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천마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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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와 만난 이후 검마와 함께 쇠 빠지게 훈련을 진행했지만 아직도 내 눈을 천마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눈은 천마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으니 뇌가 해석하지 못했다.
천마의 움직임은 내 뇌가 계산한 것보다 월등히 빨랐고 한걸음 한걸음의 움직임 또한 내가 예상하기 힘든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래도 일단 움직임을 볼 수는 있었기에 어떻게든 대응하려 하면 아예 못 막는 건 또 아니었다.
'나름 대처법을 연구해왔지.'
어찌되었든 천마는 나를 향해 접근 할테고 나는 천마의 공격만 막아내면 됐다.
최대한 팔로 심장과 얼굴을 보호한 채 천마가 나에게 다가오길 기다렸다.
스으윽
천마가 내 팔들 사이로 손을 뻗더니 내 팔을 가볍게 꺾었다.
내 팔을 가볍게 무력화 한 천마가 다음으로 행한 공격은 입술 박치기였다.
그래 이해 안될 것 같아서 다시 말하자면 입술 박치기였다.
천마가 나의 볼에 입을 가져다 대는 순간 시간이 멈춰선 것만 같았다.
이년이 왜 이러지? 입술에 독이라도 묻힌 건가?
길어진 체감시간 동안 별의 별 생각이 다들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천마는 이미 멀찍히 떨어져 있었다.
"푸하하하, 정말 귀엽구나."
천마의 얼굴은 행복 그 자체로 물들어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고, 입꼬리도 가득 올라간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번 공격은 막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한 번 천마의 몸이 나에게로 쏘아졌다.
설마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공격하겠어? 라는 마음이 들면서도 자연스럽게 팔을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
"흠, 몸은 꽤 쓸만하군."
얼굴을 가린 내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천마는 내 몸을 톡톡 건드리며 내 몸을 감별하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부끄러움과 짜증에 천마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지만 천마는 너무나도 간단히 내 손을 잡아 땅에다가 메쳐 버렸다.
땅에 등이 닿기 전에 몸을 비틀어서 빠져나가려고도 해봤지만 천마는 내 대응을 너무나 간단하게 파훼 했고 결국 바닥에 박혀 버렸다.
"컥!"
"아, 너무 좋구나. 이게 얼마 만인지."
다행이 후속 공격은 없었기에 재빨리 일어나서 천마에게서 떨어질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일어날 수 있었다.
천마가 바로 붙어오니 거리를 불린다는 건 불가능 했으니까.
"느리다 아해야. 고작 그 정도 속도로 내 손에서 벗어나려 하느냐."
분명 달리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볼에 천마의 입술 도장이 박혔다.
감촉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자존심이 깎여 나가는 느낌이었다.
"아아, 너무 행복하다. 전생까지 다 합치더라도 지금만큼 행복한 때가 없구나."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에게 절망을 선사해 준다면서 볼에 뽀뽀만 계속하질 않나.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이미지에 안 맞게 계속 웃고 있질 않나 도저히 천마의 생각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행복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아해를 찾아올 것을, 내가 미련했다."
"그래 너 멍청이다."
천마에게 입술도장이 찍힌 볼을 닦아 내며 말했다.
천마쯤 되는 미녀의 뽀뽀라면 나한테도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너와 싸우고 싶다는 의지정도는 표명해야 했으니까.
차라리 압도적으로 발리는 거면 몰라도 이렇게 능욕당하는 것 보다는 빨리 지는 게 더 나았으니까.
"흐음, 진심으로 붙고싶나?"
진지한 어투였지만 표정은 그러지 못했다. 나를 귀엽다는 듯 보며 웃는 상태에서 아무리 진지한 어투로 말해봤자 나를 놀린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좋아, 그러면 진심으로 상대해 주지."
천마의 몸에서 압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얼마나 강렬한 기세였는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이들의 마나를 다 합쳐도 천마 하나에 비하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해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 즉시 죽을 거라는 걸 아는 듯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천마가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엔 살기가 가득 차있었는데 나를 죽이지 않을 걸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공포감에 뇌까지 잠식되어 버렸다.
"겁먹은 얼굴도 귀엽구나."
천마가 나의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순간적으로 내 볼이 터져나가는 듯한 환각을 느꼈지만 다행이 내 볼은 멀쩡하게 붙어있었다.
"진짜로 이렇게 상대해 주길 원하나?"
잠시 기세가 약해진 틈을 타서 격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귀엽다고 받아들였는지 천마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새겨졌다.
가까이에서 본 천마의 미소는 정말 예뻤다.
대격변 이전에 그려졌던 그 어떤 명작도 그녀의 얼굴보다 아름답지는 않았으리라.
방금 전까지 그녀의 기세의 겁먹었던 나조차 멍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좋아 그러면 싸움을 계속 이어가보도록 하지. 이번엔 먼저 덤벼 보거라."
천마가 멀찍히 떨어졌다.
어차피 내 공격은 천마에게 아무런 영향을 못 미치겠지만, 빨리 그녀를 만족 시켜야 이 능욕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공격정도는 쉽게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인지 천마는 내가 코 앞까지 다가와서야 몸을 움직였다.
얼굴을 향하던 나의 주먹을 가볍게 잡아 흘려냈는데 고의가 다분한 손길로 내 주먹을 자신의 가슴 쪽에 옮겼다.
푹신한 감촉이 내 주먹을 감싸왔다.
나름 전력으로 친 것임에도 천마는 전혀 아프지 않다는 듯 평온한 얼굴을 유지했다.
아니, 오히려 즐겁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하고 올리는 게 더 소름 돋았다.
분명 어렸을 땐 의젓하고 멋진 년이었는데, 왜 지금은 가슴 얻어 맞고 웃는 변태가 되어 버린걸까?
"우리 아해, 어른이 되더니 아주 변태가 다됐구나."
얼척이 없었다. 변태 짓 하고 있는 게 누군데.
"변태는 너잖아."
"아이를 교육하는 것 또한 어른의 의무겠지."
내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모습에 일단 그녀의 흉부에 닿은 손을 뒤로 뺐다.
내 손이 떨어지려 하자 천마는 바로 내 손목을 콱 잡아쥐더니 다시 땅에 내리꽂았다.
허리를 비틀어 그녀의 얼굴을 차려 했지만 역시 가볍게 막혀버렸다.
"자, 어떻게 교육해 줄까?"
'선수 체인지다!'
내 의식 속에 숨어있던 다른 인격을 앞으로 던져 버리고 나는 뒤로 숨었다.
아무리 천마라도 내가 아닌데 이런식으로 행동하지는 않겠지.
***
아니 이 개새끼가?
의식의 저편에서 팝콘을 뜯으며 잘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의식 밖으로 끌려 나왔다.
내가 몸을 차지하자 마자 보이는 건 변태 같은 웃음을 짓고 나를 내려다 보는 미친년이었다.
미치긴 했어도 실력은 사실인지 내가 의식을 뺏자마자 표정이 천천히 굳는 것이 보였다.
"검마가 말하길 아해의 정신이 두조각이 난 것 같다던데, 그게 맞는 모양이군."
"두 조각이라니, 나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인격이거든?"
흥이 식은 건지 다른 이유가 있던 건지 천마가 나를 제압하고 있던 손을 놓았다.
"흐음, 새로운 인격이라."
"그래, 새로운 인격이다."
"다른데서 흘러들어온 인격은 아니겠지?"
어지간하면 대답해주지 않으려 했지만 반항했다가는 팔 한쪽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이수현이 기억을 잃었을 때 만들어진 인격이야. 어떤 기억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만들어진 인격이니까. 어쩌면 이수현의 본질적인 성격이라고 해도 무방할지 모르지."
"멍청한 놈, 사람의 인격은 다른 이와 상호작용으로 인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대부분의 기억을 다 읽어봤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를 가만 볼 수가 없군, 아무리 아해와 협력하는 인격처럼 보여도, 이렇게 멋대로 몸을 뺏는 인격을 가만히 놔둘수는 없으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나오기 싫었는데 네가 말하는 아해가 나를 던져 두고 튄거거든? 화를 내고 싶으면 이수현한테 따지지 그래?"
"흐음, 그 말은 아해가 나를 두고 감히 도망을 갔다고 해석해도 무방하겠지?"
천마의 눈빛이 무시무시해 졌다.
지금까지 웃고 있던 천마는 사라지고 진지한 표정의 천마만 남으니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이수현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나는 이 몸에 기생하는 인격일 뿐이니까 본 주인이 알아서 해결할거야.
"그렇겠지?나한테 모든걸 떠넘기고 자기는 의식 깊은 곳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래, 그러면 일단 아해를 불러야 겠군."
천마가 목을 이리저리 꺾으면서 몸을 풀었다.
천마급 되는 강자의 관절이 안 좋을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뚜둑, 뚜둑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육체가 너덜너덜 해질때까지 맞다 보면 아무리 아해라도 튀어나올 수 밖에 없겠지. 다행이 지금 아해의 몸을 지배하는 육체가 자네인게 다행이야. 아무리 나라도 벌써부터 아해에게 고통을 주기는 싫으니."
아니, 왜 잘 못은 집주인이 했는데 세 들어 사는 내가 맞아야 하냐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