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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 일상­2 (114/265)

〈 114화 〉 일상­2

* * *

"오라버니, 식사하세요."

뭐지... 그 새 잠들었나?

기지개를 피고 일어나니 하연이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점심이야, 저녁이야?"

"점심이죠 오라버니."

뭐야, 오늘 따라 말투가 왜 이렇게 사근사근해, 너 혹시 나한테 뭐 잘 못한 거라도 있니?

하연이의 달라진 어투에 적응하지 못하고 누워있을 때 하연이가 방긋 웃음 지으며 나에게로 손을 뻗어왔다.

"그렇게 움직이시기 싫으신거에요?"

"야! 잠깐만."

내가 거부할 틈도 없이, 공주님안기로 들어져서 식탁까지 이동했다.

'안하던 짓을 하는 걸 보니, 아까 애들이 얘기한 것과 관련된 일인 것 같은데...'

설마 나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건 아니겠지? 오히려 부담되고 불편하기만 한데.

"하연아."

"왜요. 오라버니?"

"이거 부담스럽기만 하고 하나도 안 좋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짓 하지마."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리우잉을 제외한 모든 여성들이 빵하고 터졌다.

"언니, 제가 말했잖아요. 오라버니 그런 거 안 좋아하신 다고."

"풉..."

월하 너 너무 대놓고 웃는 거 아니야?

"일단 내려줘."

"알았어요 오라버니."

축 처진 하연이의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그냥 평소처럼 있어. 갑자기 이미지 바꿔봤자 부담스럽기만 하고 하나도 호감 안 가거든? 오빠는 평소의 하연이가 좋으니까. 굳이 바뀔 필요 없어요."

붉어지는 하연이의 볼을 툭툭 건드리고 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굉장히 익숙한 음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점심은 누가 한거야?"

잠시동안의 정적이 우리를 감쌌다.

'아무도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애들이 했나보네.'

내가 말했지? 얘들이 절대 할리가 없다고.

"그게요 오라버니, 제가 하려고 했는데 애들이 너무 빨리 만들어 버려서..."

"됐어. 애초에 너희들이 할거라고는 기대도 안했으니까."

아, 이건 말이 너무 심했나? 바로 사과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월하가 이어말했다.

"그렇죠? 저희가 요리를 할 수 있을리가 없죠?"

"애들도 집안에서 자기 할일 있다고 좋아하는 것 같으니 식사는 애들한테 맡겨도..."

쓰레기 들인가?

"너희는 괜찮아?"

"네, 애초에 집안일은 제가 할 영역인 걸요. 저는 얹혀사는 입장이니까요."

"저도 도울거에요!"

"저도요!"

애들 보고 반성해라!

"그러면 앞으로 식사는 애들이 만드는 걸로?"

"부담갖기 싫으면 건물안에 뷔페도 있잖아."

"에이, 그래도 식구끼리는 다 같이 밥을 먹는 게 좋죠."

"식구?"

"네, 저희 식구 아니에요? 오라버니로 인해서 뭉치긴 했지만, 이젠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연하의 순진한 척 가득한 말에 천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식구 맞지, 같이 밥을 먹는 사이니 말이다."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식구, 라고 하니까 갑자기 소속감이 엄청 생기네...

­맞아! 우린 식구야!

현수가 없어 조용히 있던 리우잉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모두 소파 근처에 앉아서 시간을 때웠다.

"그러고 보니 연하 너는 솔의 경비대장 아니었어? 휴가 낸지도 한참인 것 같은데 안 돌아가도 괜찮은거야?"

"도대체 언제적 얘기를 하시는 거에요, 오라버니. 천마신교 갈 때 경비대장에서 잘리고, 외교관 직책을 부여받았거든요!"

연하가 엣햄!하고 작게 기침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슬슬 경비 대장일을 재개해야 하는 데 말이죠."

"하연이는 아직도 우리 도시 경비 대장이구나?"

"그렇죠. 저 말고 마땅한 적임자도 없고, 일 없이 놀고먹는 백수가 되고 싶진 않거든요."

일 없이 놀고 먹는 백수라니... 나보고 하는 말은 아니지?

­나 궁금한 거 있어!

"그래 내 제자여, 뭐가 그리 궁금하지?"

­현수는 언제 나와?

"4시 부터 8시까지는 너에게 시간을 주도록 하마."

­그러면 나는 애들 수련하는 거나 도와주러 갈게! 다들 빠이!

볼 때마다 참 하이텐션이란 말이지...

"저 머리 염색하러 외출해야 하는 데 같이 나가실 분 있으세요?"

"꼭 염색 해야 하는 거야? 녹색머리도 충분히 예쁜데."

"오라버니의 칭찬은 정말 감사하지만, 전 오라버니 못지 않게 언니도 좋아해서요. 최대한 언니랑 닮아지고 싶은 막내의 발버둥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러면 같이 나갈까?"

염색을 어떻게 하는 지도 궁금하기도 했고, 달리 할 것도 없으니까.

"저는 이제 제 일을 해야 해서 못가요."

"저도 슬슬 경비병들 훈련 시켜야해서..."

"본좌는 같이 갈 수 있다."

그렇게 염색을 하러 떠날 3인조가 편성되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이렇게 셋이 나가면 이목은 많이 안 끌릴 거 아니야."

"하긴... 암흑가의 여왕이나, 도시의 경비대장이랑 움직이고 있으면 사람들이 엄청 쳐다보긴 하겠네요."

그랬...었나? 옛날에 하연이랑 같이 다닐 땐 사람들이 잘 알아 본건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빨리 이동해요. 더 이상 이 머리로 있고 싶지 않아요."

"그 머리도 예쁘다니까 그러네."

"하얀색 머리가 더 이뻐요!"

"그런데 아는 미용실 있어?"

"머리 염색하는 데 미용실을 왜 가요?"

응? 염색은 원래 미용실에서 하는 거 아니었어? 내가 잘 못 알고 있던 걸까?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연하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일반적인 염색은 미용실에서 하는 거 맞는데, 제가 할 염색은 일반적인 염색이 아니에요."

"무슨 염색인데?"

염색에 일반적인 거랑 비 일반적인게 구분됐었어?

문화충격인데?

"일반적인 염색을 하면 뿌리 부분이 자꾸 원래 색으로 돌아오잖아요? 그 때마다 다시 염색을 하던가 어떻게 처리를 해야하든가 해야하는 데 그게 귀찮아서 그냥 능력으로 해결하면 돼요."

"... 그게 가능해?"

"세상은 넓고 능력자들은 많답니다. 다행이 이 도시에도 염색하는 곳이 있는 걸로 아니까 거기가서 염색하면 돼요."

능력으로 염색을한다니... 그런건 진짜 상상도 못했어.

연하를 따라서 암흑가를 걷다 보니 덩치 큰 형님들이 우리를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어이, 형씨 거..."

"야, 너 왜 그..."

두 형님이 사이 좋게 굳었다.

'너무 과잉 반응 아니야?'

아무리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이어도 그렇지 다짜고짜 기세를 날리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일반인 한테 굳이 기세까지 뿜어야해?"

"본좌는 기세를 뿜은 적이 없다."

자연스럽게 연하를 바라보니 연하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뭐지? 개꿀잼 몰카인가?'

"지나가십쇼 형님!"

"저희가 사람 잘 못 봤습니다!"

"저를 아세요?"

"알다 마다요. 저번 아레나에서 완벽하게 우승을 차지하신 분 아니십니까."

이야, 아레나 나간지도 한참 된 것 같은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기억력도 좋아.

다행이 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고 맘편히 암흑가를 빠져나왔다.

몇 개월 만에 처음 보는 도시의 모습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연하야, 너 머리 염색한 다음에, 어디 좀 들렀다 가도 돼?"

"상관없는데, 어디 가시게요?"

"내가 옛날에 일했던 총포상."

미르의 일이 다 끝났는데 설마 아직도 월하의 건물안에 있진 않으시겠지. 가서 오랜만에 사장님이랑 인사도 하고 다른 기술자들이 어떻게 됐는지도 물어보자.

"좋아요. 어차피 머리 염색하는 게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거든요."

연하를 따라서 도시의 중심부로 계속 이동했다.

"이 근처 어딘데... 아! 저기다."

연하가 가르킨 건 커다란 빌딩이었다.

저 건물 전체가 염색소? 염색장? 뭐라고 해야해. 아무튼 유사 미용실은 아닐테니, 저 건물에 염색사가 사는 모양이다.

­따르르릉

건물로 들어가서 문을 열자 청아한 종소리가 우리를 반겼다.

매장내부가 그렇게 넓어보이지는 않았는데, 우리 이전에 온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람 한 명이 마침 계산을 하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주인장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추정되지 않는, 기이한 복장과 외관을 한 사람이었다.

"염색하러 오신거죠?"

"네, 하얀색으로 해주세요. 빛조차 반사될 정도로 아주 새하얀 색으로요."

"하얀색은 가격이 제일 비싼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벽에 염색에 필요한 가격이 붙어있었는데, 흰색의 경우 100만원이 훌쩍넘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 적혀 있었다.

"의자에 잠시만 앉아계세요."

염색사가 이런 저런 물건들을 꺼내더니 연하의 머리에 천천히 바르기 시작했다.

10분정도 연하의 만지작 거리면서 능력을 발휘하자 연하의 머리카락색이 이전이 하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머리 감으실게요."

매장 구석에서 머리까지 깔끔하게 감은 뒤 금색의 서클렌즈 까지 끼니 지금까지 내가 알던 연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역시 이 모습이 마음이 편하다니까요."

"계산도와드리겠습니다."

"태양길드 소속, 백연하로 달아두세요."

"알겠습니다."

저런 말로도 계산이 되는 구나...

하긴, 말이 길드지 사실상 도시를 지배하는 정부나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까.

"커다란 마나 파장에 노출되는 게 아니라면 염색이 풀릴 일은 없을 거에요."

"고맙습니다."

계산을 마치고 뒤로 돌아선 연하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오라버니도 염색한 번 해보실래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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