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사이비4
* * *
"커흑..."
일단 내려치기 직전에 힘을 빼긴 했는데, 그래도 꽤 아픈 모양이다. 손도 잘 안 닿는 등을 만지려 뒹굴 거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괜스래 안쓰러워 졌다.
"승부 났죠?"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이를 악물고 일어나는 그녀의 모습에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엔 마나 쓴다."
그녀의 주먹에 붉으스름한 마나가 감싸졌다.
쐐애애액!!
신체강화에도 마나를 사용했는지 이번 돌격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아까처럼 잡아서 메칠 수도 있었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두번이나 당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겠지.
적당히 주먹의 궤도를 읽고 고개를 비틀어 피해냈다.
피하는 것 까지는 예상 했는지 바로 내 목을 조이려 팔이 움직이는 게 보였지만 내가 더 빨랐다.
턱... 쿵!!
그녀의 배에 손을 올리고 힘을주어 밀어내니 3미터 정도 날다가 땅에 고꾸라 졌다.
내가 각성자에게 타격을 주려면 단검이나 총이 있어야 하는 데 둘 다 간단한 대련에서 쓰기엔 너무 과한 애들이다.
결국 물리력으로 밀어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너 비각성자 맞아? 힘이 왜 이렇게 세?"
"제가 센것도 맞는데요. 공격하느라 정신 팔린 틈에 밀어서 날아가신거거든요? 각성자가 마나까지 써가면서 버티고 있었으면 저라도 못 날려요."
"허어, 키도 쪼매나고 체격도 그렇게 안 커 보이는데?"
"키 안 작거든요?!"
177이라고 177!! 이게 작은 키냐?!
"몸 좀 만져봐도 돼?"
"안 돼요."
"팔만 만져볼게, 한 번 대봐."
"안 돼요. 절대."
"쪼잔하기는."
그렇게 말하며 일어나면서 내 배 쪽으로 팔을 휙 뻗었다.
"뭐 하세요?"
물론 금세 제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몸과 몸이 부딪히는 상황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흐음, 확실히 근육이 있는 몸이긴 하네, 제복에 가려져서 잘 보여서 그런지 좋은 몸이야."
이 사람을 어찌해야 좋을까. 벌써부터 골이 아파왔다.
"한 번 싸웠으니까 됐죠? 이제 돌아가요."
"나 배고파, 식당으로 안내해."
"일단 씻고 가요. 어차피 다른 분들도 모셔가야 하니까요."
사장님의 방으로 이동하니, 사장님 한 분 밖에 안 계셨다.
"다른 분들은 다 돌아가셨어요?"
"어, 다들 좀 씻고 쉬고 싶다고 하더라."
"나도 씻으러 간다. 다 씻고 밥 먹을 사람들 찾아서 돌아올게."
그렇게 말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납치되어 있던 사람이 왜 저렇게 텐션이 높은지.
"사장님은 씻으셨어요?"
"당연하지, 원래 씻는데엔 3분이면 충분한 법이야."
무슨 라면도 아니고...
"그래서 왜 찾아왔어? 혜연이가 갑자기 싸우자고 덤벼서 그렇지 원래는 나 찾아 온 거일 거 아냐."
"마땅히 할 일도 없었고, 사장님이랑 할 말도 많았으니까요."
"무슨 말?"
"도대체 어쩌다가 잡혀가게 된 거에요?"
내가 아는 사장님은 정말 강한 분이다. 나랑 비교할 정도는 안 되지만, 기본적으로 외출할 땐 등에 멜 수 있을 정도로 큰 총을 들고 다니시는 데다가 사격 실력도 좋으셔서 어지간한 몬스터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는 분이다.
'어지간한 각성자가 덤벼도 물리력으로 승부할 수 있을 정도로 무식한 총인데...'
"아까 말했잖아. 휴가라도 갔다 오려고 가게 문을 닫았는데 바로 납치 당했어."
"사장님 성격에 휴가 간다고 총을 두고 가실 분은 아니잖아요? 상대가 누구였길래 그렇게 무력하게 잡혀간거에요?"
"난 무력하게 잡혀갔다고 한 적 없다."
"가게 근처가 깔끔하던대요? 총 한 발이라도 쐈으면 주변에 분명하게 흔적이 남았을 텐데 말이에요."
"..."
할 말이 없으신가보군.
"그래서, 누구한테 납치 됐는지에 대한 기억은 있으세요?"
"없어. 문을 닫고 발을 3걸음 때자마자 기절했다. 쓰러지는 기억까지는 명확하니까, 기억이 잘려나간 건 아닐거야."
"쓰러지기 전에 어디가 아파오지 않으셨어요?"
"마취제는 아니야. 뭔가 꽂히는 느낌도 없었고, 일어났을 때도 깔끔하게 일어났으니까."
그렇다면 능력인가? 아마 빌런들 중에 사람을 단순간에 기절시킬 수 있는 인물이 있는 모양이었다.
"더 쓸만한 정보 같은 건 없어요?"
"아까 내가, 무기들을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랬죠."
"아직까지는 만들어 놓은 물건들을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도 했고."
"그렇죠."
"어제 녀석들이 곧, 그분이 오신다고 했던 말을 들었어."
"엄청 중요한 정보잖아요?! 왜 아까 말 안 하셨어요?"
곧 온다고? 당장 오늘 올 수도 있다는 소리잖아.
"아까는 질문에 답하느라 말할 틈이 없었지, 나중에 그 여자를 다시 만나면 말해주려고 했어."
"더 기억나는 건 없어요?"
"당장 생각나는 건 없다."
"저는 연하한테 갔다 올게요. 좀 오래 안 온다 싶으면 사람들 데리고 5층으로 가셔서 식당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시면 돼요."
"그래 잘 다녀와라."
빌런들이 갖혀있는 방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꽤 깊숙한 곳에 있었기에 가는 데에 시간이 꽤 걸렸는데, 방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음산한 기운이 풍겨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발걸음 속도를 더 높여서 뛰어가자 문 앞에 주저앉아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연하의 모습이 보였다.
"연하야? 너 왜 그러고 있어?"
"아, 오라버니 오셨어요? 그냥 할 것도 없이 멍하게 있으니 기력이 없어서 앉아 있었답니다."
생각해 보니까 얘 일주일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었지? 동공이 풀려 있는 게 많이 힘든 모양이다.
"오라버니는 왜 오신거에요? 혹시 혼자서 멍하니 자리만 지키고 있어야 하는 제가 불쌍해서 오셨나요?"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는 연하의 모습에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어, 우리 연하 생각나서 왔지..."
"다행이에요. 하연언니의 화가 풀릴 때까지 여기 혼자 앉아서 멍때리고 있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급한 일이 생기면 하연이가 화가 났어도 돌아오지 않을까?"
"예를 들면요오?"
"이수아라는 여자가 곧 물건을 가지러 동굴로 올거라는 정보를 받았어."
좋아 자연스럽게 말했어.
풀려 있던 연하의 동공이 점차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급한 일 맞네요."
"어제 기준으로 곧, 이라고 하더라고."
바로 일어나서 무전기를 꺼네들고는 하연이에게 연락했다.
"하연언니, 급한 일이에요. 그 년이 곧, 동굴로 온다는 모양이에요. 어제 기준으로 곧이라고 했으니까 빠르면 오늘,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올 것 같아요. 아마 오늘 오면 내일 간다고 말했을 테니, 당장 오늘 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어디야?
"빌런들 가둬 놓은 방 앞이요."
"그래, 그년이 곧 온다고?"
무전치다가 갑자기 나타는 건 몇 번을 봐도 익숙해 지지가 않는단 말이지.
"네, 일처리를 빨리 진행해야, 놓치지 않게 함정을 파둘 수 있겠죠?"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저를 솔로 데려다 주시고, 빌런들이 난동 부리지 않게 감시하고 있어주세요."
"월하한테도 부탁할 수 있는 일이잖아. 지금까지 안하고 뭐했어?"
"시간이 없으시데요."
"시간을 1분도 못 낸데? 너 솔로 옮겨 놓고 오는 건 10초도 안 걸리고, 걔 권능이라면 하루 정도 능력을 무력화 시켜 놓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가능할 텐데."
"네?"
연하의 눈이 바들바들 떨렸다.
"세뇌를 푸는 거야, 같은 S급 각성자가 걸어 놓은 걸로 추정돼서 푸는 데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르지만, 끽해야 B급 밖에 안되는 각성자의 능력을 잠궈버리는 건, 잠깐만 시간을 써도 될텐데."
"... 월하씨도 그 사실을 아셨겠죠?"
"당연하지, 자기 능력인데 그걸 모를까."
까득!!
화가 많이 났나 보구나 연하야.
하긴 나라도 화가 날 것 같아.
"오라버니도 알고 계셨나요?"
"!!! 아니 난 몰랐어! 연하의 능력을 그런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거든!!"
분위기 한 번 살벌하네.
"그리고 사실 언니도 할 수 있단다."
"네?"
하연이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한동안은 마나를 사용하지 못할 거야. 마나도 못 쓰는 빌런들따위, 어차피 문 밖으로 도망치지도 못 할테니까 상관없지?"
"... 저는 대체 뭘 위해 여기서 앉아 있던 거에요?"
"아무리 내가 화나서 폭주 하는 상태였어도 그렇지 한 번 말해 보지 그랬어. 1분도 안 걸리는 일인데..."
연하가 털썩하고 주저 앉았다.
불쌍한 마음에 어깨 몇 번 토닥여 주니 연하가 나에게 안겨왔다.
"연하야? 솔로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어차피 내 할 일도 없어진 것 같으니까 같이 가자."
"조금만 이대로 있을 게요..."
"바쁜일이라면서."
하연이가 나에게서 연하를 때어냈다.
"오라버니도 같이 가실래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연하의 시선을 겨우 피했다.
"아니... 나는 납치 된 사람들을 관리해야 해서..."
"그렇다고 하시니까 우리 둘이 가자 연하야."
하연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바람소리도 안 났는데 도대체 무슨 원리로 이동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