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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화 〉 각성­3 (197/265)

〈 197화 〉 각성­3

* * *

나는 약하다.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약하지 않은 축에 들 수도 있다.

아직 각성을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C급 정도의 몬스터 정도는 가볍게 때려잡으니 평균적인 관점에서 보면 절대 약하다고 할 수 없지.

하지만 나는 약하다.

왜?

내 주변에 있는 애들이 너무 셌으니까.

화련이 까지 갈 것도 없었다.

심지어 하연이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연하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나는 리우잉 조차 이기지 못했으니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약한 나는 늘 그녀들에게 지킴 당했다.

내가 그녀들을 걱정하는 건 걱정하지 말라는 한 마디에 넘어갔고 나를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큰 의미가 없었다.

겉으로는 걱정 안한다고 해도 속으로는 걱정하고 나를 지키려고 들었으니까.

따라서 나는 약하다.

누군가에게 지킴 당하는 존재다.

­푸하하하하! 자신 자신을 너무 쉽게 이겨버린 놈이라 긴장했는데 이거 완전 맹꽁이나 다름이 없군! 그들이 무엇인데 네 자존심을 그렇게 깎아내리냔 말이다!

저 양반은 뭐하는 걸까? 내가 벽을 넘으면 안되는 상황 아닌가?

나를 조롱하는 것 처럼 들리는 말이긴 했지만 다르게 해석하면 나를 한심하게 보면서도 어느 정도 격려하는 것 처럼 들리는 말이기도했다.

'굳이 적의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

외부와 완전히 단절하려고 할 때 그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꾸준히 정진하면 된다.

보스몬스터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현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면 누가 나한테 말을 걸 수 있지?

'아.'

잘 생각해 보니 아까 나에게 구슬을 줬던 흡혈귀의 목소리였다.

완전히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더니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꾸준히 정진하면 된다고?"

웃기는 소리다.

꾸준히 정진해서 안 된예를 나는 너무나 명확히 알고 있다.

물론 내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강해지는 걸 포기하고 있던 상태였으니까.

그럼 누구얘기냐고?

'리우잉.'

그녀는 비각성자다.

하지만 천마의 제자로서 한 평생을 수련에 매진해 왔다.

그런 그녀조차 자신의 동기들은 커녕 일반적인 S급 각성자도 이기지 못한다.

권마는 또 어때. 하연이랑 싸워서 패배했잖아.

그들은 한 평생 무를 연마한 무인들이야.

그런 그들도 넘지 못한 벽을 내가 어떻게 넘어?

­꾸준히, 정진하면 된다.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까 했단 말과 토씨하나 다르지 않은 말이 내 귀를 통해서 들려왔다.

약간의 짜증이 담겨있긴 했지만 아까랑 거의 차이가 없었다.

'꾸준히 정진해서 되는 케이스를 보여줘.'

리우잉도 실패했다.

권마도 실패했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 실패했다.

이런 와중에 나한테 희망을 주려면 당연히 성공적인 케이스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보여주지.

그녀의 장담이 섞인 말이 끝나자마자 눈 앞이 새햐얗게 변했다.

눈앞에 작은 소녀가 보였다.

머리는 하얬고 눈을 붉었다.

잔뜩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어린아이는 피의 귀족의 밑에서 일했다.

소녀는 강함을 열망했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서 노예신세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흡혈귀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서 태어났지만 어떻게든 정상에 서고 싶어했다.

그녀는 땅을 파면서도 틈틈히 무예를 수련했다.

자신의 몸 안에 깃든 피의 권능을 사용하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버렸다.

그렇게 50년이 지났을 때 소녀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귀족을 죽일 수 있었다.

자신의 주인을 죽인 소녀는 그 주인의 피를 취했다.

주인의 피를 통해 상위의 흡혈귀로 거듭난 그녀는 이제 그녀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었다.

'그냥 재능이 있는 거잖아.'

50년, 인간의 입장에선 긴 시간이지만 흡혈귀의 입장에선 마냥 긴 시간도 아니었다.

흡혈귀의 수명은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었으니까.

내 눈엔 단순히 재능을 통해서 최하위권을 벗어난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저런 재능이 없었다.

이런 내 생각을 착각이라고 말해 주려고 그러는 걸까?

이 다음에 그녀에게 닥쳐온 벽은 지금까지 그녀가 맞닥뜨린 그 어떤 벽보다 컸다.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찬란히 빛나는 소녀였다.

이세상의 모든 운이 그녀에게 돌아간 것 만큼 대단한 운을 타고난 소녀는 찬란한 재능마저 같이 타고났다.

화련이랑 비교하기도 애매했다.

흡혈귀와 소녀와의 격차는 나와 화련이의 격차만큼 컸으니까.

흡혈귀는 소녀를 따라다니면서 엄청난 절망을 경험했다.

자신의 평생을 수련한 것을 소녀는 너무나도 쉽게 해냈다.

소녀가 나아가는 한 발자국을 흡혈귀는 수개월을 노력해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녀는 절망했다.

따라갈 수 없는 격차에 멈춰서 제자리에서 울었다.

처량할 정도로 비참한 그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녀는 무려 100년간 방황했다.

아무리 올라가도 닿지 못할 산이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노력의 소녀 앞에서 의미 없어지라는 걸,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수렁에서 그녀를 꺼내준 건, 그녀에게 벽을 보여줬던 소녀였다.

지난 시간동안 멋지게 성장한 소녀는 흡혈귀를 잡고 이끌어 줬다.

무려 10년간 이루어진 소녀의 끊임없는 재촉에 흡혈귀는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뻔한 이야기였다.

흡혈귀는 수많은 흡혈귀를 복속시키고 경험을 쌓으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영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날 흡혈귀는 마침내 소녀의 옆에 바로 설 수 있었다.

'당신 이야기군요?'

­그래, 내 이야기야. 어때? 너와 화련이라는 아이의 재능 차이가 나랑 아... 소녀와의 차이보다 적다고 생각하는 데 말이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지 않겠어?

'가능은 할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 순간 태산처럼 거대했던 화련이의 크기가 작아졌다.

화련이의 크기가 작아진 와중에 다른 애들이 제대로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하연이, 월하, 수아는 순식간에 작아져서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당신 이야기는 너무나 특별한 이야기에요.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라고요. 그리고 당신한테는 막대한 시간이 있었잖아요.'

그녀가 소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건 소녀가 벽에 부딪혀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 스스로의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에 그녀가 소녀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물론 화련이도 지금 벽에 막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는 다르게 100년도 더 살 수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도와주지. 내 힘을 잘 사용할 수 있다면 너는 분명 유화련을 따라잡을 수 있어. 그리고 네가 강해진다는 데 주변 여자애들이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두겠니? 각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너를 도와 줄거야. 그 정도면 소녀의 도움을 받은 나만큼이나 좋은 조건 아니야? 적어도 시도는 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할 수 있을까?

내가 화련이를 따라잡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래 시발, 흡혈귀 씨도 소녀를 따라잡았잖아?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어.'

그리고 못하면 또 어때 그 과정에서 얻는 가치가 있을 텐데.

화련이의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태산만한 크기를 가지고 있던 화련이는 작고 작아져 나랑 비슷한 크기까지 줄어들었다.

­이건... 말도 완돼!

보스 몬스터의 절규가 들렸다.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어떻게 너 같은 약자가 저런 괴물을 따라잡는 걸 꿈꾸느냔 말이다! 너는 저 처자를 이길 수 없어! 영원히 그녀에게 보호당해야 한단 말이다!

그런말을 할거면 빨리 했었어야지.

흡혈귀가 나한테 자기 인생을 보여주기 전에 내 미래랍시고 열심히 노력하다가 결국 절망하고 애들의 꼭두각시가 된 모습 정도를 보여줬으면 충분히 혹했을 텐데 말이야.

"응, 아니야. 나도 화련이 따라잡을 수 있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라! 너 같은 약... 자가...

보스 몬스터의 소리가 점점 흐릿해 졌다.

주변에 있던 벽들이 우수수 무너지기 시작했다.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구조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괜히 그놈들과 협약을 맺어서는... 잠깐... 설마!

무언가를 조사하듯 잠시 끊긴 보스 몬스터의 소리는 이내 더 큰 목소리로 돌아와 크게 울렸다.

­망할 박쥐 년이! 이래서 이런 조건을 달았구나! 개 같으년! 내가 돌아가면 너를 가만두지 않으리...

말을 하던 중간에 보스 몬스터의 소리가 완전히 끊겼다.

게이트를 이루던 모든 구조물은 사라지고 환한 빛이 내 앞을 비췄다.

그렇게 다시 눈을 뜨니 나는 더 이상 뒤틀리지 않은 지하에 오롯이 서 있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면서 나온 막대한 마나 중 일부가 내 몸에 들어왔고 나는 드디어 각성이라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게 각성자의 시선인가...'

몸 안의 마나를 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마나의 움직임을 현수가 다룬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온전히 내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내 심장에 부근에 있는 마나 덩어리가 내 명령을 듣지 않고 멈춰서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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