터 정도는 혼자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은 재능이 보였다.
물론 총이 있다는 가정하에.
제자를 키운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비명을 지르면서 달리고 있는 사현이를 보니 뭔가 마음이 편안해 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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