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일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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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정적이 흐르던 시점에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천마의 나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월하가 빠르게 움직여서 문으로 갔다.
"네, 나가요."
아마 월하는 밖에 누가 서 있는지 알겠지? 하연이랑 연하가 돌아온 건가?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 예상은 반만 맞았다.
하연이랑 연하가 오긴 했는데 그 둘만 온건 아니었거든.
"안녕하십니까 천마님!"
"자네가 길드장이라는 여인인가?"
"네, 제가 태양길드의 길드장인 이서희입니다."
와, 나 저 사람이 저렇게 저 자세인거 처음 봐.
양손으로 손을 비비면서 허리를 굽히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했구나...
"그래, 이곳엔 무슨 일이지?"
"저희 길드 소속의 도시에 천마님이 직접 오셨다고 해서 인사차 들리게 됐습니다."
"그래, 인사 잘 받았으니 이제 돌아가도 상관 없다. 나를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우리 아해를 건들이지 않는 다면 나는 이 도시에 어떤 해를 끼칠 생각도 없고, 태양길드라는 곳과도 관련되기 싫거든."
우리 천마 선 잘 긋네. 어차피 너한테 주어질 떡고물은 없으니 꺼지라는 뜻이지?
나도 알아듣는 돌려차기인데, 길드장이 알아듣지 못할리는 없겠지.
축객령을 들은 것과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길드장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아니, 자세히 보면 약간의 기쁨마저 보이는 듯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마님이 오신걸 비밀로 해도 괜찮겠습니까? 괜히 소문이 퍼지면 천마님이 불편해 지실 수도 있으니까요."
"자네가 편한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천마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길드장이 허리를 한 번 숙인 뒤 바로 사라져 버렸다.
정말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군.
"생각 보다 깔끔하게 물러나는 군, 나는 이 도시에 머무르는 대신이라면서 몇 가지 부탁 정도는 해올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저희 길드장이 그렇게 생각 없는 분은 아니세요. 초면에 천마님을 건드렸다가 화라도 나시면 바로 도시가 날아가는 건데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겠죠. 아마 오늘은 천마님이 얌전히 계실 거라는 걸 확인 하고 돌아간 것만으로도 만족할 거에요."
천마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면 나중에는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해올거란 소리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천마님도 눈독들일만한 보상과 함께 제안을 걸어올테고, 천마님이 거절하신다면 오늘 처럼 바로 물러갈 테니까요."
"본좌를 만족시킬 수 있는 보상이 이 작은 도시에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다만?"
"저희 길드장을 너무 무시하지 마세요. 좀 음흉하긴 해도 능력은 뛰어난 사람이니까요."
"아무리 뛰어난 이라 해도 말이지... 본좌는 욕심이 없다."
오자마자 천마랑 이야기 하고 있는 연하랑은 다르게 하연이는 나와 월하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 볼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월하는 괜히 찔리는 지 하연이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는데, 월하가 하연이에게 저자세인건 굉장히 오랜만에 본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도대체 오라버니 한테 뭔 짓을 한 거야?!"
"왜요! 저는 저한테 주어진 시간을 잘 쓴 것 뿐이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오라버니를 이렇게 혹사시키면 안되지! 치료한 것 같은데도 후유증이 눈에 보일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괴롭힌거야?"
"저는 제 본능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심한 괴롭힘도 아니었다고요!"
내가 다친 게 보여?
분명말끔하게 치료된 줄 알았는데, 어딘가 후유증이 남아있긴 한가보다.
오래가거나, 영구적으로 남는 후유증이면 하연이의 반응이 훨씬 심했을테니,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는 계열이겠지.
'근데 그게 심한 괴롭힘이 아니라고?'
월하의 마음 속에 선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다음에 업보를 치룰땐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루도록 하자.
"큼큼 아무튼 이제 다 모였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좋겠지. 한 남자를 4명이서 사랑하는 꼴이니 말이다."
"전 오라버니를 성적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랑 묶지 말아주세요!"
"솔직하지 못하군."
"자기 입으로 그렇다는 데 빼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연이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취소하겠습니다!"
팝콘 없나. 왜 이렇게 재밌어.
달달한 팝콘에 시원한 콜라 한잔있으면 훨씬 더 재밌게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랑 리우잉누나도 포함 시켜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네? 너희들도 있었구나?'
도대체 내 시간은 몇 등분이 나는 거지?
"저기, 현수가 리우잉이랑 자기도 포함 시켜 달라는데?"
"그치들은 하루에 일정시간씩 시간을 빼놓는 게 좋겠군."
"현수가 누군에요? 리우잉은 또 누구고요?"
"내 다른 인격이랑 걔 여친."
'누가 여친이야! 남매거든!'
'너희 둘이 남매면 나랑 하연이도 남매지.'
리우잉이 현수에게 보이는 집착의 정도를 생각하면, 절대로 여친 선에서 끝낼 정도가 아니다. 한참때의 하연이 만큼 집착이 심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금의 하연이보다도 심한 수준이니까.
'사지를 찢어 버린다가 농담처럼 오가는 무서운 관계잖아?'
이렇게 보니까 완전 수라장이네... 어쩌다가 내 인생이 이렇게 됐지?
분명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총포상에서 일하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
"그런데 굳이 어떻게 지낼지를 정해야 해? 그냥 적당히 되는 대로 살면 되잖아."
"아해가 말한대로 한다면..."
천마가 내 무릎 위에 앉아왔다.
"본좌가 압도적인 힘으로 아해를 독차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제하는 게 좋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규칙은 세워둘 필요가 있겠지."
"무슨 규칙?"
"일단 첫번째, 아해가 싫다고 하는 건 하지 말 것. 물론 장난 섞인 앙탈은 무시할 것이다. 진심으로 싫다는 생각이 들면 진지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싫다고 말하도록. 이건 다들 동의할 거라고 생각한다."
천마의 말에 다른 세명의 여성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 너희들, 성장했구나, 처음 만났을 때는 나를 제어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스킨십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 역시 아해의 마음대로 처리하면 될 듯하다. 우리가 아해에게 스킨십을 걸어오는 게 부담스러우면 피하면 되고, 아해가 먼저 스킨십을 걸어올 땐, 어차피 아해의 마음이니 우리끼리 싸울 일이 없겠지."
그러면서 은근슬쩍 내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면, 천마도 속에 구렁이가 가득한 여자라니까...
"다만 서로간의 경쟁이 격해질 땐 아해가 우선순위를 정해 주면 될 듯 하다."
"왜 모든 이야기가 내가 정하는 걸로 끝맺음 당하는 거야?"
"그야, 우리는 모두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약자일 뿐이니까. 아해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가 아해를 사랑하는 감정이 더 크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긴해..."
다시 회의가 이어졌다.
"잠은 하루씩 돌아가면서 같이자는 게 좋을 것 같다. 일주일 중 4일은 우리 4명과, 나머지 3일 중 하루는 리우잉과 현수에게 시간을 주고 나머지 이틀은 아해의 자유에 맡기면 되겠지. 이 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건 우리의 몫이 될테고."
"혼자 자고 싶으면 그냥 혼자 자도 되는 거지?"
"물론이지. 이틀의 시간은 완벽하게 아해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반대로..."
천마가 스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각자가 아해를 차지하는 하루만큼은, 상대에 맞춰줄 필요가 있겠지."
"알았어. 알아서 잘 할테니까 부담주지 마."
"애들은 어떡할까요?"
"애들이라니?"
천마가 의문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원래 같이 살던 아이들이 있거든요."
"앞으로 집은 치열한 전쟁터가 될듯 한데 말이지... 뭐, 같이 살아도 괜찮지 않겠느냐? 본좌는 아이를 싫어하지 않는다. 자네들이랑은 원래부터 같이 살았을 테니 거부감도 없을 테고 말이야."
"그러면, 같이 지내는 걸로 할게요."
"그럼, 대략적인 이야기는 다 끝낸 것 같으니 세부적인 이야기로 들어보도록 하자꾸나."
여자들의 회의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밥은 누가하느니, 여가 시간은 어떻게 지내느니, 누가 밖에 외출할 때 손해보는 시간은 어떻게 보상하느니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뤄졌는데, 내가 대화에 낄려고 해도 그냥 편하게 앉아만 있으라고 계속 쫒겨났다.
"내가 해야 할 건 없어?"
"왜 아해가 일을 하려고 하나?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 게 해줄테니, 고생할 생각은 하지 마라."
이런 느낌으로 계속 대화에서 튕겨져서 그냥 조용히 소파에 앉아있었다.
지들끼리 알아서 하겠다는 데 뭐, 가만히 있자.
'어차피 이렇게 회의해서 결정나는 것들이 진짜로 이루어 질거라곤 생각하지 않거든.'
뭐? 저녁은 돌아가면서 만들어? 내가 보기에 쟤네 중 누구 한명이 움직이기 전에 사현이가 빠릿하게 움직여서 저녁상을 차린 다에 100만원 건다.
'아닌가? 사현이 일 시키기 싫은 여자애들이 차리려나?'
아무튼 쟤네들이 차릴리는 절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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