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미르1
* * *
"오늘 부터 또 바쁘다고 했지?"
"네, 성전인가 뭔가를 도와 줘야 하니까요."
하연이가 굉장히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어제 밤 이후로 계속 이 모양인데,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어제 두 분이서 아주 즐거운 밤을 보내셨나 봐요?"
월하가 하연이를 째릿하고 노려봤지만 하연이는 가볍게 비웃으며 무시할 뿐이었다.
"다음엔 제 차례신 거 아시죠?"
"나중에 하자 나중에..."
몸이 힘들기도 했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도 했다. 적어도 성전이라는 게 진행 되기 전까지는 나도 근처 도시에서 지내기로 했으니까.
'도시 이름이 미르 라고 했나?'
예쁜 이름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도시 이름 치고는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름도 없는 우리 도시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러면 슬슬 출발하죠. 길드장님 기다리시겠어요."
이수아의 성전을 도와주는 인력은 하연이와 연하, 그리고 나까지 셋 뿐이었지만, 처음 미르로 갈 때는 길드장까지 함께 가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하지만 이수아가 함정을 파 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외세의 개입은 안 된다는 걸 갑자기 깨닫고 도시의 지배자랑 갑자기 손을 잡았을지 어떻게 알아?
"조심히 다녀오세요. 기사님이 어디가서 다치실 분이 아니시란 건 알지만, 괜히 나서지 마시고요."
"오냐. 잘 다녀올게."
등에 닿는 하연이의 손을 느끼자마자 이전의 동굴로 이동해 있었다.
"왔어? 빨리 움직이자 나 바빠."
"길드원들 하나도 설득 안 해 놨죠?"
"충동적으로 움직인 거니까, 독단 적인 건 둘째치고, 미르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보니 관리가 힘들 거라는 애들이 많더라고, 괜히 힘만 소모하고 이득을 못 볼 수도 있으니까."
"지배자라는 놈만 죽이면 되잖아요. 결국 가용 가능한 S급 각성자 수가 많은 건 우리니까 함부로 움직이진 않겠죠."
"그렇겠지."
길드장이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나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하연이한테 다가왔다.
"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얼굴이 산뜻해?"
"내가 뭐?"
"그리고 평소답지 않게 말투도 덜 엄한 느낌이고...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그런거 없었거든?"
"봐바 지금도 말투가 소녀소녀 하잖아. 평소의 엄근진한 하연이는 어디갔어?"
그렇게 티가 났나?
적당히 텐션이 높아 보이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넘어가지만 나중에 시간 나면 반드시 무슨 일인지 들을 테니까 각오하고 있어."
"진짜 아무일도 아니라니까..."
"아무튼 이동하죠!!"
연하의 중재에 하연이가 내 몸을 잡았다.
"언니? 저는요?"
"길드장이랑 같이 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시야가 마목으로 이루어진 숲으로 바뀌었다.
"대삼림 주변을 삥 돌아서 가는 거야?"
"아니요. 어제 위치를 들어보니까 직선으로 가도 될 것 같더라고요. 중심부를 살짝 스치긴 하는데, 완전히 중심까지 들어가는 건 또 아니어서요."
다시 한 번 시야가 변했다. 확실히 중심 부근이라서 그런지 B급 정도 돼보이는 몬스터가 무리를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살벌하네.'
"다음에 이동할 땐 좀 조심해야 할 수도 있어요. 괴수들은 다 중심 쪽에 모여 있긴 한데, 가끔 나들이를 나오는 애가 하나 있거든요."
"그걸 어떻게 알아?"
"다 조사를 해 놨죠."
다시 한 번 시야가 변했다.
확실히 중심부는 중심부인지, A급 쯤 되어 보이는 몬스터들이 듬성듬성 돌아다니고 있... 지 않았다.
"아 하필 오늘 있네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 괴물이었다.
체고만 수십 미터가 넘어 보였고, 몸길이는 백미터도 가뿐이 넘을 듯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소를 떠올리게 했지만, 소라기엔 너무 나도 멋있었다.
딱 봐도 엄청난 근육이 온몸에 자리 잡고 있었고, 겉 가죽도 소 따위는 차원이 달랐다.
군데 군데 금속으로 되어있는 놈의 겉 가죽은 남성의 로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외뿔아 오랜만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었는데, 분명 두 개였을 걸로 추정되는 뿔 중 하나가 잘려 나가있었다는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크게 나있을 게 분명했던 뿔인데 오른쪽 뿔은 자를 대고 자른 듯 완벽하게 잘려나가 있었다.
"아는 애야?"
"대삼림에 대한 조사는 주기적으로 진행하니까요. 수십 년 이상 살아있는 걸로 추정되는 S급 몬스터인데, 처음 조사를 시작한 시점에선 이미 뿔이 잘려 있었대요. 그 때문인지 중심부에서 밀려서 주변을 배회할 때도 많고요."
"아하, 그런데 S급 등급이면 너도 눈치 챌 수 있는 거 아니야?"
"눈치 채긴 할 텐데, 대삼림에 중심에 사는 고위 몬스터들은 먼저 안 건드리면 보통 안 움직여요. 애들이 상위 포식자가 없어서 나태해져가지고..."
"음... 내가 보기엔 공격 하려는 모습인 것 같은데?"
외뿔이가 굽으로 된 발로 바닥을 벅벅 긁었다.
나름 튼튼하게 자라있던 마목들이 그 발질 몇 번에 우수수 뽑혀 나갔다.
'기분탓인가? 왜 나를 보는 것 같지?'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죠. 짜피 공간이동 하면 귀찮아서 라도 안 쪼아와요."
다시 한번 시야가 변했다.
"여기까지 따라오면 어떻게 해?"
"어떡하긴요. 앗사리 하고 잡으면 되죠. 저쪽 금방에서 크게 싸웠다가는 대삼림 중심부의 괴물들이 단체로 자극 받아서 못 움직이는 데, 이런 외곽까지 굳이 나와준다? 저 혼자였으면 조금 애매할 수도 있겠는데, 길드장 있으니까, 금방 잡을 거에요."
"오는 것 같은데?"
저 멀리서 흙먼지가 크게 이는 것이 보였다.
충격량이 얼마나 큰지 부딪힌 마목들이 바스라지면서 하늘 위로 치솟았다.
"여기는 너무 중심이니까 다른 데로 이동할게요."
한번 더 시야가 변하니, 대삼림의 외곽으로 이동한듯 상대적으로 약한 몬스터들만 가득 보였다.
익숙한 지리는 아닌 듯 보아, 우리 도시 근처가 아닌 다른 외곽인 모양이다.
"괜히 미르 근처에서 싸웠다가 시선 끌면 귀찮아지니까. 다른 곳으로 왔어요. 아마 길드장도 곧 올 거에요."
"맞아 지금 도착했거든."
길드장은 굉장히 들뜬 표정이었다.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달다 달아! 라는 느낌의 표정이라고 할까? 아주 행복감에 가득 차 있는 표정이었다.
"외뿔이가 간도 크네, 감히 중심부를 벗어나? 내 존재를 눈치 못챘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몬스터들도 감지 범위가 은근히 넓으니까. 봐바 벌써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잖아."
저 먼곳에서 피어오르는 먼지가 보였다.
무서운 건 먼지 바람의 크기가 정말 빠르게 커지고 있다는 거? 작디 작은 크기에서 눈으로 식별 되는 수준까지 커질 때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리 두 명이 하나를 잡는 다해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지금 일이 대수야? 맛있는 먹거리가 스스로 우리 입으로 들어온 데 맛나게 씹어줘야지."
"연하 너는 오라버니 보호하고 있어."
"네! 언니."
연하가 나를 쥐어 잡고는 반대쪽으로 뛰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어느새 놈의 몸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쾅!!!!
라고 생각하자마자 하연이와 충돌했다.
질량의 차이가 압도적일 텐데 하연이가 외뿔이를 잡고 수십 미터 정도 밀려난 걸 제외하면 크게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의 마목들이 충격에 의해 다 뽑혀 나갔다.
연하가 잡아주고 있지 않았다면 나도 같이 날아갔겠지.
"외뿔이는 저 덩치랑 다르게, 육체파가 아니거든요."
"...저 몸을 가지고?"
"S급 정도 되면 순수 육체파 몬스터는 없어요. 다 마력으로 신체를 강화하는 방식인데. 외뿔이는 그쪽에서 효율이 조금 떨어지거든요. 대신 마력을 안 쓰고 있을 때의 육체 능력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속하죠."
그래 연하야, 설명 충 고맙다.
근데 쟤 자꾸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딜 한 눈을 팔아?"
외뿔이의 얼굴쪽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다.
얼굴 크기도 20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았는데 그 거대한 얼굴이 쩍하고 베어지는 모습은 상당히 장관이었다.
금방 재생되었는지 피가 그치긴 했지만.
"S급 들의싸움은 대개 소모전이에요. 한 쪽이 완전히 압도할 수가 없거든요. 서로의 마력과 권능을 소모해 가면서 싸우다가 먼저 다 소모된 쪽이 져요."
이번엔 외뿔이의 다리에서 커다란 불길이 일었다.
온도가 얼마나 높은지 수백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이곳까지 열기가 다다를 정도였다.
"보통 한 마리 잡는 데 얼마나 걸려?"
"글쎄요? S급 몬스터를 잡았다는 기록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길드장님이나 하연언니나 하루 정도면 누가 지든 결판이 날 것 같다고 하던데요."
하루... 그래도 둘이 있으니까 금방 잡을 수 있겠지?
쿵쿵쿵!!
근데 뭔가 진동이 심해지는 느낌이...
뒤에서 누가 끌어 당기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변했다.
"왜 자꾸 오라버니를 노릴 까요?"
"여기서 가장 약해서 그런 거 아니야? 만만하니까 먼저 죽이려는 거지."
"오라버니는 너무 약해서 애초에 방해도 안되는 걸요."
그러어어어어어어어어!!!!
외뿔이가 거대한 울음소리와 함께 다시 이쪽을 바라봤다.
"수현씨라고 했나? 하연씨 오라버니, 뭐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조금만 도와주시면 시간을 엄청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마음대로 하세요."
내가 왜 도와준다고 했을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