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게이트 안에서3
* * *
딱딱하게 굳은 분위기 속에서 안숭조차 화련이의 눈치를 보면서 가만히 서 있었다.
이미 원숭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안숭이 화련이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귀엽다면 나름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기... 얘들아? 재료 다 구해 왔다니까?
"후우... 그래, 다 구해왔다니 다행이군..."
화련이와 수아의 신경전은 화련이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차라리 안숭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화련이가 수아를 줘패서라도 승리를 가져갔을 확률이 있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안숭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하게됐다.
아무리 화련이의 주 영역이 아닌 말싸움으로 이긴 거라고는 하지만 화련이를 이긴 수아에게 마음속으로 박수를 보내주기로 했다.
'대단해!'
물론 이 말이 내 입밖으로 내뱉어 지는 일은 없었다.
화련이가 화나 있는 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수아를 칭찬했다가는 오늘 밤이 두려워질 예정이었으니까.
아니, 오늘 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최소 한 달 정도는 화련이한테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이 남자애의 마나를 늘려주면 되는거지?
"그렇다. 얼마나 늘어날 것 같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달라. 마나를 아예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소폭 늘어날 거고 아무리 적은 마나라도 그걸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만족할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겠지.
'잠깐만, 그러면 내가 나오면 안되겠는데?'
현수와 바통터치를 해서 그가 내 육체를 지배하게 했다.
"응?"
뭐야?
수아와 안숭이 거의 동시에 반응했다.
현수랑 나랑은 상당히 비슷한 습관들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의식이 바뀌자마자 현수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게 강자들이라는 건가?
"너, 누구야?"
수아의 눈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수현씨 동생 되는 사람이올시다. 진짜 동생은 아니고 2번째 인격이라고 생각하면 편할거야."
"어... 언제부터 수현이 정신속에 있었어?"
"당신이랑 이수현이 오랜만에 다시 만났을 때도 나는 이 놈 정신속에 있었어."
수아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그녀 입장에서 나에게 다른 자아가 있다는 사실은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큰 일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갑자기 나타난 거야?"
"이수현 보다는 내가 훨씬 더 마나를 잘 다루거든, 받아드릴 때 마나를 잘 다뤄야 성장폭이 커진다면서? 그래서 나왔어."
"그... 그렇구나..."
수아가 현수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불안한 듯 몸을 떠는 걸 보고 있자니 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바로 시작하면 돼?
"따로 준비해야 할 건 없어?"
어, 없어. 너는 그냥 편하게 있으면 돼 중요한 건 내가 다 할거야.
안숭이 수많은 재료들을 갈거나 빻으면서 가루로 만들었다.
그 가루를 바닥에 요상한 방식으로 그리더니 나를 들어서 문양의 정 중앙에 서게 했다.
그러면 시작한다? 몸으로 들어오는 마나를 최대한 붙잡는다는 느낌으로 있으면 돼.
"알았어."
안숭의 말을 따라 마법진의 중앙에 서 있으니 나를 향해서 무언가가 강하게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호오... 마나를 중앙으로 유도하는 기구인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해. 인간이 몸 안에 잡아 둘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환하는 것도 같이 들어가 있거든 아마 너희가 따라하기엔 많이 힘들걸?
"확실히 그래 보인다."
많은 양의 마나가 내 몸을 향해 밀려들었다.
대부분의 마나는 서로 부딪히고 부서져서 내 몸을 떠나갔지만 일부의 마나는 내 몸안으로 들어왔고 우리의 영웅인 현수가 온 정신을 집중해서 마나를 몸안에 가둬두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의 집중과 노고가 여실히 느껴졌던 15분이 지나고 안숭이 재료로 섰던 가루들이 빛을 잃어 갈 때 현수가 눈을 떴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마나를 흡수했는데?
"내가 봐도 그렇다... 이 정도면..."
화련이가 말을 흐렸다.
그래도 각성자한테는 미치지 못해... 조금만 더 많은 마나를 가둬둘 수 있었다면 확실하게 각성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네.
근소한 차이로 각성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현수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바로 느꼈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마나를 늘린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표해도 모자란 와중에 아깝다는 생각을 하거나 실망한다면 그건 현수한테 상당히 실례가 되는 행동임이 분명했으니까.
아마 몇 달 정도 꾸준하게 수련하면 마나가 자연적으로 늘어나면서 각성할 수도 있어.
"알았어. 앞으로는 훈련 열심히 해야 겠네."
지금까지는 어차피 안 된다는 이유로 쉬고 있던 훈련을 다시 재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숭의 말처럼 마나를 천천히 불리다 보면 F급 각성자로 각성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면 이만 나는 간다. 재료 수급하는 거랑 마나를 유도해 주는 과정에서 힘을 너무 써버렸어.
"고마워."
고맙긴 뭘, 애초에 그런 약속으로 일을 진행한건데.
안숭이 사라져가며 화련이를 바라봤다.
나중엔 서로 진심을 다해서 겨뤄보자.
"알았다."
안숭이 활짝 웃으면서 우리의 시야속에서 사라졌다.
안숭이 사라짐과 동시에 검은색의 게이트가 발생했고 현수가 나에게로 의식을 넘겼다.
"수현이지?"
"어, 나야."
수아가 나에게로 다가와서 껴안겼다.
"너 사라지는 줄 알고 진짜 깜짝 놀랐어..."
수아의 목소리엔 상당한 울음기가 들어가 있었는데 그 목소리에 거짓이 하나도 없는 것이 진짜로 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내가 갑자기 어딜 사라지겠냐."
수아를 꼭 끌어안고 안심시켜 주고 있다 보니 나를 향한 화련이의 따끔따끔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이... 일단 나갈까? 바깥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 일단 나가자꾸나."
그러고 보니 이틀정도 걸리 거라던 안숭이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앞에 나타났다.
"안숭... 생각보다 엄청 일찍 도착했었네..."
게이트로 향하면서 중얼거리니 화련이가 알맞은 대답을 해줬다.
"안숭이 우리를 배려해 준것이다. 안숭이 느끼기엔 실제로 이틀이 걸렸겠지만 게이트 내부의 시간을 조율해서 우리의 시간이 빨리 흘러가게 만든 것이다."
"아아..."
그렇게 이야기 하니 이해가 됐다.
원숭이라고 해서 조금무시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똑똑하구나.
"아무튼 빨리 나가자. 더 이상 아해와 이수아가 붙어 있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화련이의 굳은 표정에 재빨리 수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게이트 밖은 아주 평온했다.
우리가 사라진지 대충 두 시간 정도 지났음에도 근처에는 사람도 많고 아주 멀쩡하게 돌아가는 듯 보였다.
'응? 왜 식스가 저깄는 거 같지?'
"여신님! 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안고 계시는 남자분과는 무슨 관계시죠?!"
'시발?'
주변에 몰려있던 수많은 사람들 중 10퍼센트는 기자였고 나머지 90퍼센트는 기자들을 구경하러 온 민간인 들이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가 게이트에 먹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꽤 많았었는데 그 사람들이 병풍들도 아니고 각자의 의지를 지니고 있는 인간들인 만큼 '와! 게이트 안으로 사람이 빨려 들어갔어! 나는 내 할일 해야지!' 이러는 게 아니라 다들 놀라서 신고를 했을 테니 이 정도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보아하니 게이트에 끌려 들어갔을 때 부터 들어간 사람 중 한 명이 수아라는 걸 알아본 사람이 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갑작스럽게 나타난 게이트에 사람들이 빨려 들어갔어도 이렇게 많은 인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리도 없었고 심지어는 이 도시의 수장인 식스마저 나와있을리가 없었으니까.
"안은 평범한 게이트였고요, 옆에 있는 남자는 친구입니다. 어릴 적에 친했던 옛친구죠."
"그 옆에 계시는 여성분은 누구십니까?"
"민간인이십니다."
얼빠져 있는 나와 화련이와는 달리 수아는 굉장히 능숙하게 기자들을 상대했다.
'아니 근데 기자들이 왜 있어?'
미르는 아직 회생한지 얼마 안된도시잖아.
'독재자에게 지배당하는 시절에도 기자들은 있어나보지. 미르엔 기자도 있으면 안되냐?'
머리속에서 현수의 일침이 들려왔다.
'그건 아닌데...'
뭔가 어색해서 그러지.
즉석 기자회견처럼 진행된 기자들의 질문 공세는 식스가 끼어들어서 중재를 한 다음에야 멈출 수 있었다.
"다들 이만 해산해 주시길 바랍니다!"
식스의 외침과 경비들의 활동으로 기자들이 천천히 해산되어 갔다.
"후우... 빡세네..."
사람들을 모두 해산시킨 식스가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너는 왜 여깄고?"
"일이 좀 있어서 들렀어."
"일단 따라와봐. 지금 너희 때문에 우리 도시가 난리도 아니거든?"
게이트에서 나온 다음 바로 우리 도시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당장 돌아갈 수는 없어 보였다.
식스의 눈빛이 아주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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