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4화 〉 천마신교­9 (94/265)

〈 94화 〉 천마신교­9

* * *

저항심이 가득한 마음과는 다르게 나는 너무나 쉽게 소녀에게 끌려갔다.

아무리 힘을 주고 버텨봐도 소녀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검마가 어딨으려나?

"걔를 왜 찾아 다니는데? 그리고 네가 뭔데 내 일에 참견해?"

­내가 누구냐고? 사제의 사저지. 같이 천마님께 배우는 입장이기도 하고 나도 사제한테 가르쳐 주는 것도 있고 말이야.

"그건 이수현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잖아."

­나는 지금 말하고 있는 너도 사제라고 생각하는 걸,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조금 어리고, 세상때문에 반항심이 많을 지언정 사제는 사제야.

지랄 하네.

내가 탄생한지 1년도 안된 인격이라고 애 취급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해주면 내가 눈물이라도 질질 흘리면서 감화될 줄 알았어?

'어림도 없는 소리지.'

애초에 나와 이수현은 다른 존재다.

비슷하게 시작했어도 결국 다른 인격인데 그와 나를 동일하게 취급하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이수현이 아니야."

­그래 사제는 이수현이 아니지. 하지만 이수현과 다른 인격을 가진 너도. 내 사제야.

소녀가 상당히 올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담담하고 강렬한게 거짓말 좀 할 줄 아는 모양이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지.'

내가 처음 탄생했을 때, 이수현의 인격은 사라지고 오로지 나만이 이 몸에 존재했을 때,

그 때는 하연이가 나를 보고 오라버니라고 불러줬다.

기억을 잃었어도 오라버니는 오라버니라고 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도 사용해 줬지.

근데 그 때는 이수현의 인격이 없어진 상태였잖아.

이수현의 대체재로서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른 거지. 나를 진짜 오라버니 처럼 생각해 준 게 아니다.

이수아도 그랬는데 네가 나를 진짜 사제라고 생각한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소녀는 이수현을 알게 된지 얼마 안됐으니까.

이수현과 사제의 관계를 맺은 것도 거의 하루만에 일어났던일이지?

그리고 나 또한 이수현을 통해 간접적으로 천마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와중이니 나를 사제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으이구! 진짜로 사제라고 생각한다니까? 그리고 검마도 너를 이수현이라고 인정받게 만들어 줄게.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이수현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나와 본체는 경험해온 길이 달라. 이수현은 이수현이고 나는 나야. 나는 그냥 나로서 인정 받고 싶을 뿐이야. 이수현의 대체재 같은 게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서 존중 받고 싶은 거라고."

­그래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

쓸데 없이 해맑네.

소녀의 손에 이끌려 천마신교 내부를 돌아다니기를 10분 우리는 드디어 검마를 찾을 수 있었다.

­검마!!

­응? 리우잉 아니냐? 왜 부르...

검마의 말이 나를 보면서 뚝 끊겼다.

­그 놈이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이라도 했어?

­응! 네가 얘 괴롭혔다고 울면서 나한테 말하더라.

"내가 언제 그랬어?"

­어떻게 괴롭혔냐니까 검마한테 물으라고 해서 찾아온 것 뿐이야.

­괴롭혔다라...

검마가 생각에 잠긴 듯 말꼬리를 늘였다.

­그래, 내가 오해를 하긴 했지. 그 때문에 저 놈에 대한 첫 인상을 나쁘게 가져가기도 했고 그 때문에 말이 날카롭게 나간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은 없어. 나는 저런 놈이 수현의 몸을 조종하는 것 보다는 수현이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 훨씬 좋거든.

­이번 일은 검마가 먼저 잘못한 거야. 검마는 사제에게 물어 본 적 없겠지만 사제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된 어린 인격이야. 그 마저도 사제의 정신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었나봐. 이번이 세 번째로 나온 거라고 했나?

"두번 째 나왔을 때는 그냥 검마한테 맞기만 하다 끝나긴 했지."

그건 본체놈 잘 못이라 천마한테 그렇게 화가 나지는 않는다.

검마의 눈이 크게 띄였다.

뭐지? 이제와서 동정심이라도 느낀 건가?

­인격형성에 남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검마도 나를 통해서 보지 않았어? 세상에 처음 발을 들인 어린 아이한테 이유없는 악의가 가해지는 거랑 마찬가지란 말이야. 애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천마신교를 탈출해서 도시에서 난장판을 부리려고 했겠어. 그것도 그래야 자기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봉인 될거라는 이유로 말이야.

검마가 말을 잇지 못하고 멈췄다.

­물론 검마 너한테 사제에게 호감을 가져달라고 할 순 없어. 검마 너도 친하게 지냈던 수현이 사라지고 사제가 그 자리에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그런 감정을 들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지금 수현이 억지로 사제를 내보내서 이렇게 육체을 차지 하고 있을 때도 다시 들어가겠다고 난리를 치는 데 너한테 이유 없이 악의만 받게 되면 다시 나올 생각이 사라지지 않겠어?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군.

검마가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가 잘못했다. 너도 하나의 인격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너무 멍청했다. 네 입장에선 모처럼 세상 빛을 쐬자마자 그냥 꺼지라는 소리로 들렸을 텐데 말이지.

검마가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하다. 용서해 달란 말은 하지 않겠다. 내가 너한테 지은 죄는 상당히 큰 죄니까, 용서하지 않고 평생나를 미워해도 괜찮다.

이걸 꼽주는 거라고 받아들이면 내 심성이 뒤틀린 건가?

"됐어, 굳이 너 같은 걸 미워하는데 뇌의 리소스를 잡아먹긴 싫거든?"

­좋아! 화해 했지?

화해는 무슨, 일방적으로 사과만 당하고 끝났는데.

­자! 사제도 사과해! 분명 마음에 찔리는 게 있을 텐데?

찔리기는 뭐가 찔려...

"쯧... 욕해서 미안하다. 아무리 감정이 올라와도 생각이라는 걸 하고 말하고 나도 내 상황을 설명했어야 관계가 개선되는 건데 너무 말을 막 내뱉었다."

­나는 괜찮다. 솔직히 네가 욕을 했던 것조차 잊고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 굳이 사과할 필요 없다.

이미 했는데 어떡하냐.

그래? 이젠 안 미안해, 할 수도 없고.

­좋아! 화해 성공! 검마랑 화해하니까 어때 사제? 마음이 한결 편해졌지?

정신 한구석에 박히고 싶다는 충동은 많이 사라지긴 했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괜찮아지진 않았다.

내가 왜 나와있나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그냥 이수현이 몸을 지배하고 있으면 되는 일을 가지고 왜 이리 복잡하게 일을 벌리는 지도 모르겠다.

'마나가 회복 되는 즉시 바로 마나를 다루는 게 마나 친화력에 조금 더 도움이 되긴 해도 큰 차이는 아니라면서? 도대체 왜 내가 몸을 조종하게 하는 건데?'

'처음 기억을 잃었을 때를 제외하면 네가 몸을 조종한 적이 거의 없잖아. 너도 하나의 인격인데 정신 속에서만 살지 말고 밖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이랑 관계를 맺길 원했지, 검마가 저렇게 날카롭게 대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 해서, 괜히 네 기분만 상하게 한 것 같지만.'

본체 새끼, 계속 조용히 있다가 기분 좀 풀렸다고 바로 말을 걸어오네.

'내가 말을 안 건게 아니라 네가 내 말을 차단하고 있던 거거든? 그래도 내 말을 들을 정도면 기분이 많이 나아지긴 했나봐?'

'좀 괜찮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이게 맞는가 싶다. 지금까지 처럼 네가 계속 몸을 조종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텐데 왜 굳이 나보고 몸을 조종하라고 하는 거야?'

'말했잖아. 너도 하나의 인격이라서 그렇다고, 이왕 태어났는데 정신 속에만 박혀 있고 아무도 너의 존재를 모르면 너무 쓸쓸 하잖아. 그리고 원래 너한테 주기적으로 몸을 지배하는 시간을 주려고 했어. 지금까지는 네가 싫다는 기운을 폴폴 풍겨대서 권유하지 않았던 건데, 이번에 명분이 생긴김에 바로 실행한 거고.'

성자 납셨네요.

'이 몸은 네 몸이잖아. 왜 굳이 나한테 시간을 주려고 하는 건데?'

'내 몸이라니? 우리 몸이지. 한 육체에 인격이 두 개면 당연히 육체는 공유한다고 생각해야지 왜 내게 되는 건데?'

'당연히 네 거지! 나는 중간에 생성돼서 너한테 기생하고 있는 인격이잖아. 애초에 네 인격이 돌아왔을 때 사라져 버리는 게 맞는 인격이었다고.'

괜히 남아달라는 부탁을 들어줘서 일만 복잡하게 됐어.

지금이라도 사라져 버릴까?

'말은 안 했는데 나는 너한테 고마워 하는게 많아. 너 덕분에 미친 각성자의 세뇌에서 풀려나게 된 것도 고맙고, 내가 우리애들을 대하는 방식이 많이 잘 못 됐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것도 고마워.'

이수현과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게 분명했다.

나라면 절대 저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네가 나한테 기생하고 있다고 생각 안 해. 언제든 조언을 구할 수 있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조력자이자 동반자지. 대등한 관계라는 의미야.'

'말이 길어진다. 정리해서 말해.'

'네가 계속 내 정신속에만 있는 게 좀 아쉽더라고, 당분간은 네가 몸을 조종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봐. 시간이 지나도 그냥 정신 속에 박혀 있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 하면 되고 누군가와 깊게 관계를 맺어서 밖에 나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때는 서로 합의해서 시간을 정하자고.'

퍽이나 나오고 싶겠다.

그래도 조금 만 더 버티면 그냥 정신에 박혀 있어도 된다는 거지?

'그 정도는 충분히 버텨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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