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이현수2
* * *
"설명하려면 꽤 복잡한데 진짜로 듣고 싶어?"
응!
리우잉이 고개를 새차게 끄덕였다.
"별로 유쾌한 얘기는 아닌데..."
그래도 나는 동생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걸!
말하기 싫다고 돌려말하는 중인데 저렇게 당당하게 설명을 요구하는 걸 보면, 리우잉이 머리가 좋아서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어서 내 속 마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로 말해줘?"
당연히 진짜로 말해줘야지. 설마 동생 나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한거야?
표정 참 다양하단 말이지.
미간을 찌푸리고 나를 지긋이 노려보고 있는 리우잉의 모습에 한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그래 말해줄게."
좋아! 서서 이야기를 듣는 건 서로 피곤할 테니까 의자 찾아서 앉자!
천마산은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도시인지 리우잉을 따라 조금 걸으니 고용벤치가 눈에 보였다.
자! 이제 말해봐.
"어디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그냥 내 기억이 시작된 시점 부터 말하면 되겠지?
"내가 태어난 건 이수현이 기억을 잃었을 때였어."
어쩌다가 기억을 잃었대? 머리라도 다쳤어?
"머리를 다친 건 아니고 다른 각성자의 능력 때문에 그런거야."
처음 태어났을 때는 엄청 당황스러웠겠네.
당연히 당황스러웠지.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지. 눈앞엔 자기가 내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미친년이 앉아 있지.
머릿 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수현이라는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 그야 말로 캄캄한 기분이었다.
"처음에 기억 났던 건 이수현이라는 이름 하나 뿐이었어."
이름은 어떻게 기억했데?
"천마님이 말씀하셨을 지는 모르겠는데, 이 이름은 97호라는 친구가 지어준 이름이거든, 지어줄 때 세뇌를 건 건지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걔 때문에 기억에 남아있던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
헤에, 친구도 있었어?
"내 친구가 아니라 이수현 친구지."
지금은 거의 절교 상태긴 하지만.
"아무튼 내 입장에선 너무 답답한거야. 기억나는 건 이름 석자 밖에 없지 눈앞엔 내가 자기 노예라고 주장하는 미친 년이 앉아있지. 솔직히 내가 눈치가 느렸더라면 그 거짓말을 꼼짝 없이 믿었을 거야."
...뭐? 동생이 자기 노예라고 거짓말을 했다고?
리우잉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별 일 안 당했어. 오히려..."
말을 하다보니 기억에 혼선이 오기 시작했다.
'그 년이 나의 주인이라고 거짓말을 쳤던거... 내가 겪은 일이던가?'
기억 속에는 명확히 존재 하던 일이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적은 없다.
내가 경험한 루시아라는 각성자는 그냥 '왜 나를 납치 했어?' 한 마디에 정신이 나가서 기절한 이상한 년이라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년이랑 대화할 때 기억도 여러번 날아갔었지.'
날아간 기억도 일단 기억 창고에 저장이 되있고, 기억을 잃었을 때의 인격이 나와 상당히 비슷해서 착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내가 몇 마디 해주니까 비명을 지르면서 기절하더라고."
...응? 걔가 너를 납치했다면서.
"그 이전에도 몇 번 기억이 날아갔어. 그 때의 인격이 그녀를 괴롭혔나봐. 그래서 사태의 심각성 치고는 정말 안전하게 탈출 할 수 있었지."
다행이네. 그 다음엔 어떻게 됐어?
"탈출 하긴 했지만 기억이 돌아온 상황은 아니었거든? 그래서 일단 막 움직였는데 이수현을 찾고 있던 하연이의 레이더 망에 걸려서 일단 구조됐지."
얼마 안 지난 일인데도 벌써 추억처럼 까마득했다.
"지금이야 하연이가 이수현을 정말 잘 따르는 편이지만 그 때까지만해도 하연이가 이수현을 콱 쥐고 살았거든, 하연이 못지 않은 여자도 이수현한테 붙어있었고, 그래서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걔네들을 갱생시켰지."
오, 대단해!
"그 과정에서 기억이 조금씩 돌아왔어. 어린 시절일도 주마등 처럼 지나갔고, 몇 번 대화하다가 능력을 맞으니까 이수현의 인격이 완전히 돌아오더라. 나는 아직도 왜 내가 남아있는지 이해가 안돼, 그냥 나는 사라지고 이수현의 인격만 남거나 내가 이수현에게 흡수되는 게 훨씬 깔끔한 일이었을 텐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안 사라지는 게 좋은거지!
사라졌으면 지금 이렇게 있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아무튼 그 이후엔 이수현의 정신 속에서 기억이나 읽으면서 지냈어. 천마에 대한 기억도 그 때 알게 됐고, 간간히 이수현만 보조하면서 살아왔지."
그 다음에 나왔을 때가 언제라고 했었더라.
"이수현이 천마의 괴롭힘을 버티지 못하고 나를 대타로 내새웠어. 당연히 천마는 나와 이수현이 바뀐 걸 알고 이수현을 보복한다면서 나를 겁나 때렸지..."
그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마나를 다룰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이수현이 나한테 세상을 살아갈 기회를 주겠다고 쫓아내서 이렇게 나와있는 거야."
나도 사제의 생각을 적극 지지해! 동생도 밖에 나와서 신나게 놀아야지!
놀길 뭘 놀아 세상이 이따구인데.
'아닌가 이제는 놀려면 놀 수 있나?'
그 대단하신 천마님이 이수현의 여친이니까. 아무리 망할 세상이라도 안전하게 잘 살 수 있겠지.
"누나는 어떻게 살아왔어? 나도 내 얘기 해줬으니까. 나도 누나 얘기 들어도 되지?"
내 얘기는 왜?
"나도 궁금해서 그런데, 뺄 생각은 하지 마 자기입으로 처음 보는 사람이랑 친해지려면 상대에 대해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면서.
크윽, 내 말에 내가 넘어갔군.
리우잉이 굉장히 과장된 표정과 동작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말해 줄거야 말거야?"
해줄게, 우리 동생이 누나 얘기가 그렇게 궁금하다는 데 당연히 해주고 말고!
"좋아 빨리 시작해봐."
팔꿈치를 무릎에 댄뒤 턱을 괴고 리우잉을 바라봤다.
어렸을 때 나는... 거지였어!
굉장히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하네.
몬스터들의 눈을 피해 만들어진 작은 마을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 포지션을 맡고 있었는데, 이 시절이야기는 딱히 할 얘기도 없고 재미도 없으니까 그냥 넘어갈게.
"그래."
억지로 힘든 시절의 일을 얘기하게 할 생각은 없다.
내 인생이 달라진 시점은 천마님을 만나고 나서 부터야. 그 때 내가 아마 7살 정도였으니까, 천마님은 14살 정도 되셨던걸로 기억하는데 이미 성 여러 개를 지배하고 있는 이름 높은 성주님이셨어.
"누나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로 받아들이기라도 했어?"
정답이야! 우리 동생 눈치가 빠른걸?"
리우잉이 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었다.
내가 천마님의 제자로 들어갔을 땐 이미 검마와 권마는 천마님의 제자가 된지 몇년이 흐른 시점이었어. 그 둘은 그 시점에도 이미 각성을 했었고, 나이도 천마님이랑 비슷했지.
"다른 제자들이랑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데도 널 받아드릴 만큼 네 재능이 뛰어났나봐?"
리우잉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뛰어나진 않았어. 권마랑 검마랑 비슷한 정도? 천마님이 말씀하시길, 우리 정도 되는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중원에 많이 없었데. 그래서 나이차이가 좀 나도 나를 데려가셨던 거겠지.
"그 때부터는 행복 인생 시작이었겠네?"
거의 그랬지. 수련은 힘들었고 다른 사람이랑 싸워야 할 때도 많았지만, 나는 천마님의 제자였으니까. 사람 몇 명 죽이는 건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어, 대부분 악인들을 상대하기도 했고, 어렸을 때 재밌었던 일 진짜 많았는데, 지금은 내 인생사 전부를 얘기하는 중이니까, 나중에 풀어줄게.
"나중이 있을까?"
내가 있게 만들거야. 난 내기에서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거든.
리우잉이 방긋하고 웃어보였다.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자면, 천마신교의 세력이 커지고 중원의 모두가 인정하는 큰 세력이 됐을 때 부터는 내가 하는 일이 달라졌어. 검마랑 권마는 천마님을 따라서 계속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나는 제자들을 받아서 키우는 데에 집중하게 됐지. 나는 권마, 검마랑은 다르게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으니까.
리우잉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 부턴 내 흑역사라서 말해주지 않을거야.
"뭐야? 그런게 어딨어?"
너는 고작 1년밖에 안 살아서 모르겠지만, 흑역사라는 건 함부로 말 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동생아.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사저, 사형에 대한 열등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 때문에 아주 막 나가던 시기지. 그 때의 나는 너무 쓰레기 같아서 지금도 그 때만 떠오르면 화가 날 정도야.
진짜 인 것 같았다. 지금 리우잉의 눈빛엔 지금까지 봤던 어떤 분노보다 강력한 감정이 가득 차있었으니까.
"그렇구나..."
그 시기를 어떻게든 넘기고, 각성을 안 해도 괜찮다. 충분히 내 역할을 다 할 수 있다고 깨닫은 이후부턴 성격이 엄청 유해졌지. 그 동안 잘못 한 사람들한테 사과도 하고 말이야.
"진짜 질풍노도의 시기였구나..."
어찌보면 사춘기가 세게 온 거지. 그 시기에 내 밑에서 배웠던 애들은 아직도 나를 무서워 해.
리우잉의 씁쓸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