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혁명단4
* * *
"내가 어렸을 때, 인공 각성 실험의 대상이 됐었다는 건 말했지?"
"네, 이수아랑도 그 때 만났다면서요."
"1호도 그 때 만났던 애였어. 우리랑 다르게 말도 안되게 강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 때도 어렸을 때 아니었어요? 애가 강하면 얼마나 강하다고 그래요."
연하의 말에 곰곰히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탈출할 때 보여줬던 무력을 제외하면 그녀가 압도적인 위용을 보여준적은 없긴 하다.
"아냐, 엄청 강했어. 신체 능력은 제쳐 두고서라도 몸을 움직이는 기술 하나 만큼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뛰어 났거든."
"오라버니랑 싸워도 이길 수 있었어요?"
"식스 말 안 들었냐? 1호가 나를 데리고 탈출 했다니까? 나 같은 건 걔 상대도 안 됐어."
아까 봤던 검성 정도쯤 돼야 그나마 손을 섞을 수 있으려나?
'1호가 천마라는 것도 말하는 게 좋을까?'
연하와 하연이는 중국에 있는 천마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해서 귀찮아 지기 싫었다.
"저번에 이수아에 대해서 설명해 줄 때 같이 설명했으면 좋았잖아요."
연하가 볼을 크게 부풀렸다.
"그렇게 중요한 정보는 아니니까 말 안 했지."
"식스란 사람은 또 누구에요? 친했어요?"
"친하기는, 그냥 어렸을 때 시설에 같이 지낸 애 중에 하나라는 느낌이야. 아마 말도 거의 안 섞었을걸?"
"오라버니가 정말 멋지신 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인기가 많았다는 걸 실감하니까 마음이 불안해 지네요."
"애초에 내가 인기가 많았다는 말 자체가 믿을 게 못 돼, 아무리 여자애들이랑 친했어도 남자애가 어떻게 여자애들의 진짜 마음을 알겠냐."
"네? 여자 아니었어요?"
뭔 소리야 누가봐도 남자구만.
남자 평균키에 한참 못 미치기도 하고 얼굴도 남자치곤 귀염상이고, 목소리도 높은 편이긴...
아니 생각하다 보니까 점점 헷갈리는데?
"남자일... 걸?"
"수아씨, 남자에요 여자에요?"
"식스? 글쎄 기억이 잘 안 나긴 하는데, 어렸을 때 여자애들이랑 친하게 지냈던 남자애는 확실하게 기억 속에 없어."
"그러면 여자네!"
하연이가 다시 따가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확실한 거 아니잖아! 그리고, 여자면 뭐 어때서, 애초에 나는 걔랑 접점이 아예 없었어. 내가 시설에서 인연이 있던 건 1호랑 이수아 둘 뿐이라고!"
이수아의 볼이 붉어지며 가볍게 헛기침을 하는 것이 보였다.
"... 그러면 일단 지금은 넘어가 드릴게요."
"그런데 1호라는 여자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요?"
"걔가 검성 아니야? 나이대도 얼추 비슷해 보이고, 검도 겁나게 잘 다루잖아."
"그건 아닐 거야. 당장 나랑 1호랑 헤어졌을 때의 실력이 검성보다도 더 뛰어났으니까. 실력이 퇴화한 게 아니라면 그럴 리는 없지."
내말에 연하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오라버니가 8살 때 시설에서 탈출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 아마 1호도 그 근처였을 거야."
"...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8살 짜리 꼬마애가 그렇게 강해요? 혹시 더 기억 나는 건 없으세요?"
"말투가 엄청 어른 스러웠어요. 정확히 말하면 옛스러웠는데, 어느쪽이든 애가 할만한 말투는 아니었어요."
이수아가 연하의 물음에 답했다.
"강신계 능력 각성잔가..."
"그건 아닐걸? 걔 한테선 단 한 번도 마나가 검출 된 적이 없으니까."
"고위금 강신계 능력을 각성했다면 충분히 마나를 숨길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강신 능력은 강신에 제한이 있지 않나? 걔는 볼 때마다 그 상태던데.
"8살... 8살?"
연하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설마?!"
"왜 뭐라도 알아냈어?"
"일단 수아씨, 혹시 잠시 저희 목소리 못 들어도 괜찮아요?"
"네? 갑자기 왜요?"
"도시의 기밀 정보여서요."
강렬한 연하의 눈빛에 이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이수아의 귀에 하얀색 빛이 휘감아졌다.
"제 기억이 맞다면 천마가 중국에 처음으로 나타난 게 지금으로 부터 17년 쯤 전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생각보다 빠르게 정답에 가까워지는 연하의 추리에 괜히 뜨끔했다.
"그... 그런 정보가 어디에 있는데?"
"길드 정보실에 있죠. 17년 전에는 방랑자가 활동하지 않았지만 2년 전에 중국에서 천마 강림 15주년 행사를 했다고 방랑자가 알려준 기록이 있거든요."
"그래서? 1호가 천마라는 거야?"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소리라는 거죠. 시설을 가볍게 박살 내고, 한반도를 여유롭게 거닐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라면, 그것도 단순히 신체 능력과 마력이 강력한 게 아니라 체술또한 뛰어나다면, 생각나는 사람은 천마 밖에 없으니까요."
"어찌 됐든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
연하얘는 눈치는 느린 주제에 분석은 쓸데 없이 빨리 한다니까.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긴요?! 만약 1호의 정체가 진짜 천마라면, 언제든 오라버니를 보러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요!"
"그렇게 대단한 여자한테까지 꼬리를 치고 다니신거에요!?"
"꼬리 치다니! 나는 그런 적 없거든! 걔는 늘 1등이고 나는 만년 2등이라서 좀 접점이 있던 것 뿐이야."
상황이 점점 개판으로 흘러갈 무렵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야 이수현, 나 식스인데 들어가도 되냐?"
조심스래 다른 애들을 바라보니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아의 귀에 있던 하얀색 빛도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어, 들어와도 돼."
"너희가 앞으로 뭘 할지 생각해 봤거든? 어렸을 때의 인연도 있고 마음만 같아서는 우리랑 같은 임무를 부여 하고 싶지만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 훈련하는 걸 너희한테 부탁하려고 해."
"갑자기 우리 보고 훈련을 시켜 달라고?"
"어,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실력이 뛰어나다면서 혁명단에는 다른 사람한테 싸움법을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너희가 교관의 역할을 해 주면 참 좋을 것 같아."
교관이라... 혁명단 입장에선 가장 좋은 선택지겠네.
기존에 교관을 맡고 있던 사람은 혁명단에서 나름 신뢰를 얻고 있었을 테니 그 사람을 빼서 외부로 돌릴 수 있으니까.
"좋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고맙다! 오늘은 저녁 먹고 푹 쉬고 내일 부터 일 하면 돼."
"저 식스씨?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연하가 식스한테 말을 걸었다.
"응, 물어봐도 돼."
"식스씨는 여성이세요 남성이세요?"
식스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다니 쾌활하게 웃었다.
"내가 착각을 많이 당하는 얼굴이긴 하지 머리도 짧고 목소리도 낮은 편이고 가슴도 없고, 그래도 머리카락 길렀을 때는 예쁘단 소리 많이 들었었는데 머리 자르니까 진짜 남자처럼 보이나 보네."
진짜 여자야?
'여자라고 생각하고 보니까 여자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남자라고 생각하고 보면 예쁘장한 남자고 여자라고 생각하고 보면 보이쉬한 여자라는 생각이 드는 기묘한 외모였다.
"이수현, 너 표정이 왜 그래? 너 설마 내가 남자인줄 알았냐?"
"정말 당당하게 남자라고 하던데요?"
"야! 너 너무한 거 아니야? 초면 이면 몰라도 네가 착각하면 안 되지!"
그래 내가 죄인이다.
'그런데 목소리 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남자 목소리인데.'
대놓고 남자는 아니어도 떠올리게 할 정도로는 선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만큼 내 남장이 완벽하다는 소리긴 한데, 조금 섭섭하다 야."
"아니 남장을 해 놓고 알아봐 달라고 하는 건 에바잖아!!"
아까 하연이와 연하랑 언쟁을 벌이느라 흥분한 걸까? 굉장히 격양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초면인 동생들은 그래도 의심은 했는데 너는 의심도 안 했잖아. 그래서 괘씸하다는 거지."
"허... 참."
지금은 목소리를 변조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지 조금 보이쉬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자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근데 이 동생들은 다시 만난 친동생들이야? 어떻게 알아봤데"
"아니 의남매야."
"오빠 잘 만났네, 얘가 좀 까칠 하긴 해도 잔 정 많고 멋진 놈이긴 하지."
갑작스럽게 칭찬 해도 내 화가 풀리진 않거든?
"확실히 우리 오라버니가 착하시긴 하죠."
"그렇지?"
난 모르겠다 잠이나 잘런다.
침대에 털썩하고 누웠다. 2층침대의 1층이라 그런지 천장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자게?"
"어, 오늘은 너무 피곤해."
우리 도시에서 출발해서 외뿔이를 잡고 이수아 집에 들려서 옷을 갈아입고 시장을 구경하다가 식스네 패거리에 이끌려서 혁명단에 들어오기까지, 평범한 하루라고 치기엔 너무나도 길었다.
"그래, 잘 자라, 내일 아침 8시에 깨우러 올게."
"오냐."
몸이 많이 피곤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잠에 들었다.
여자애들의 목소리가 끊임 없이 들리는 거 보면 밤새 수다라도 했나 본데, 그 말 하나하나를 일일이 해석할 기력은 없었다.
***
다음날, 식스에게 나를 제외한 다른 3명의 실력을 평가 받고 모두 교관으로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은 후 4명이 다 쪼개져서 자신이 맡은 곳으로 이동했다.
"네가 맡은 반이 좀 사납긴 할 텐데, 까불면 밟아 가면서 교육해도 상관없어."
"오케이."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리고 보인 것은 난장판이 되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개판이네.'
교육할 맛 나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