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각성1
* * *
게이트 밖으로 나오니 모든 것이 이전 그대로였다.
애들은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어떤 가구하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내 손에 쥐여져 있는 붉은 구슬이 없었다면 내가 게이트 안에 들어갔다 나온 것이 모두 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지 않았다.
'구슬이 나를 인도해 줄거라고 했나?'
다른 애들한테 말하고 갔다오는 건 어떨지도 고민했지만 역시 그건 아닌것 같았다.
그 구슬을 준 존재가 그걸 원하고 있지 않았으니 애들에게 말했다가는 구슬이 효력을 잃을 지도 모른다.
구슬을 만지작 거리니 구슬이 한 방향을 가르켰다.
겉으로 보기엔 여전히 매끈한 구형의 구슬이었는데 손에 닿는 감각에서 어디로 향하라고 하는 지 말해주는 듯 했다.
"얘들아. 오빠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건물의 다른 사람들이랑 있어."
"알았어요."
내 표정의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걸까?
사현이가 애들을 데리고 연하의 조직원들이 모여서 대피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월하는 지금부터 적어도 10시간은 오지 않아.'
쉬는 시간이 끝난지 얼마 안 됐으니까.
하연이는 아예 솔로 갔기 때문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모하고 연하는 일이 너무 바빠서 쉬는 시간을 낼 타이밍이 없다.
만약 쉬는 시간이 난다고 해도 순간이동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집에 오지 않고 일터에서 쉴 것이 분명했다.
'되도록이면 10시간 안에 끝내자.'
지금이야 애들이 너무 바빠서 내가 어딨는지 찾아볼 여유가 없겠지만 월하에게 휴식시간이 찾아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없는 게 보인다면 바로 내 위치를 알 수 있을 테니까.
혹시나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모자를 꾹 눌러썼다.
오랜만에 권총을 들고 단검을 반대쪽에 장착해 놓으니 아주 오랜만에 만들어진 전투태세가 됐다.
'방패는 결국 큰 쓸모가 없네.'
기왕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건데 쓰는 게 좋지 않을 까하는 고민이 들긴 했지만 역시 두고가기로 했다.
당장은 필요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구슬의 신호를 따라서 걸었다.
월하의 건물 밖으로 나오니 길을 걷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끔 생필품 같은 걸 가득 들고 이동하는 사람이 있는 걸 보니 모든 행정이 마비된 건 아닌것 같았는데 첫날엔 이것보다 상황이 심각했다고 한다.
연하를 비롯한 많은 각성자들이 열심히 움직였기 때문에 저렇게 물건을 나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구슬의 안내를 따라서 걸었다.
때로는 게이트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고, 각성자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몬스터들이 나에게 덤벼들기도 했지만 현수가 마나를 다루고 내가 육체를 다루자 어지가한 몬스터는 가볍게 찢겨서 사라졌다.
예전엔 총이 없으면 잡기 힘들었던 C급 몬스터도 지금은 여유롭게 베어낼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신체 능력, 현수의 실력, 그리고 화련이가 마련해 준 단검을 이용해서 만들어낸 결과였다.
천천히 걸어서 도착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였다.
겉으로 보기에도 어색한 공터도 아닌 것이 주변에도 특이한 것이 아예 없었다.
'여기 맞아?'
아무리 봐도 특별할 것 없는 공간이었지만 구슬은 명백하게 내가 서 있는 곳의 바로 아래쪽을 표시하고 있었다.
'뚫고 들어가라는거야?'
지금까지 구슬은 아무 생각없이 직선경로로 알려주지 않았다.
장애물에 가로막히면 그걸 돌아가는 길을 알려줬기 때문에 구슬이 정 아래 방향을 가리킨다면 땅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밖에 없었다.
'현수야, 뚫을 수 있겠냐?'
'흙정도는 뚫을 수 있는 데 지반까지는 못뚫어.'
다행이라고 할까? 우리가 서 있는 곳은 흙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이곳이 만약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이루어진 곳이었다면 뚫을 수 있을 지 없을 지는 뚤째치고 도시에 피해가 갈까봐 쉬이 움직일 수 없었을지도 몰랐겠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바닥은 흙이였다.
'내가 못 부술 것 같으면 구슬이 여길 가르키지도 않지 않을까?'
'속이 비어있기라도 하나? 일단 해볼게.'
현수가 단검에 마나를 모았다.
그가 단검에 마나를 분사해서 단검 내부의 마나를 날로 옮기는 순간 바닥에 단검을 휘둘렀다.
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깊은 구멍이 패였다.
일격에 만든 것 치고는 분명 큰 구멍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구슬이 가르키는 곳에 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 번 더 쳐야 할 것 같은데?'
'알았어.'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땅을 내리쳤다.
이전의 우리라면 이 거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위력의 공격을 마치고 나서도 2시간은 쉬고 나서야 똑같은 일격을 가할 수 있었겠지만 안숭의 도움으로 파워업한 우리는 바로 다시 동일한 수준의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쾅!!
다시한번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진 뒤 아까와 비슷한 수준의 깊이로 땅이 한 번 더 파였다.
이걸로도 안되는 건가? 싶을 때 흙이 우수수 떨어지며 땅에 구멍이 뚤렸다.
구슬이 그 구멍을 가르키길래 그곳으로 내려가니 인공적인 구조물로 보이는 벽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뒷 부분은 토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고 정면만이 작은 빛을 발하면서 나를 인도하듯 존재했는데 구슬 또한 앞을 가리키길래 앞으로 걸어나갔다.
가면 갈수록 빛이 약해졌기 때문에 마나로 안력을 강화해서 나아갔는데 그럼에도 빛이 모자라서 마나로 앞을 밝혀나가며 나아갔다.
지하도는 상당히 여러갈래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구슬은 갈림길 마다 방향을 제시해 줬고 나는 구슬을 따라서 쭉 이동해 나갔다.
'여긴 대체 어디지?'
게이트 사건에 의해서 만들어 진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반을 없애 버리고 그곳에 지하도를 만드는 짓을 했는 데 지상이 멀쩡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도시가 만들어지면서 같이 지어진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가능성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고 가정하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런 거 같은데? 도시 토박이인 너도 이런곳이 있는 줄은 몰랐지?'
하연이는 알고 있었을까?
'아마 알고 있지 않았을까? 걔가 이 도시를 만든 건 아니지만 S급 각성자시잖아. 지하에 떡하니 지하도가 뚫려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할리가 없지.
맞는 말이다.
지하도 제작에 참여하진 않았어도 존재자체는 알고 있었겠지.
구슬의 신호를 따라서 계속 이동하다보니 알 수 없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체감 적으로는 분명 한 바퀴를 돌아서 같은 곳을 지나고 있는데 정작 내 눈에 보인것은 다른 곳일 때도 있었고 방향이 이리저리 어지러 지거나 갑자기 길이 뚝하고 끊겨서 연결되어 있는 등 일반적인 지하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이 만들고 유지하기엔 그 규모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이번 사건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어지러이 꼬인 공간에서 구슬은 뚜렷하게 그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구슬이 알려주는 대로 계속 걸어갔다.
가면 갈수록 공간의 꼬임이 심화되는 것이 사건의 근원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도착인가.'
심각하게 꼬여졌던 공간의 유동이 점차 가라앉는 걸 보니 거의 다 도착한 듯 보였다.
그렇게 마지막 모퉁이를 돌아 도착한 곳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거대한 게이트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놈이 원흉인가 본데?'
현수의 말에 동의했다.
밖에서 일어나는 게이트 사건은 이 놈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공간의 꼬임으로 자신의 위치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도시가 안정화 된 다음이 되면 아마 연하나 월하에 의해 금방 들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도시가 언제쯤 안정화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이놈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구슬을 바라보니 윙윙대며 진동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게이트는 도시에 게이트를 뿜어대는 것만으로도 벅찬듯 딱히 아무런 몬스터를 내 뱉지 않고 존재할 뿐이었는데 마냥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을 윙윙대던 구슬은 서서히 떠올라서 모습을 변형시켰는데 그 모습이 아까 내가 봤던 여성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키가 거의 2미터는 돼보였던 그녀의 크기가 그의 10분지 1도 안될 것 같은 작은 키가 되었다는 걸 빼면 내가 아까 봤던 그녀의 모습과 일말의 차이가 없었다.
여기까지 잘 왔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저 게이트를 없애는 건 너 스스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하는 지 방법을 알려주셔야..."
게이트를 없애는 방법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등반형 게이트가 그러했듯 안으로 들어가서 클리어 해야지.
그녀가 싱긋하고 웃으며 나에게로 다가와 볼에 입을 맞췄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다. 나를 닮은 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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