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이현수3
* * *
미묘한 정적이 우리 사이를 감돌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그 사이에 정이라도 든 건지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 너무 어두운 이야기였나?
"괜한 걸 물어봤나."
지금은 괜찮아. 옛날 소문들도 많이 사라졌고, 다른 사람들이랑도 잘 지내는 걸.
"그러면 다행이지만..."
리우잉이 무릎 탁! 치면서 일어났다.
왜 이렇게 저기력이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사람이 좀 저기력일 수도 있지 왜."
억지로라도 기운을 끌어올려!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 해! 가끔은 슬플 줄도 알아야 하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야.
리우잉이 나를 억지로 일으켰다.
자! 그러면 놀러가자!
리우잉이 나를 잡아 끌었다.
***
'개 피곤해...'
리우잉에게 이끌려 천마신교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관광지 처럼 보이는 절경부터 시작해서 천마신교의 신입들이 수업을 받는 모습, 심지어는 권마나 검마급의 고위 간부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까지 구경했다.
'그 때는 식겁했지.'
목이 날아가는 거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 리우잉이 옆에 있기도 했고 간부들이 천마의 손님인걸 바로 알아봐서 다행이 내 목은 잘 붙어있었다.
'슬슬 들어가면 안되냐? 천마 올 때 됐잖아.'
'오늘 어땠어, 즐거워 보이던데?'
'즐겁긴 뭐가 즐거워, 하루종일 리우잉 누나한테 끌려 다니느라 고생만 했구만.'
이수현이 음흉하게 웃는 게 느껴졌다.
보나마나 내가 무의식적으로 리우잉을 누나라고 말한 걸 놀리고 있겠지.
명확한 문장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나와 이수현은 어느정도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은 이만 들어와.'
어딘가로 잠기는 느낌과 함께 정신 세계로 돌아왔다.
'몸을 누가 조종할지를 자기가 정할 수 있으면서 대등은 무슨 대등이야.'
너는 사장이고 나는 직원이라고! 내가 약자란 말이야!
정신 공간 속에서 커다란 소파를 꺼내 앉았다.
천마와 이수현이 꽁냥대는 걸 보는 것도 눈골 시려서 그냥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천마에게 마나를 다루는 법을 전수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오늘은 뭘 가르쳐 주려나?'
마나를 느끼게 해준답시고 손을 꼭 잡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어차피 마나를 다루는 건 난데 말이지.'
사실 집주인과 천마는 그냥 나를 놀리기 위해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어차피 내가 들을 가르침을 굳이 애정을 담아서 말하는 것도 내가 그걸 듣고 빡치라고 일부로 그러는 게 아닐까?
"아해는 배움이 빠르군,"
"내가 빠른 게 아냐, 현수가 빠른거지."
"결국 이름을 현수라 지어준 것이냐?"
"아니, 지가 지었어. 리우잉이라고 했나? 걔가 고영희, 이고양, 이러니까 화가 났는지 그냥 이현수로 하겠다고 하더라고."
"이고양이라,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군."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우리가 그렇게 고양이 상인가?'
왜 자꾸 고양이랑 엮이는 지 모르겠다.
"이현수는 아해가 제공한 삶에 만족하는 듯 보였나?"
"자기 입으로는 싫다고 하는데, 나름 재밌게 지내는 거 같아. 일주일 쯤 지나서 영원히 안 나올지. 아니면 나랑 번갈아가면서 몸을 조종할지를 물어보면, 그 때가 돼서야, 걔의 진심을 알 수 있겠지.;
일주일? 좋아 네 입으로 말했다.
내가 이 대화를 듣고 있다는 걸 이수현이 모를 리 없다.
천마와의 대화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언급하면서 나에게도 시간을 통보한거지.
'일주일이면 뭐, 버틸 수 있지.'
그 때는 알았나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근데 왜... 정신이...'
갑자기 급격하게 졸려왔다.
지금까지 이랬던 적 한 번도 없었는데...
이상 현상에 대한 두려움 보다 일어났을 때 교육 안 듣고 잠이나 쳐잤다고 화내는 천마가 더 두려웠다.
'아니... 갑자기 왜.'
그렇게 의식이 끊겼다.
***
"... 잠들었나?"
"어, 완전히 잠든 것 같아."
휴우 하마타면 들킬 뻔했네.
현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의식 아주 깊은 곳에서 생각하면서 천마에게 신호를 보내느라 정신이 분열되는 줄 알았다.
심지어 현수가 눈치재지 못하게 계획을 새우느라 뇌가 빠개질 듯 아팠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이현수를 재우라고 한거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지."
"대충 감이 잡힌다."
역시 천마는 눈치가 빨라서 좋단 말이야.
"현수가 리우잉이랑 빠르게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같은게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굳이 리우잉과 이현수를 붙이려 하는 이유는 뭐지?"
"리우잉이 먼저 다가와 주기도 했고, 일주일 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새 사람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
"아해가 원하는 것이 뭐지? 단순히 둘 사이를 친해지게 만든다고 말해도, 방법이 너무 다양하다."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어."
현수한테 들킬 걱정 없이 마음대로 생각하니까 입꼬리가 마구 올라갔다.
"현수가 이 세상에 정을 못 붙이는 건 나의 존재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
"아해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없애달라는 요구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다."
절대 그런말 안 할 거 알면서 뭔 장난질이야.
"그런 요구 할 생각 없었거든? 나도 오래오래 살고 싶은 평번한 인간이란 말이야."
"그러면 무슨 요구를 하려는 생각이지? 리우잉에게 이현수를 챙겨달라 말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을거다. 이미 리우잉은 이현수를 잘 챙겨 주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없애달라는 건 안 돼도 몇 일간 현수에게 나를 숨기는 건 가능해?"
아무리 천마라도 조금은 고민이 되는 문제였는지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불가능 할 건 없지. 다만 굉장히 정교한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사라졌다고 느껴지면 현수도 마음가짐이 바뀌지 않을까?"
"참으로 발칙한 생각이군."
너도 웃고 있잖아.
벌써부터 재미가 느껴지나 보지?
"좋은 생각인 듯 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두 사람이 가까워 지는 데에는 위기만큼 좋은 것이 없지."
"역시 천마야. 내 생각을 바로 아네."
"본좌는 제자들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이다. 아해의 계획이 굉장히 마음에 드는 군, 딱 하나만 빼면 말이야."
"일주일 동안 나를 못 본 다는 거?"
현수와 약속한 시간 동안 내가 없는 척을 해야 했으니 당연히 천마와 만날 수 없었다.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괜찮다. 리우잉과 이현수에게 줄 시련을 준비 하는 동안 아해의 곁에 딱 붙어있다가 리우잉과 이현수가 시련을 치룰 때에 못한 일을 몰아서 하면 되니까."
"그러면 부탁 좀 해도 될까?"
"부탁이라니, 본좌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그런 딱딱한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안 그래도 요즘 너무 평화로웠는데 간만에 일이 생겨서 기분이 좋군."
일은 굉장히 빨리 진행됐다.
현수가 기절한지 5분만에 리우잉이 천마에 의해 의식을 잃은 채 잡혀왔고 리우잉을 제외한 천마신교의 대부분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했다.
'이건 스케일이 너무 큰 거 아니야?'
"가장 중요한 건 개연성이다. 이현수 그놈은 수현을 닮아 머리가 좋은 놈이니 단순히 시련만 주어서는 금세 속임수라는 걸 눈치 챌 것이다. 아해가 모습을 감춘 건 스스로 판단할 길이 없어서 해매겠지만, 내가 있는데 왜 자기가 이런 시련을 받게 됐는지 의심을 가지게 되겠지. 그러니 가장 먼저, 내가 존재함에도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친 개연성을 만들어라."
'너무 스케일이 커지는 거 같은데...'
"할 일 많다고 하지 않았어? 이렇게 다같이 모여서 회의하면 더 늦어지는 거 아니야?"
"괜찮다. 늦어진 다고 해도 몇일 정도 더 늦어지는 건데 고작 며칠 일하기 싫어서 이런 재밌는 이벤트를 놓칠 수는 없지."
집단지성의 힘이 대단한걸까 천마신교의 힘이 대단한 걸까?
순식간에 대규모 몰카의 구도가 잡혀가기 시작했다.
"너는 그렇다 치고 이 사람들은 왜이렇게 열심히 해? 이 사람들도 다른 같은 교인한테 장난 치는 거 좋아해?"
"본좌에 명령에 대충 행동할 사람이 이 천마신교에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검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바쁘게 일 하고 있는데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있잖아.
야무지게 빨아 먹고 있는게 정말 맛있어보였다.
"아, 검마 말인가? 괜찮다. 검마는 최종 보스의 역할을 수행할 예정이니 회의 과정은 참여하지 않아도 괜찮다."
네? 제가 말입니까?
"당연하지. 천마신교에서 본좌 다음 가는 강자가 검마 자네인데, 자네가 최종보스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지?"
어... 천마님이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수현의 정신이 증발해 버려서 폭주했다. 로 가면 깔끔하지 않을까요?
"검마는 내가 아해의 정신이 날아갔다고 해서 그 육체를 함부로 내 팽겨쳐 둘거라 생각하는가?"
아...
"아무튼 검마가 최종보스다. 변장을 할지 아니면 검마 그대의 모습으로 최종보스의 역할을 수행할지는 지금부터 정해나가야 겠지."
오늘의 교휸.
회의 중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최종 보스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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