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2화 〉 업보청산­4 (112/265)

〈 112화 〉 업보청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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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상처는 모두 치료했지만 아직도 얼굴과 배가 얼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거하게 놀았더구나."

"논거라고 보기엔 무리수가 있지 않을까..."

사실상 나는 장난감 처럼 다뤄지고 월하 혼자만 신나게 놀았지.

머리에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로 놀아서 천마 옆에 붙어서 떨어질 수가 없다.

"아해가 이렇게 귀여워 지다니, 나중에 나도 조언을 구해봐야 하겠군."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왜 그래요 기사님, 기사님도 즐기셨으면서."

즐기긴 뭘 즐겨 미친년아...

내 오른쪽에 앉은 월하를 피해서 천마에게 붙었다.

'얘네는 또 언제 친해졌어?'

월하에게 실컷 괴롭힘당하고 기절했다가 다음 날이 돼서야 깨어났는데 아마 그 동안 여자의 대화가 오간 모양이다.

"하연이랑 연하는 언제쯤 온데?"

"그걸 나한테 물어봤자 어떻게 알겠나.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걸 보면 늦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오지 않는 것이겠지. 동생들이 보고 싶은 아해의 마음은 이해한다만 가끔은 조용히 기다리는 법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리우잉누나 어딨는지 물어봐줘.'

"리우잉은 어딨녜."

"이쪽 사람들이랑 대련이 한참이다. 도장깨기 식으로 마구 덤비고 있는데, 월하네 사람들은 다들 착한지 다들 받아준다고 하더군."

"별말씀을요."

둘이서 쿵짝이 잘 맞는 구만?

"이제 수련도 다시 재개해야 하지 않겠나. 이현수도 마나컨트롤을 연습해야 하고 아해도 다음 스테이지를 클리어 해야지."

"가끔 내가 강해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어차피 강해져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마음 편히 말해 보거라, 본좌가 아해의 말을 들어주도록하지."

"어릴 때는 내가 강하다는 게 의미가 있었어. 하연이랑 같이 지낼 때도 내가 어느정도 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었고, 월하의 호위도 내 무력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 했겠지."

"요즘은 다르다고 느끼나?"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하연이랑 월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어. 이 세상에 D급 각성자랑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비각성자가 얼마나 있겠어? 비각성자긴 하지만 나름 강하다고 자위하면서 살아왔지. 그런데 하연이랑 월하를 다시 만나면서, 내 힘이라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 물론 아예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서 더 강해져봤자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물론 현수의 인격이 생기고 쥐꼬리만한 마나를 발견해 내면서 전투 스타일의 변화도 줘보고 하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직까직은 현실성이 없지."

그 때부터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전투 중에 사용할 법한 기술은 절대 아니니까.

"그래도 이전까지는 괜찮았어. 나름 열심히 수련도 하고,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했으니까."

그런데.

"리우잉을 보니까 의지가 팍 꺽이더라고."

리우잉은 나의 완전한 상위호환이다.

같은 비각성자지만 리우잉은 엄청난 강자고, 그녀에 비하면 나는 별 볼일 없는 일반인에 불과하지.

"아해도 오랜 기간 수련하면 리우잉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그 동안 리우잉은 더 먼길로 가겠지."

사실 이런 단순한 게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강해져봤자. 리우잉 정도가 한계라는 뜻이기도 말이야."

"아해가 능력을 각성하지 않느다면, 확실히 그 정도가 한계겠지."

"너희한테 물어볼게, 내가 지금 그대로 있는 거랑, 리우잉만큼 강해진 상태랑,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아?"

주변에 S급 각성자만 몇 명인데, 어차피 이 인간들 사이에선 내 무력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없다.

내가 전혀 수련을 하지 않은 일반인 만큼 약하더라도 천마는 나를 수월하게 지켜줄 것이고, 내가 리우잉만큼 강하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크게 차이가 없겠지.

"없지."

천마의 단호한 한 마디에 월하가 입을 열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래서 고민 중이야. 이제 더 이상 내 무력을 키우는 게 의미가 없어졌으니까. 지금의 무력을 유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운동하는 정도는 괜찮아도, 더 강해지기 위해서 노력하는 건 회의감이 들었거든."

"이해한다. 아해의 앞에 있는 건 정말정말 높은 벽이지만, 그 벽을 넘는 다고 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는 상황이니."

정적이 우리를 감쌌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진것 같은데, 그렇다고 내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거나, 엄청난 회의감에 괴로워 하고 있다는 건아니야. 그냥 더 이상 무력을 갈고 닦을 필요가 없다는 걸 느꼈을 뿐이지."

"아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더 이상 수련을 강요하진 않겠다."

"언제는 강요한 적 있는 것 처럼 말하네."

"그러면 기사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글쎄,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냥 평범하게 사는 거지, 내가 전투에 미친 인간도 아니고 말이야. 지금이랑 다를 바 없이 살면 돼."

그래도 역시 좀 씁쓸하긴 하네.

지금까지 열심히 쌓아왔던 모든 노력이 무산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괜히 분위기만 무겁게 한건가?"

"아니다. 아해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천마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천마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걸까?

"너도 무료감을 느낀다고 했었나?"

"안 느낀다고는 못하지."

"천마 너는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천마가 가볍게 웃었다.

"아해의 생각처럼 엄청나게 강하진 않다. S급 각성자가 마나를 잘 다루는 것 뿐이니니까. 마나가 아니라 내공이었다면 지금보다 제곱은 더 강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리 강하지 않아."

"말 돌리지 말고 알려줘."

천마의 얼굴에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니 천마가 내 볼에 입을 쪽하고 맞췄다.

얼척 없는 표정으로 천마를 바라보니 싱긋 하고 눈웃음을 지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해의 잘못이다. 그렇게 유혹하면 아무리 본좌라도 참을 수가 없다."

"됐고, 자꾸 말 돌리지 말라니까?"

"나도 모른다."

장난스러운 눈빛 사이에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강함이라는 건 수치화해서 알 수가 없는 개념이다."

"그래도 대략적으로는 알려줄 수 있지않아?"

"천마신교에서 나 다음으로 강한 검마가 3명이 돼서 나에게 동시에 덤벼들면 좋은 싸움이 될테지. 그리고 아해의 동생인 백하연이 세 명이 돼서 검마에게 덤비면 좋은 싸움이 될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연 9명과 내가 싸우면 좋은 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나?"

고개를 저었다.

"강함이라는 늘 상대적인 것이다. 물론 전 지구를 뒤져도 본좌보다 강한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본좌가 얼마나 강하다, 하고 명확히 말해 줄수는 없군, 그냥 지구 최강으로 퉁치고 넘어가는 건 어떤가?"

"생각보다는 약하네, 나는 전 중원을 상대로 싸워도 네가 이길 거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천마가 옅게 웃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내 제자들을 제외한 다른 중원들과 싸운다면 몰라도 지금은 뛰어난 제자들이 아주 많으니 말이야. 당장 검마와 권마, 그리고 천마신교 소속 S급 각성자 둘만 덤벼 들어도 쉬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니."

일반적인 S급 각성자를 한참 상위하는 사람 세 명과 유사 S급 각성자가 덤벼 들어야 겨우 상대가 될 정도라...

'확실히 겁나 세긴 해.'

아마 천마의 옆에 있으면 그 어떤 위기도 찾아오지 않겠지.

'왠지 좀 쓸쓸해 지네.'

"왜 나의 강함에 집착하지?"

"그냥 궁금했어. 너한테 위기라는 게 찾아올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 져서."

"위기라, 당연히 찾아올 수있지."

천마가 내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길게 갈것도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해가 나한테 진심어린 경멸과 함께 꺼지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내 마음은 박살이 날 것이다."

"설마..."

"농담이라고 생각하나?"

천마 특유의 장난과 진지함이 섞여 있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세계에서 이루고자 했던 단 하나의 목표를 너무나도 손 쉽게 이뤄버린 나에게 남은 건 아해 하나밖에 없다."

천마의 손가락이 내 볼을 꼬집어왔다.

"그런 아해한테 버림 받으면 아무리 나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이현수가 없어지면 폭주한다고 했던 리우잉과 똑같은 거다. 내가 아해에게 진심어린 미움을 받는 순간 아마 망가져 버리겠지."

"... 망가지면 어떻게 되는 데?"

"일단 아해한테 엄청 달라 붙겠지, 내가 잘 못했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천마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려 버린채 빌 거다. 만약 아해가 겉으로라도 용서해주는 척을 하면 참 다행이지만..."

침을 꼴깍하고 삼켰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군, 리웅잉의 말 처럼 사지를 잘라 버리고 어딘가에 가둘 수도 있고, 아해는 가만히 내버려 두고 자살을 할 수도 있지, 어쩌면 평생 아해만 생각하며 죽지 못한 채 피폐하게 살 지도 모른다."

무거운 이야기와는 다르게 천마의 눈에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이걸 협박이라고 받아들이진 마라, 나는 나대로 절대 아해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해 노력핼테니까. 본좌가 아해를 실망시키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다."

내 볼을 쓰다듬는 천마의 손길이 왠지 모르게 뜨거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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