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일상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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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가 보드게임을 구해 오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혈향이 나는 것 같았지만... 그냥 기분탓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겠지.
"그런데 인원이 9명이나 되는 데 할 수 있는 보드게임이 있어?"
내가 보드게임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보통 4인용이고 많아야 6인용 정도 아닌가?
"엣헴! 당연히 있죠!"
연하가 네모난 곽 하나를 꺼냈다.
"다들 둘러 앉아봐요. 룰 설명 할 거니까."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연이와 천마가 내 양옆으로 샥샥하고 앉아왔다.
애들은 사현이를 중심으로 세 명이 붙어 앉았고, 리우잉은 애들이랑 대련하면서 나름 친해졌는지 애들 주변에 앉았다. 연하는 하연이 옆에 앉고 월하는 천마 옆에 앉은 다음에야 룰 설명이 시작됐다.
"일단 배경 스토리를 설명해 드릴게요. 저희는 아서왕의 명령을 따르는 기사들이에요!"
"왜 우리가 그딴 왕의 명령을 따라야 하지?"
"배경 설정이니까 그냥 넘기고 들어요!"
벌써 부터 불안불안 한데?
"아무튼 저희는 아서왕의 명에 따라서 원정을 나갈 거에요."
연하가 꽤 크기가 있는 사각 타일을 꺼내서 바닥에 내려놨다.
타일에는 다섯개의 큰 동그라미가 있었는데, 각각 3,4,4,5,5 라고 적혀 있었다.
저 질문 있어요!
"왜 그러시죠 리우잉씨?"
그냥 마피아 게임하면 안되나요?
"안돼요. 그러면 제가 이걸 가져온 이유가 없어지잖아요."
총체적 난국이구만...
"저희는 총 5번의 원정을 떠날 거에요. 여기 써있는 숫자는 각 원정마다 몇명의 기사를 보내야 하는 지를 나타내요. 첫번 째 원정엔 3명, 마지막 원정엔 5명을 보내야 하는 거죠."
"질문이 있다. 우리 중에서 5명을 보내야 해결될 정도의 원정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위험한 원정인 것이지? 당장 나 혼자만 보내도 어지간한 일은 전부 해결될텐데 말이다."
"설정이라고요!"
이쯤 되면 고의로 저러는 게 아닐까?
"원정이 성공할 지 실패할지는 원정에 참여한 사람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져요."
연하가 실패, 라고 적힌 카드와 성공이라고 적힌 카드를 꺼냈다.
두 카드의 뒷면은 같은 모양이었다.
"원정에 참여한 사람은 익명으로 성공 카드와 실패 카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제출 하는데, 제출된 카드 중 단 한 장이라도 실패가 끼어 있다면, 그 원정은 실패로 돌아가게 돼요."
"원정의 성공을 우리가 정할 수 있으면 안되는 거 아니야? 그냥 다 성공을 내면 끝이잖아."
"그래서, 저희를 방해하는 악의 무리들이 있죠."
연하가 붉은 색 카드 몇 장을 꺼냈다.
"모드레드라는 자를 수장으로 하는 악의 세력들은 저희 기사단에 잠입해 있어요. 이들은 성공과 실패,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낼 수 있죠."
"악인이 있다면 다 죽여야 되는 것 아닌가?"
"이 게임엔 악인이 탈락하는 개념이 없어요. 누군가가 악인인걸 알아내도 그 사람은 계속 게임에 참여 해요."
그런데 악인들은 성공과 실패 둘 중 하나를 낼 수 있다고?
"나 질문있어. 그러면 선인들은 실패를 못 내는 거야?"
"네, 못내요."
"재미 없군."
"계속 설명할게요. 악인들이 같이 못 가게 하려면, 원정대를 잘 짜야 겠죠? 저희는 아주 민주적이어서 돌아가면서 원정대장을 맡게 될 거에요. 원정대장은, 원정대의 인원에 맞게 갈 사람을 정하고, 다같이 투표를 해서 과반수가 넘어가면 그대로 원정을 떠나요."
"원정을 떠난 다는 게 성공이랑 실패를 내는 걸 말하는 거지?"
"네! 그거에요."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네.
"그런데 과반수 반대가 5번 연속으로 나온다면 바로 악이 승리해 버린답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들어도 5번 째에는 무조건 통과를 시켜야 한다는 거네?"
"그렇죠."
연하가 나에게 엄지를 들어보였다.
"원정이 5개인 만큼 5판 3선승으로 진행되는데, 실패를 3번 먼저하면 악이 이기고 성공을 3번 먼저하면 선이 이겨요."
"간단하네."
"이제 캐릭터 설명만 하면 끝나요!"
"뭐야 설명할 게 더 있어?"
"조금 밖에 안 남았으니까 집중해 주세요!"
연하가 카드 몇장을 꺼냈다.
"얘는 멀린이라는 마법사에요! 모드레드를 제외한 모든 악인을 알고 게임을 시작해요."
"모드레드가 누군데?"
"악인이에요. 멀린이 자신을 모른다는 장점이 있죠."
"멀린이 악인을 알고 시작하면 너무 유리한 거 아니야? 시작하자마자 악인을 다 까고 시작하면 그냥 바로 이기는 거잖아."
내 말에 연하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걸 위해서 암살자가 있죠. 원정을 3번 성공해서 선이 승리한 시점에서 암살자가 멀린을 맞추면 게임에서 바로 승리해요!"
"뭐야! 완전 불합리 하잖아!"
"그러니까 멀린은 자신의 정체를 꽁꽁 숨겨야 겠죠?"
상큼하게 말하는 연하의 머리에 하연이가 꿀밤을 박아 넣었다.
"악... 다른 캐릭터들도 있긴 한데, 더 설명하면 어려워지니까, 일단 이대로 하고 시작해요!"
"캐릭터가 없으면 못하는 거 아니야?"
"그냥 능력 없는 쩌리로 사는 거죠."
연하가 캐릭터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모드레드와 암살자를 포함해서 악 3명, 멀린을 포함해서 선 6명으로 진행할게요. 다들 카드 뽑아 가... 기 전에! 특수 규칙 하나 추가할게요."
"또 뭔데?"
"표정 읽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파악하기 금지! 카드 뒷면에 비치는 거 읽기 금지! 카드 뒷면의 미세한 흠집으로 선이랑 악 찾아내기 금지!"
"하!우리를 뭘로 보고 있는 것인가? 그런 치졸한 짓은 당연히 안 한다!"
"좋아요. 그러면 뽑아가세요."
다들 카드를 뽑아갔고, 나는 마지막으로 카드를 뽑았다.
내가 뽑은 카드엔, 모드레드. 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다들 업드려주시고 제 지시에 따라 주세요."
연하의 말대로 모두 업드렸다
"일단 다들 기감을 꺼주시고, 악의 세력의 인원들만 고개를 들어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해 주세요."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가연이와 연하가 고개를 들고 있어서, 고개를 끄덕임으로서 확인을 했다는 표시를 했다.
"악들을 고개를 숙여주시고, 모드레드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만 조용히 왼손을 들어주세요. 그리고 멀론은 고개를 들고 누가 악인지 확인해 주세요."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확인 다 하셨을 걸로 생각하고 게임을 진행 하겠습니다. 다들 원래대로 업드려 주시고. 다들 고개 들어주세요."
고개를 드니 뭔가 뻘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첫번째 원정대장은 오라버니가 하는 걸로 할게요. 다들 불만 없으시죠?"
"없다."
"세 명을 지목하면 되는 거지?"
생각해 보자. 가연이나 연하랑 같이 갔다가 실패가 2장이 나오면 바로 조져지는 거아냐?
"남매끼리 같이 가보지 뭐. 나랑 연하랑 하연이, 이렇게 셋이 갈게."
"그러면 찬반 투표하겠습니다. 하나 둘 셋, 하면 찬성하시는 분은 오른손을 반대하시는 분은 왼손을 들어주세요. 하나, 둘 셋."
결과는 놀라웠다.
연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찬성했다.
"엥? 왜 다 찬성해요?"
"어차피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찬성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러는 연하 너는 왜 반대를 했지? 심지어 자신이 가는 데도 말이야."
천마가 연하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니, 투표하는 것 좀 보려고 했죠. 이것도 전부 정보란 말이에요!"
"일단, 원정을 다녀오세요. 그러면 일단 누가 실패를 낼지 알 수 있겠죠."
"제가 악인 것처럼 얘기하시네요?"
"어머, 연하씨를 두고 한 말은 아닌데, 찔리세요?"
이야, 초반부터 치열한데?
연하가 나눠준 카드를 받고 아무 생각 없이 성공을 선택해서 냈다.
'애초에 성공을 고를 생각이었으니까 악 두 명을 골랐지.'
연하가 실패를 내면 연하나 하연이를 몰아가면 되고, 연하가 성공을 내면 블러핑에 성공한 셈이 되는 것 뿐이다.
"깝니다."
결과는 성공 두 개 실패 하나.
"아... 첫 원정을 실패해버렸어요..."
"연하, 너 때문에 실패한 것 같은데, 연기를 참 못하는군."
얘는 왜 처음 부터 정치질이야?
"제가 아니라 하연 언니나 오라버니일 수도 있는데 왜 저한테만 그래요!"
"원래 이 게임은 몰아가는 게임 아니었나? 네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오면 더 이상 그만할테니, 알아서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도록."
"얘들아, 싸우자고 하는 거 아니잖아? 진정 좀 해봐."
"흥!"
연하가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틀었다.
"일단 다음 원정대장은 나인가?"
"네."
"4명이란 말이지..."
천마가 자신과 나, 리우잉과 사현이를 가리켰다.
"이렇게 넷이서 가보도록 하지."
"그러면 찬성하는 사람은 오른손, 반대하는 사람은 왼손, 하나 둘 셋!"
나는 오른손을 들었다. 사람 멀린 머리 흔들기엔 제격인 픽이기도 했고, 악도 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나를 포함한 가는 사람은 모두 찬성했다. 이렇게만 찬성했으면 찬성이 4명이라서 안 가는 건데, 가연이가 슬며시 오른손을 들고 있어서, 결국 원정을 떠나는 걸로 결정났다.
"가연이라고 했었나? 꼬마야, 너는 왜 찬성을 했는가? 너 자신이 가지도 않는데."
"어어, 사현이가 가서요!"
"아무래도 이 조합 안에 악이 한 명 숨어있긴 한 모양이구나. 그리고 가연이 너도 아마 악일테고 말이지."
눈치 참 빨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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