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8화 〉 이현수­3 (98/265)

〈 98화 〉 이현수­3

* * *

미묘한 정적이 우리 사이를 감돌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든 건지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 너무 어두운 이야기였나?

"괜한 걸 물어봤나."

­지금은 괜찮아. 옛날 소문들도 많이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이랑도 잘 지내는 걸.

"그러면 다행이지만..."

리우잉이 무릎 탁! 치면서 일어났다.

­왜 이렇게 저기력이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사람이 좀 저기력일 수도 있지 왜."

­억지로라도 기운을 끌어올려!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 해! 가끔은 슬플 줄도 알아야 하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야.

리우잉이 나를 억지로 일으켰다.

­자! 그러면 놀러가자!

리우잉이 나를 잡아 끌었다.

***

'개 피곤해...'

리우잉에게 이끌려 천마신교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관광지 처럼 보이는 절경부터 시작해서 천마신교의 신입들이 수업을 받는 모습, 심지어는 권마나 검마급의 고위 간부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까지 구경했다.

'그 때는 식겁했지.'

목이 날아가는 거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 리우잉이 옆에 있기도 했고 간부들이 천마의 손님인걸 바로 알아봐서 다행이 내 목은 잘 붙어있었다.

'슬슬 들어가면 안되냐? 천마 올 때 됐잖아.'

'오늘 어땠어, 즐거워 보이던데?'

'즐겁긴 뭐가 즐거워, 하루종일 리우잉 누나한테 끌려 다니느라 고생만 했구만.'

이수현이 음흉하게 웃는 게 느껴졌다.

보나마나 내가 무의식적으로 리우잉을 누나라고 말한 걸 놀리고 있겠지.

명확한 문장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나와 이수현은 어느정도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은 이만 들어와.'

어딘가로 잠기는 느낌과 함께 정신 세계로 돌아왔다.

'몸을 누가 조종할지를 자기가 정할 수 있으면서 대등은 무슨 대등이야.'

너는 사장이고 나는 직원이라고! 내가 약자란 말이야!

정신 공간 속에서 커다란 소파를 꺼내 앉았다.

천마와 이수현이 꽁냥대는 걸 보는 것도 눈골 시려서 그냥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천마에게 마나를 다루는 법을 전수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오늘은 뭘 가르쳐 주려나?'

마나를 느끼게 해준답시고 손을 꼭 잡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어차피 마나를 다루는 건 난데 말이지.'

사실 집주인과 천마는 그냥 나를 놀리기 위해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어차피 내가 들을 가르침을 굳이 애정을 담아서 말하는 것도 내가 그걸 듣고 빡치라고 일부로 그러는 게 아닐까?

"아해는 배움이 빠르군,"

"내가 빠른 게 아냐, 현수가 빠른거지."

"결국 이름을 현수라 지어준 것이냐?"

"아니, 지가 지었어. 리우잉이라고 했나? 걔가 고영희, 이고양, 이러니까 화가 났는지 그냥 이현수로 하겠다고 하더라고."

"이고양이라,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우리가 그렇게 고양이 상인가?'

왜 자꾸 고양이랑 엮이는 지 모르겠다.

"이현수는 아해가 제공한 삶에 만족하는 듯 보였나?"

"자기 입으로는 싫다고 하는데, 나름 재밌게 지내는 거 같아. 일주일 쯤 지나서 영원히 안 나올지. 아니면 나랑 번갈아가면서 몸을 조종할지를 물어보면, 그 때가 돼서야, 걔의 진심을 알 수 있겠지.;

일주일? 좋아 네 입으로 말했다.

내가 이 대화를 듣고 있다는 걸 이수현이 모를 리 없다.

천마와의 대화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언급하면서 나에게도 시간을 통보한거지.

'일주일이면 뭐, 버틸 수 있지.'

그 때는 알았나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근데 왜... 정신이...'

갑자기 급격하게 졸려왔다.

지금까지 이랬던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 현상에 대한 두려움 보다 일어났을 때 교육 안 듣고 잠이나 쳐잤다고 화내는 천마가 더 두려웠다.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의식이 끊겼다.

***

"... 잠들었나?"

"어, 완전히 잠든 것 같아."

휴우 하마타면 들킬 뻔했네.

현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의식 아주 깊은 곳에서 생각하면서 천마에게 신호를 보내느라 정신이 분열되는 줄 알았다.

심지어 현수가 눈치재지 못하게 계획을 새우느라 뇌가 빠개질 듯 아팠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이현수를 재우라고 한거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지."

"대충 감이 잡힌다."

역시 천마는 눈치가 빨라서 좋단 말이야.

"현수가 리우잉이랑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같은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굳이 리우잉과 이현수를 붙이려 하는 이유는 뭐지?"

"리우잉이 먼저 다가와 주기도 했고, 일주일 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새 사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

"아해가 원하는 것이 뭐지? 단순히 둘 사이를 친해지게 만든다고 말해도, 방법이 너무 다양하다."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어."

현수한테 들킬 걱정 없이 마음대로 생각하니까 입꼬리가 마구 올라갔다.

"현수가 이 세상에 정을 못 붙이는 건 나의 존재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

"아해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없애달라는 요구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다."

절대 그런말 안 할 거 알면서 뭔 장난질이야.

"그런 요구 할 생각 없었거든? 나도 오래오래 살고 싶은 평번한 인간이란 말이야."

"그러면 무슨 요구를 하려는 생각이지? 리우잉에게 이현수를 챙겨달라 말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을거다. 이미 리우잉은 이현수를 잘 챙겨 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없애달라는 건 안 돼도 몇 일간 현수에게 나를 숨기는 건 가능해?"

아무리 천마라도 조금은 고민이 되는 문제였는지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불가능 할 건 없지. 다만 굉장히 정교한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사라졌다고 느껴지면 현수도 마음가짐이 바뀌지 않을까?"

"참으로 발칙한 생각이군."

너도 웃고 있잖아.

벌써부터 재미가 느껴지나 보지?

"좋은 생각인 듯 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두 사람이 가까워 지는 데에는 위기만큼 좋은 것이 없지."

"역시 천마야. 내 생각을 바로 아네."

"본좌는 제자들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이다. 아해의 계획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군, 딱 하나만 빼면 말이야."

"일주일 동안 나를 못 본 다는 거?"

현수와 약속한 시간 동안 내가 없는 척을 해야 했으니 당연히 천마와 만날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괜찮다. 리우잉과 이현수에게 줄 시련을 준비 하는 동안 아해의 곁에 딱 붙어있다가 리우잉과 이현수가 시련을 치룰 때에 못한 일을 몰아서 하면 되니까."

"그러면 부탁 좀 해도 될까?"

"부탁이라니, 본좌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그런 딱딱한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안 그래도 요즘 너무 평화로웠는데 간만에 일이 생겨서 기분이 좋군."

일은 굉장히 빨리 진행됐다.

현수가 기절한지 5분만에 리우잉이 천마에 의해 의식을 잃은 채 잡혀왔고 리우잉을 제외한 천마신교의 대부분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했다.

'이건 스케일이 너무 큰 거 아니야?'

"가장 중요한 건 개연성이다. 이현수 그놈은 수현을 닮아 머리가 좋은 놈이니 단순히 시련만 주어서는 금세 속임수라는 걸 눈치 챌 것이다. 아해가 모습을 감춘 건 스스로 판단할 길이 없어서 해매겠지만, 내가 있는데 왜 자기가 이런 시련을 받게 됐는지 의심을 가지게 되겠지. 그러니 가장 먼저, 내가 존재함에도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친 개연성을 만들어라."

'너무 스케일이 커지는 거 같은데...'

"할 일 많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회의하면 더 늦어지는 거 아니야?"

"괜찮다. 늦어진 다고 해도 몇일 정도 더 늦어지는 건데 고작 며칠 일하기 싫어서 이런 재밌는 이벤트를 놓칠 수는 없지."

집단지성의 힘이 대단한걸까 천마신교의 힘이 대단한 걸까?

순식간에 대규모 몰카의 구도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너는 그렇다 치고 이 사람들은 왜이렇게 열심히 해? 이 사람들도 다른 같은 교인한테 장난 치는 거 좋아해?"

"본좌에 명령에 대충 행동할 사람이 이 천마신교에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검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바쁘게 일 하고 있는데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있잖아.

야무지게 빨아 먹고 있는게 정말 맛있어보였다.

"아, 검마 말인가? 괜찮다. 검마는 최종 보스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니 회의 과정은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다."

­네? 제가 말입니까?

"당연하지. 천마신교에서 본좌 다음 가는 강자가 검마 자네인데, 자네가 최종보스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지?"

­어... 천마님이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수현의 정신이 증발해 버려서 폭주했다. 로 가면 깔끔하지 않을까요?

"검마는 내가 아해의 정신이 날아갔다고 해서 그 육체를 함부로 내 팽겨쳐 둘거라 생각하는가?"

­아...

"아무튼 검마가 최종보스다. 변장을 할지 아니면 검마 그대의 모습으로 최종보스의 역할을 수행할지는 지금부터 정해나가야 겠지."

오늘의 교휸.

회의 중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최종 보스가 될 수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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