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17화 〉 일상­5 (117/265)

〈 117화 〉 일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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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알림을 듣고 잘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알림을 틀어놔도 못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피곤함에 따라서 일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가 바뀌는 사람도 있고, 알람 없이도 잘 일어날 수 있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후자였다.

언제 일어나야지. 하고 잠에 들면 대체로 그 때 일어났거든.

오늘 아침은 내가 해야하는 만큼 일찍 일어났다.

눈을 떠보니 언제 쳤는지 모를 커튼 사이로 아주 조그마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고 천마는 아직도 나를 꼭 안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깰 것같은데...'

천마의 감이라면, 내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알아차리고 깨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자는 것 같으니까 조심히 빠져나와야 겠지.

최대한 천마를 건드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내가 움직이는 즉시 천마가 강한 힘으로 나를 안아왔기에, 빠져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너 안자지."

천마의 귀에대고 작게 속삭이자, 쿡쿡 거리면서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구나, 나는 아직 아해를 더 느끼고 싶다."

"나 밥하러 가야 해."

"5분도 못 이러고 있나? 너무 깐깐하게 굴지 말거라."

"알았어, 딱 5분만이다?"

분명 5분이 지나면 더 안고 싶고다고 계속 안고 있을 줄 알았는데, 5분이 지나자 마자 안은 걸 풀어줬다.

"기대하고 있겠다. 아해의 손맛이 담긴 아침이라, 굉장히 맛있을 것 같군."

"너무 기대하지는 마."

다시 잠자리에 누운 천마를 뒤로하고 밖으로 거실로 나갔다.

달리 할 것도 없었기에, 다른 것엔 눈길도 주지 않고 주방으로 이동했다.

"일어나셨어요?"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사현이가 이미 밥까지 앉혀 놓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늦잠 자라니까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조수에요!"

"됐고 그냥 가서 자라."

사현이놈 머리를 가볍게 밀며 말했다.

"조수 없어도 알아서 잘하니까. 너는 그냥 가서 푹 자. 아리랑 가연이가 일어났을 때 네가 옆에 없으면 얼마나 당황하겠어."

"걔네들은 좀 당황해도 돼요."

"걔네가 당황하면 결국 피보는 건 너다? 잔말 말고 가서 자!"

"알았어요..."

그렇게 사현이를 돌려보내고 냉장고를 뒤졌다.

구하기 어렵다는 식재료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덕분에 할만한 요리는 많았다.

'일단 김치찌개를 할까?'

한국인이라면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음식이지. 얼마나 맛있으면 채소를 키우기도 힘들고 고기도 구하기 힘든 환경 속에서도 몬스터를 잘 이용해서 최대한 비슷한 맛을 찾아냈겠어?

하지만 내가 지금 할 요리는 대격변 이전의 김치찌개다. 진짜 김치와 진짜 고춧가루, 진짜 돼지 고기로 만드는 진짜 김치찌개라는 말이다.

김치찌개도 각잡고 제대로 만드려 하면 난이도가 상당이 높았을 테지만, 적당히 간을 맞추고 적당한 선에서 만들면, 그렇게 난이도가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먹는 입이 8개니까, 조금 만들어서는 택도 없겠지.'

심지어 하연이랑 월하, 연하는 먹는 양이 엄청 많다. 현수의 기억을 뒤져보면 리우잉도 마냥 조금 먹는 건 아닌 것 같고.

'천마가 마음껏 음식을 먹는 걸 본 적은 없지만, 걔도 다른 애들이랑 비슷하게 먹지 않을까?'

어제 사현이가 차린 음식의 양과 비교해서 점차 양을 늘려갔다.

김치찌개를 대 용량으로 끌이다 보니 간을 맞춘는 게 불편했지만 그래도 나름 잘 만들었다.

'계란말이나 해볼까?'

계란을 풀고 이것 저것 넣은 뒤 프라이패에 올려놓고 돌돌 말았다.

익으면 계란 넣고 돌리고, 다시 익으면 계란 넣고 돌리고, 이짓을 반복하다보니 곧 두툼한 계란말이 하나가 완성됐다.

'달달 하구만,'

작은 조각을 먹어보니, 충분히 맛있었다.

이것도 하나가지고는 애들 위를 만족시키지 못 할게 분명하니 여러 개 만들자.

계란말이를 충분히 만든 뒤 일단 상에 음식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걸리는 반찬들은 사현이가 시간내서 만들어 놨기 때문에 내가 만든건 김치찌개랑 계란말이 밖에 없어도, 상은 그럭저럭 풍족하게 보였다.

'고기 반찬도 있어야 겠지?'

김치찌개에 고기가 좀 많은 편이라서, 고기 반찬은 김치찌개로 대체할 수 있을 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역시 진짜 고기 반찬 만큼은 못하겠지.

고기라는 건 그냥 구워 먹어도 맛있지만 반찬으로 먹을 때 만큼은 양념이 돼있는 게 좋겠지.

간장과 설탕, 양파랑 마늘, 깨랑 후추와 참기름 까지 써서 양념을 만든 뒤 고기를 넣었다.

'순서를 잘 못했다.'

이걸 먼저하고 다른 음식을 했어야지. 더 간이 잘 뱄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이미 지나간 일인데,

커다란 냄비를 가져와서 천천히 쫄여가면서 익혔다.

'벌써 아침이네.'

해도 안 보이는 새벽에 일어나서 음식을 만든 것 같은데, 벌써 해가 뜨고 있었다.

잘 쫄아든 고기를 여러그릇에 옮겨 담아서 상 위에 차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일단 이 정도로만 해보자. 부족하면 더 하면 되지.

"얘들아! 일어나라! 밥 먹어!"

다들 A급 이상 되는 애들이니까. 적당히 큰 소리로 외치기만 해도 일어나겠지.

애들쪽이 걱정되긴 하는데, 사현이가 밤귀가 밝으니 아마 아리랑 가연이를 깨워서 나올거다.

"우으... 벌써 아침이에요?"

가장 먼저 나온 건 연하였다.

잠이 다 안 깼는지 눈을 비비고 있었는데 일어나자 마자 렌즈 부터 꼈는지 눈동자가 황금색이었다.

'쟤는 저렇게 졸려하면서도 할 건 다 하는 구나.'

"처음으로 나온 연하에게, 특별히 내 옆에 앉을 권리를 줄게."

"오예!!!"

말이 끝나자마자 다른 여자애들도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뛰어나온 게 아니라 순간 이동으로 이동한 건지, 인기척 조차 느끼지 못했다.

'효과 직방이네.'

"아해야, 내가 두 번째로 나온 것 같다만?"

"유감이지만, 세상은 1등만 기억해 준단다."

"크흑!"

그러니까 일어났으면 빨리 나올 것이지 왜 밍기적 대.

아리와 가연이도 사현이의 등살에 밀려서 나오는 게 보였다.

"우와, 김치 찌개에요? 맛있겠다."

다들 침울해 져있는 와중에 연하만 들 뜬 어투로 말했다.

그 모습이 썩 귀여워서 웃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는 내 자리!"

연하가 빠르게 내 왼쪽에 앉아 왔다.

"그러면 오라버니 오른쪽엔 누가 앉아요?"

"선착순이지?"

­쾅!

내 말이 끝나자마자 상당히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졌다.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굉장히 큰 소리가 울려퍼진 것 치고는 천마가 내 오른쪽에 앉으며 심심하게 끝이 났다.

"쳇..."

하연이와 월하도 자기 자리 찾아 앉고 애들도 자리에 앉은 다음에 식사가 시작됐다.

"오! 엄청 맛있어요!"

"흠, 본좌의 상상을 뛰어넘는 맛이다. 아해가 이렇게 가정적인 남자일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무슨 맛일 줄 알았는데?"

"먹을 수 있기만 하면 다행인 정도? 절대로 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

"너무하네."

음식은 빠른 속도로 비워져갔다.

상대적으로 먹기도 쉽고 맛도 좋은 고기가 가장 먼저 동나고 그 다음엔 김치찌개, 계란 말이 순서대로 사라졌는데, 애들 먹성을 생각해서 많이 만든 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왠지 모르게 마음에 공허함이 자리 잡았다.

'진짜 엄청 먹는 구나.'

그래도 맛있게 먹으니 기분은 좋네.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연하가 다 먹은 식기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냐, 내가 할게 가서 티비나 보고 있어."

"안돼요.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언니들이 저를 죽일 것 같단 말이에요."

연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하연이와 월하가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길래 일어났으면 째깍째깍 나왔어야지, 잘 한것도 없으면서 연하한테 화풀이 하려고 했던거야?"

"그럴 생각 없었어요! 연하가 멋대로 착각하는 거에요!"

"아무튼, 설거지는 내가 할테니까, 연하 너는 나와 있어. 정 애들이 무서우면 구해온다던 보드게임이라도 구해 오던가."

"알겠습니다!"

연하가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금방 구해 올게용!"

물을 틀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온수가 잘 나와서 손이 시리거나 하진 않았다.

"식기 세척기를 하나 들여놓을 까요?"

'굳이? 그냥 손으로 해도 되는데?'

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오늘이야 내가 하지만, 평소에는 사현이나 여자애들이 하니까.

"굳이 들여놔야 하나? 아해가 설거지를 하는 건 오늘 하루 뿐이고 앞으로는 우리가 계속 하게 될텐데 말이다."

"그것도 그래요. 굳이 필요 없긴 하죠."

S급 각성자 쯤 되면 집안일도 빠른 속도로 마칠 수 있는 모양이다.

하긴, 마나를 써서 설거지를 하면 손도 안대고 끝마칠 수도 있겠지.

­현수는 언제 볼 수 있어?

"글쎄? 오늘도 적당한 타이밍에 4시간 정도 내줄게."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랑 대련하고 올게!

현관쪽으로 뛰어가는 리우잉을 천마가 잡았다.

"연하가 보드게임을 구해온다지 않나. 기다렸다고 하고 가라."

­알았어! 보드게임! 재밌을 거 같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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