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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화 〉 시련­1 (241/265)

〈 241화 〉 시련­1

* * *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읍!"

뭐라도 소리를 내기 위해 입을 열었거만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소리라고 취급하기도 애매한 억눌린 비명 뿐이었다.

"읍! 읍읍!"

소리를 지르기 위해 몇 번 더 입을 움직여 보니 내 입이 대충 어떻게 막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입 안에 무언가가 들어온 상태에서 테이프로 입을 막은 것 같은데 아무리 입을 뻐끌거리려 해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해야?"

그 때 화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인하고 탄탄한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딘가 넋이 나간 듯 맹한 목소리였지만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화련이가 맞았다.

"읍! 읍읍!"

멍청한 녀석들.

화련이를 나랑 같은 방법으로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어?

화련이는 입을 벌리는 힘 만으로도 충분히 테이프를 뜯을 수 있다.

"왠일로 말을 하는 거냐 아해야? 혹시 내가 기억 나기라도 한 건가?"

화련이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희열이 가득 차는 것을 듣고 나는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참 뒤의 미래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흡혈귀인 척 했던 용사에게 속아 현실로 꾸민 환상에 들어간 것 까지는 기억이 났는데 그 이후로는 뭔가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화련이의 애처롭고도 희열이 넘치는 목소리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시련을 버티지 못하고 정신줄을 완전히 놓아버린 후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더 지난 다음에야 내가 눈치를 챈 건 아닐까 하는 것 뿐이었다.

"읍! 읍읍!"

일단 몸 좀 풀어달라는 의미로 소리를 마구 질렀다.

눈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고 몸도 어딘가에 단단히 묶여있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외부인의 도움이 없으면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 조차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내 온 힘을 다해서 울부 짖었다.

"조... 조금만 기다려라 아해야... 히히."

화련이가 나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찌이익!

무언가가 떼어지는 소리와 함께 입이 자유를 되찾았다.

"우웁, 우웩!"

입안에 있던 무언가를 밖으로 내뱉고 나니 그제서야 편하게 호흡을 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아해야. 진짜로 내가 기억난 것이냐?"

"화련아...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 붙었다.

몸이 무언가에 단단히 쌓여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몸 전체가 얼어 붙는 것 처럼 추웠고 압도적으로 강력한 포식자의 앞에 선 것 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해한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 아해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가?"

화련이가 나한테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다고?

'대체 무슨 소리야.'

시간이 너무 지나서 자기가 뭘 했는지도 까먹은거야?

"아해는 내 이름은 커녕 내가 천마인것도 알지 못해... 나를 기억한다면 분명 1호라고 말해야 하는데..."

무언가가 내 입을 콱! 하고 잡았다.

"말해라.아해가 말하는 화련은 또 어떤년이냐!"

그녀가 내 입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그녀가 내 입을 강하게 흔들고 있음에도 몸은 무언가에 고정된 것 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너! 너를 말하는 거잖아!"

가뜩이나 코도 반쯤 막혀 있어서 숨도 쉬기 힘든 와중에 입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대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현 상황을 유추해서 탈출구를 모색하는 것 보다는 당장 이 자리를 빠져나고 싶다는 마음으로 말하니 그녀가 내 입을 풀어줬다.

­찌직

눈에서 무언가가 때어졌다.

드디어 자유를 찾은 시야에 보인 것은 쾡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세를 가지고 있는 화련이와 꽤 넓어보이는 검은 방이였다.

"... 진짜 아해가 맞나?"

"어, 나 맞아. 이수현."

­짜악!

"커헉!"

내가 내 이름을 말하자 마자 화련이가 내 뺨을 사납게 후려쳤다.

일격에 뇌가 흔들리고 입에서 피가 쏟아졌으며 앞뒤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격한 고통이 내 뇌를 지배했다.

"내가 그 번호도 모르는 썅년이 붙여준 이름 쓰지 말라고 했잖아!"

"미... 미안해, 화련아!"

일단 빌었다.

부슨 상황인지 알 수도 없는 와중에 고통에 굴복해서 빌었다.

화련이가 나의 뺨을 때린 것은 월하가 나에게 했던 것 플레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월하가 나를 괴롭힐 때는 그녀가 즐기고 있었지만 방금 화련이가 나를 때렸을 때 그녀는 분노하고 있었으니까.

웃고 있는 상대와 화내고 있는 상대.

어느쪽이 더 위험한지는 생각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한 번 만 더 그딴 이름 쓰면 장난으로 안끝난다. 알아들었나?"

"아... 알았어! 그러니까 그 손 내려놔아..."

몸이 겁을 먹고 있다 보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해는 아해다. 이름은 필요 없어... 어차피 나 밖에 부르지 않으니까."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져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아... 아해야. 미안하다. 내가 왜 아해를..."

그리고 곧 아까의 처량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

"히히, 아해가 말을 되찾아서 정말 다행이다. 진짜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화련이가 내 앞에서 계속 히죽거렸다.

내가 이곳에서 깨어난 지도 벌써 3일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이곳이 내가 살던 지구가 아니라는 것 이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과거에 가까운 곳이지만 화련이의 말을 통해 유추해 보면 내가 이수아의 세뇌의 여파를 잠재우지 못하다가 결국 화련이가 참지 못하고 폭발한 것 같았다.

어디부터 꼬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수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루시아한테 기억을 잃은 일 자체가 없던 일 취급 당하는 건 아닐까 의심됐다.

과거도 제대로 유추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나는 꽤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 온몸은 의자에테이프로 칭칭 감겨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눈과 입만 겨우 개방된 채 화련이가 가끔 가져다 주는 죽을 먹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 동안 화련이에게 밖으로 데려가 달라고 몇 번씩 말하고 싶었지만 그 때 마다 화련이가 굉장히 위험한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하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영원히 이렇게 묶여있을 순 없지.'

지난 3일 동안 화련이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그녀의 의심을 최대한 덜 받으면서 일단 테이프를 풀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화련아."

"왜 부르나 아해야."

처음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의심부터 하고 본 화련이었지만 마치 너와 내가 운명인 것 처럼 꿈에서 들었다고 하니 그 말을 바로 믿어버렸다.

"이 테이프, 왜 묶어 놓은 거야?"

화련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자신을 왜 묶었는지 묻는 순간부터 이미 탈출을 상정해두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그녀가 기분나빠하는 것도 이해는 됐다.

"묶어두지 않으면 아해가 떠나갈 것 같아서 묶었다."

상대를 묶어두지 않으면 떠나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자신한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걸까?

"나를 묶지 않아도 나는 도망갈 수 없어. 상대가 화련이 너잖아."

화련이가 아직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이때를 위해서 준비한 멘트가 있지.'

"나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테이프에게 속박되는 느낌을 받고 싶지 않아 몸이 자유로워도 화련이 너한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속박감을 느끼고 싶어."

미친 인간을 상대하기 위해선 나도 미친 인간이 되어야만 한다.

"나는 화련이 너한테 속박되고 싶어."

내가 말을 마치니 화련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입꼬리가 씰룩 씰룩 올라가는 것을 억지로 누르려는 것 같은데 잘 되지 않는지 자꾸 웃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 걸 원했다면 진작에 말하지 그랬나. 아해야."

화련이가 내몸에 칭칭 감겨져 있던 테이프를 떼어내주기 시작했다.

한 겹 한 겹, 테이프가 떼어질 때 마다 내 몸이 들어났다.

내 체형조차 들어나지 않을 정도로 테이프가 꽁꽁 쌓여있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일일이 풀어내니 테이프가 다 풀려지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으읍!"

테이프가 모두 떼어지니 모습을 들어낸 것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변한 나의 몸이었다.

손 목은 두 손가락으로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얇아졌고 나름 근육이 있는 몸이라고 생각했던 내 몸이 기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빼빼하게 말라있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테이프에 감싸져 있었는지 내부에는 땀이 가득 찼는데 그 땀이 삭아서 나는 이상한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스으으읍, 이게 아해의 냄새구나."

그 와중에 화련이는 이 지독한 냄새를 좋다고 흡입하고 있었으니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첫걸음은 땠어."

나는 내 몸을 일으켜 화련이에게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하려고 했다.

'어? 몸이 왜 그러지?'

시야가 밑으로 훅 꺾이더니 어느새 화련이의 발과 종아리 정도만이 내 시야를 채웠다.

적어도 몇개월간 테이프에 고정되어 있던 몸이 멀쩡히 움직일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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