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일상12
* * *
천마의 얼굴은 굉장히 평온했다.
벌을 준다는 사람의 얼굴에 분노라는 감정은 일절 담겨 있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좋다는 듯 입가에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벌을 준다면서 화는 하나도 안 난 것 처럼 보이는데?"
"당연히 화는 나지 않았다. 아해가 하는 일인데 아해가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쉬이 화를 내는 거 봤느냐. 다만 아해가 너무 경각심이 없는 것 같아서 위기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벌을 주는 것 뿐이다."
"저도 벌 줄거에요!"
"무슨 벌인 줄 알고?"
나도 현수 벌 줄 거야!
"걔는 잘못도 없는 데?"
벌, 이라는 이름이 가진 마성때문일까? 원래 하이텐션이던 연하와 리우잉이 텐션에 잡아 먹혀서 아무말이나 막 내뱉고 있는 듯 했다.
"근데 진짜 무슨 벌을 줄 건데?"
사지 절단!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내가 사지가 잘릴 정도로 큰 잘못을 했어?"
내가 여기서 갑자기 너희들 다싫어! 꺼져! 라고 진지하게 말해도 사지는 안 잘릴 것 같은데.
'아닌가? 잘릴 수도 있나?'
내가 진짜로 얘네가 싫어져서 진심에서 우러나는 목소리로 말하면 못 잘릴 것도 없지.
'누나한테 사지를 자른다는 건, 그냥 애정표시야.'
'누가 애정표시로 사지를 자른다고 하냐?'
가만 보면 얘네가 제일 이상한 것 같아.
"그렇게 큰 벌을 줄 것은 아니다."
"그럼 혹시 발에 입을 맞춘다던가. 채찍으로 맞는 다던가 하는 형벌인가요?"
월하야, 사심담지마라, 여기서 그런거 좋아하는 사람 너밖에 없어.
리우잉이 눈을 살짝 빛낸 것 같기도 한데, 리우잉이 덤벼 들면 현수한테 맡기면 된다.
'너희 커플끼리 알아서 처리하시라고요.'
"그런 형벌은 나중에 아해와 잠잘 때나 같이 하도록하라."
"그러면 도대체 무슨 벌인데요?"
조용히 있던 하연이까지 천마에게 질문했다.
"그걸 생각하지 못했으니 이렇게 말을 돌리고 있는 거 아닌가?"
천마야 너 요즘에 갭모에 쩐다? 세계관 최강자로서의 위엄은 어디가고 늘 조금씩 모자란 미녀가 되버린거야.
"생각 안했으면 그냥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꼭 나한테 벌을 줘야 해?"
"당연하지. 아해는 벌을 받아야만 한다."
"옳소!"
"하아, 그래 알았어 받으면 되잖아."
저러는 거 보면 어차피 진지하게 벌을 줄 것 같지도 않으니 뭔 벌을 주든 그냥 편안하게 받으면 되겠지.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천마가 씩 미소지었다.
'불안하게 왜 저래?'
"아해의 입으로 벌을 받겠다고 했다."
"어... 받을게."
"아해의 이틀 중 하루! 우리 모두를 데리고 잠자리에 들도록! 그리고 저항하지 말도록."
"저항 이라니?"
"아마 아해를 차지 하기 위한 엄청난 각축전이 벌어질텐데, 아해는 우리의 손길에 저항하지 말고 꼭 안겨있으라는 뜻이다."
뭐... 그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내 생각보다 그렇게 엄청난 벌도 아닌데다가, 누구 한 명 편애하는 것도 아니고 다 같이 자는 거니까.
"좋아. 알아서 해."
"나이스!"
연하가 천마에게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듯 손을 들었다.
짝!
합이 아주 잘 맞는 구만.
'역시 연하는 전생에 박쥐였던 게 분명해.'
아까는 천마한테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또 잘 어울리잖아?
"그러면 이제 돌아갈까? 더 이상할 것도 없고, 더 볼 것도 없잖아."
"좋아요... 아! 돌아가는 길에 오라버니 렌즈 사요!"
쳇, 그냥 까먹고 있지 그걸 왜 기억해 내서는...
"렌즈라니?"
"렌즈요?"
렌즈?
하연이가 한 번 말하니 월하와 리우잉이 자연스럽게 따라했다.
내가 보기에 저것도 월하랑 리우잉이 장난 치고 있는 거야. 하연이가 먼저 말한 걸 자연스럽게 따라 말하면서 내가 렌즈를 낀다는 걸 교묘하게 놀리고 있는 거지.
"네! 3남매 깔맞춤 컬랙션으로 금색 렌즈하나 사서 달아드리려고요."
"달긴 뭘 달아. 렌즈가 무슨 귀걸이도 아니고..."
단다고 하면 눈을 뚫고 렌즈를 꼬매는 것 같잖아.
"금색... 좋네."
하연이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걸 보면 내가 렌즈를 낀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했나 보지?
'내가 생각하기엔 절대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다른 색도 아니고 금색이다.
화려한 색, 이라고 하면 무지개 다음으로 떠오르는 게 금색인데 나 같은 사람한테 잘 어울릴리가 없잖아? 하연이랑 연하야 워낙 미모가 뛰어니까 어울리는 거지, 내가쓰면 어색함의 극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렌즈를 파는 곳이 우리 도시에 있어?"
"없으면 솔에 갔다 오면 되죠. 여기 S급 각성자가 몇명인데."
"있기는 해, 렌즈 만들 기술력은 있는 사람들을 알아. 문제는 그 사람들이 렌즈를 제작해 줄거냐는 건데..."
하연이가 나를 바라봤다.
"만들어 줄 것 같긴 해. 이 구성으로 가서 렌즈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하면, 거부할 사람이 어딨 겠냐?"
하긴... S급 각성자만 세명인데, 간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바로 만들어 줄 것 같긴하다.
"정 안된다고 하면, 돈 좀 많이 쓰면 되지."
"그러면 바로 이동합시다!"
일단 게이트 밖으로 나간뒤, 하연이의 뒤를 따라갔다.
"여기에요."
하연이가 안내해준 곳은 나름 규모가 있는 대장간이었다.
아직 저녁시간도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안에서는 깡깡! 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손님이야?"
'응? 뭔가 익숙한 목소리인데...'
"지금 바쁜..."
주인장의 시선이 내 얼굴에 고정됐다.
"야! 이 자식아! 의뢰를 맡겼으면 찾아가야 할 거 아니야!"
"하하, 오랜만이죠?"
이 대장간의 주인은 혜연씨인듯 했다.
헤연씨가 누구냐고?
저번에 이수아 때문에 납치됐던 기술자들 있지? 그 사람 중 한 명이다.
"네 방패 여깄다. 최대한 기본에 충실해서 단단하게 만들었으니까, 아마 네 몸 정도는 충분히 보호해줄 거야."
혜연씨가 던진 방패는 동글동글하고 작은 사이즈의 방패였다. 막을 수 있는 면적이 엄청나게 넓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 좁은 것도 아니었기에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충분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오, 좋은데요? 고마워요."
"일 다 끝났으면 가. 나 일해야 해."
"근데 저 방패 때문에 온 거 아닌데요?"
"그러면 왜 왔는..."
혜연씨가 애들을 쓱 훑어봤다.
"... 나 S등급이 쓸만한 무기까지는 못 만드는데? 나 미리 말했다. 못 만들어. 이상한 거 시키지 마."
당당하던 혜연씨도 S급 각성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니 긴장한 티가 역력하게 보였다.
"무기 만들어 달라고 온 거 아니에요. 황금색 서클렌즈 하나 만들고 싶은데 만들어 줄 수 있어요?"
"서클렌즈? 별로 어렵진않지? 근데 그걸 왜 나한테 와서 부탁해? 다른 기술자들도 잘 만들 수 있는건데."
"제 동생이 안내해 줬어요."
"우리도시 경비대장님?"
"네."
혜연씨가 우리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만들어 줄 수는 있는 데 말이야. 나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있고, 솔직히 나 정도 되는 기술자가 렌즈 하나 만드는 것도 좀 자존심이 상해서 말이야."
"잠시 귀 좀 대보실래요?"
"응?"
연하가 혜연씨의 귀에 대고 몇 번 중얼 거리니 혜연씨의 표정이 싹 변했다.
"맡겨만 주세요 손님."
입가에 미소를 가득 짓고 있는걸 보니 협박을 한 건 아닌 것 같고, 아마 돈으로 회유를 한 모양이다.
"어느분께서 쓰실 건가요?"
"여기 이분이요"
연하가 나를 가리켰다.
"얘가요?"
혜연씨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 그러고 보니 너 머리색 바뀌었다? 염색했냐?"
"네, 본의 아니게 염색을 하게 됐네요."
"본의가 아니라뇨! 오라버니도 좋아서 하신 거잖아요!"
뭔가 B급 빌런이 할 법한 말인데? 너도 좋잖아? 느낌이야.
"3남매 전부 깔맞춤 하려고 하는 거야?"
"네, 그런거죠."
"그러면, 그냥 동생분들 눈색이랑 똑같이 하면 되는 거지?"
"네, 그렇게 해주시면 돼요."
"혜지야! 내려와봐! 의뢰들어왔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연하와 하연이의 눈 색상과 모양을 그대로 따라서 렌즈를 만들기 까지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케이스를 만드는 데 오랜시간이 걸렸는데, 시작하기 전에 한 시간쯤 걸린다는 말을 미리 들어놨기에, 나랑 하연이, 그리고 연하 셋이서만 기다렸다.
"케이스 잃어버리지 마라. 따로 식염수 부을 필요도 없이 그냥 넣어서 보관하면 되게 만든 거니까. 아마 이거 잃어 버리면 엄청 번거로워질거야."
"알았어요."
렌즈를 눈 근처에 가져다 대자 착하고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가서 붙었다.
"오, 개신기해."
"오라버니는 자기 얼굴도 안 보이시면서 뭐그렇게 신기하세요?"
"나는 황금색서클렌즈를 끼면 세상이 조금 누르스름하게 보일 줄 알았거든? 그런데 멀쩡히 보이네?"
"당연하죠. 서클렌즈가 색을 내는 부분은 동공이 아니라 홍채니까요."
"그렇구나."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난 거겠지.
"어때?"
"나름 잘 어울리는 데요? 머리 스타일이 바꼈을 때만한 파장은 없지만, 충분히 잘어울려요. 솔직히 우리 남매가 같은 머리색과 같은 눈색을 소유하게 된 것 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흐음..."
거울을 빌려서 얼굴을 바라보니, 진짜로 인상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연하는 서클렌즈 낀거랑 안낀거랑 인상차이가 꽤 나던데...
"보수는 나중에 태양길드를 통해서 입급해 드릴게요."
"조심히 들어가십쇼 고객님!"
도대체 얼마를 준다고 했길래 저 혜연씨가 저렇게 저자세가 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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