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사이비2
* * *
'역시 너였구나.'
생각보다 충격이 덜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어서 일까? 내 심장은 놀라울 정도로 평온했다.
"혹시 더 알고 있는 정보 없어요?"
"잘 모르겠어요. 저희 한테는 그냥 무기나 만들라고 시켰거든요."
"여기서 있던 일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저보다는 저분이 더 잘 아실 거에요."
여성이 조심스럽게 사장님을 가리켰다.
가장 먼저 오셨다고 했으니, 다른 사람에 비해 아는 것도 많으시겠지.
애초에 지금까지 연하의 질문에 답을 해주신 것도 사장님이셨고.
"동굴 안에만 있어서 시간감각이 흐릿하긴 하지만, 자기 3시간 전 쯤 되면 놈들끼리 모여서 기도를 진행하는 소리가 들렸어. 이수아라는 여자가 진짜 신이라도 되는 것 마냥,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반복했지."
"다른 이들이 찾아온 적은 없었어요?"
"확답을 해줄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이 동굴에 들어온 걸 본 적은 없지만, 동굴 외부에서 연락을 취했을 수도 있고 자는 사이에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으니까."
"도대체 누굴까요. 이수아라는 사람..."
"월하 그년 한테 데려가서 능력을 해제하면 알아낼 수 있겠지."
내가 아는 이수아에 대해서 애들한테 말해줘야 할까?
이전의 나라면 아마 말하지 않을 거다. 나는 지금까지 애들한테 나의 과거사를 말하기를 극히 꺼려했으니까. 하연이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내 이름조차 밝히지 않았고, 월하와 처음 만났을 때는 내 인생에 관한 그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말하자.'
가족이잖아. 언제까지고 숨기고만 살 순 없어.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게 꼭 과거를 잊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이수아라는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네? 오라버니가요?"
연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하연언니나 월하씨처럼, 어렸을 때 구해준 사이는 아니죠?"
"조금 다르지만 구해줬다고 봐도 무방하지."
연하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입도 작은 애라서 그렇게 추하진 않았지만, 연하의 놀람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했다.
"오라버니? 도대체 언제..."
"하연이 너를 만나기도 전에 있던 일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니까.
"조금 긴 얘기가 될 지도 모르는데, 들어줄래?"
지금까지 그 누구한테도 꺼내지 않았던 이야기다. 나를 아들처럼 대해준 사장님한테도 말하지 않은 내용.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떤 시설에 있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이수아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나와는 어떤 관계였는지.
천마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로 하지 않았다. 이수아 하나한테만 집중해도 모자란 지금 상황에서 굳이 천마를 언급해서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일단 지금 일을 해결하고 말하자.
"그러면, 지금까지 계속 그년의 세뇌를 당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하연아, 눈에 힘 좀 풀어라. 아무리 나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이수아한테 화난 거라고 해도, 그렇게 까지 힘을 주고 있으면 무섭거든?
"정확히는 세뇌의 잔재가 남아있던 거지. 내가 어렸을 때 너를 떠나 온 것도, 세뇌의 영향일 수도 있고."
그 때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면 떠나야 한 다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멀쩡해."
"하긴, 월하의 권능을 그렇게 맞으셨는데..."
"그걸로 풀어낸 게 아니야.
그 이전부터 몇가지 깨달음을 얻고 성격을 개선 했다.
하연이와 다시 남매의 연을 이으며 사람의 가치는 쓸모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고, 내 안의 또 다른 인격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더 주도적인 행동을 하고자 결정했다.
이수아의 세뇌를 푼 건 월하가 아니라 나다.
"내가 살아오면서, 사람들과의 인연을 맺으면서 내가 풀어온 거야."
흐릿하게 잡혀있던 생각을 입으로 뱉어내니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를 기억에서 잊고 있도록, 아해의 정신이 97호의 속박에서 완전히 풀려날 때까지, 나에 관한 기억은 그대의 정신 깊은 곳에 봉인해 두도록 하겠다.'
내 이마를 잡고 씁쓸하게 웃고 있는 천마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이제야 완전하게 풀려났다는 걸까? 그래서 천마에 대한 나의 기억이 다시 상기 되는 것이고.
'조만간 천마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네.'
그래, 올 테면 와봐. 너도 바쁜 몸이니까 와봤자 안부 인사나 하고 가겠지.
"오라버니한테 그런 과거가... 그래서 저번에 인공 각성을 언급했을 때 표정이 그렇게 굳으셨던 거에요?"
"그래, 내가 그곳 출신이니까."
썩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서의 기억 중 나쁜 기억은 거의 없었고 내가 비각성자면서도 이 정도의 강함을 갖게 해준 곳이기도 했으니까.
"이수아 말인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
"일단 S급 각성자로 추정되는 상태니까 섣불리 건들 순 없죠. 길드장님한테 보고 하고 차후에 어떻게 할지 회의를 해야 할 것같아요."
"아마, 반드시 사로잡는 걸로 회의 결과가 나올 것 같아요. 왜냐하면 길드 회의에서 이수아에대한 어떠한 견제도 없는걸로 결론이 나오면 제가 직접 가서 죽여버린다고 말할 거거든요."
하연이, 화 많이 났나보네. 눈에서 핏줄이 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감히 오라버니를 세뇌한 년이잖아요. 절대로 평화롭게 사는 꼴은 못 봐요."
글쎄, 지금은 몰라도 그 때는 큰 악의를 가지고 세뇌를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린 아이 특유의 소유욕으로 나에게 암시를 건 거겠지.
어리다는 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만, 적절한 사과가 더해진다면 충분히 용서해줄 의향이 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요. 납치 당했던 사람들 신원 확인도 해야 하고 월하씨한테 데려가서 세뇌 걸린 것도 풀어야 하고 솔로 가서 보고도 해야하고, 할게 많아요. 어차피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 테니까, 도시로 돌아가서 생각해요."
연하의 말이 맞다. 도시 근처의 대삼림에 도시 사람들이 납치되고 세뇌 받은 이들이 도시 근처까지 다가왔지만,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짧아도 3일, 그 정도까지는 충분히 평화를 즐길 수 있을 거다.
***
'이제야 세뇌를 깨뜨린 것이냐?'
생각보다 많이 늦었다. 분명 아해라면 금방 세뇌를 깨뜨리고 본좌를 떠올릴 줄 알았건만, 너무 오래 걸려서 그냥 찾아갈까 고민한 것이 수백 번이었다.
'천마가 되어서 말을 가볍게 여기면 안 되지.'
그런 마음으로 기다려 온 것이 벌써 20년.
전생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를 기다릴 때는 시간이 느리게 흐리는 법이다.
"기쁘신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나의 애제자가 물어왔다.
무림에서 태어났어도 꽤 성공했을 기재였다. 그런 이가 천마의 가르침을 받고 각성까지 했으니 나를 제외한 이 중에선 최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지.
'그래도 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을 턴데?'
아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기뻤던 걸까?
"옛 인연을 만날 수 있게 되어서 말이다."
지금은 중국이라 불리는 중원의 전도를 펼쳤다.
본래는 이 땅을 전부 지배한 뒤, 아해에게 찾아가려고 했지만, 역시 혼자서 중원을 지배하는 건 힘들었다.
조금 구차하긴 하지만, 중원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 있고, 중원의 어디를 가든, 마교의 천마라고 하면 나에게 고개를 숙일 테니, 중원을 제패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겠지.
"내 일정이 언제까지 짜여있지?"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예정되어있는 일정이 있으십니다."
"그 이후엔 일정을 잡지 말도록."
당장이라도 아해를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천마로서 할 일은 다 끝내고 가야겠지. 책임감 없는 지도자라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오늘부터는 휴식 없이 일을 진행할테니 그리 알도록,"
"알겠습니다 스승님."
휴식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만나기 위해선, 지금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여야 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