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시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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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내 몸이 단기간에 회복될리가 없으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몸 상태를 회복하고자 했다.
화련이도 내가 자신을 상대로 도망 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간간히 운동도 하고 더 많은 음식을 바란다고 해도 제제하지 않았다.
절망적인 일이긴 하지만 내가 힘을 기른다고 해서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지금은 피의 마나도 없어.'
피의 마나 뿐인가. 애초에 각성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화련이가 손가락으로 눌러도 바로 제압될 정도로 약한 몸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화련이에게서 빠져나가겠어?
그러니 나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화련이가 아주 튼튼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쓸 수 없는 방법이었지만 지금 화련이의 모습을 보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며 갑자기 웃는다거나 내 사소한 일에 크게 반응하는 등 일반인이라면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것을 공략해야했다.
화련이의 정신을 완전히 뜯어고쳐서 나를 가두는 이 비상식적인일을 그만두게 만들든 아니면 그녀가 나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만들어서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상태로 만들든 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해야. 밥 먹을 시간이다."
화련이가 죽을 가지고 지하실로 들어왔다.
오래 떨어져 있다가밥먹을 시간이 돼서야 방으로 들어온 것 처럼 말하고 있지만 10분 전 까지만 해도 같은 방에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지러 나가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나와 같은 방에서 보냈고 그 때마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너는 안 먹어?"
"나는 아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그리고 내가 먹을 건 아해가 자고 있을 때 알아서 챙겨먹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화련이의 입가에 미소가 쭉하고 자리 잡았다.
"건강하게 먹고 다녀."
화련이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화련아, 나 우유먹고 싶은데..."
"무슨 우유를 먹고 싶나?"
"바나나 우유."
화련이가 잠깐 사라지더니 바나나 우유를 컵에 따라왔다.
'제품화된 우유를 보고 싶었는데...'
내가 지금 어딨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유같이 일반적으로 팩 같은데에 감싸져 있는 제품을 부탁하면 이곳이 한국인지 중국인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을 것 같았는데 컵에 담아줄줄은 몰랐다.
'확실하게 제품화돼서 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화련아 혹시 아이스크림 가져와 줄 수 있어?"
"기다려라."
화련이는 내가 이상한 일을 꾸미느라 필요한 게 아니라면 내가 필요한 그 모든 것을 지원해 줬다.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화련이가 폭주할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작은 물건들과 먹거리 정도만 겨우 부탁하긴 했지만.
"가져왔다."
화련이가 철저한건지, 아니면 나를 위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스크림도 그릇안에 담아왔다.
"이거 말고 빨아 먹는 아이스크림은 안돼?"
처량한 표정을 짓고 화련이를 올려다 보자 그녀가 나와 비슷한 처량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사라져 빨아먹는 아이스크림, 통칭 쭈쭈바라고 불리는 것을 가져왔다.
'중국이구나.'
한국에 있는 것 보다는 상황이 훨씬 안 좋다.
막말로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니까.
희망적인 내용도 조금 있었다.
화련이가 중국에 나를 데려옴으로서 하연이나 월하와의 관계를 차단했다면 그녀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고마워."
배시시 웃으면서 화련이를 바라보니 그녀의 눈가에 맺혀있던 일말의 의심조차 쉽게 풀어졌다.
화련이를 속이기 위해서 내 표정을 조작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기분이 나빴지만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화련이의 신뢰를 얻어야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빌드업을 쌓아야 한다.
처음엔 작은 것 부터 부탁하기 시작해서 점점 그 수준을 늘리고 나는 완벽하게 화련이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 뒤 밖으로 나가면 된다.
천천히, 절대 조급해져서는 안된다.
"화련아. 너는 내가 의심스러워?"
최대한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 질문이 진지한 질문이라고 생각되지 않도록.
화련이가 진짜로 내가 의심스러워서 나를 가두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도록 최대한 연기했다.
"내가 아해를 왜 의심하겠나. 나에 대한 아해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무겁지 않은가."
'그런데 나를 왜 여기에 가뒀어?'
이렇게 시작하면 화련이는 바로 폭발하겠지.
"그러면, 나를 얼마만큼 믿어?"
화련이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다면 그녀도 나를 의심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밝은 웃음을 띄고 있다보니 그녀역시 나를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믿을 수 있다."
'거짓말.'
화련이 스스로는 그렇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절대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절대로 화련이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 밖으로 내보내달라그러면 엄청 화를 내겠지.
"진짜로?"
하지만 내 속내를 바로 들어내면 안된다.
"그러면 나 샤워실 좀 데려다 줄 수 있어?"
"응?"
시작부터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하는 것은 리스크가 아주 큰 행동이다.
화련이는 폭주할 거고 한 번 더 폭주한 화련이는 나를 믿지 못하고 이전처럼 나를 꽁꽁 싸매게 될 수도 있으니까.
"오래 못 씻어서 몸이 많이 찝찝해서 그래, 사람이 없는 샤워실에서 혼자 씻을 수 있을까? 어차피 화련이 너한테서 탈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씻지 못해서 불편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목욕을 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순순히 몸이 찝찝해서 샤워를 하고 싶다 말했다.
"알았다. 장소를 마련해 보지."
화련이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안된다고 하면 어떻게 전략을 새워야 할지 감도 못잡을 뻔 했는데 첫 단추가 잘 끼워진 것 같네.
"당장 씻고 싶어?"
"조금 정도는 기다려도 돼."
"하루만 기다려 주리 부탁한다. 준비가 필요한 일이니."
"알았어."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될 줄 알았다.
"미안하다. 아해야. 목욕 건은 없는 걸로 해야 할 것 같다."
"알았어. 네가 힘들다면 어쩔 수 없는거지."
굉장히 큰 출혈이었다.
단순히 목욕을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목욕같이 가벼운 걸로 시작을 해야 나중에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는 것까지 연결을 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생기는 건데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씻는 것 조차 허가해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뭐가 가능하겠어.
축 늘어져서 구석에 앉아있으니 화련이가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일단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었지만 내가 시무룩한 게 싫으면 그냥 해 주면 되지 왜 깐깐하게 목욕도 못하게 하는 걸까.
"진짜 미안하다. 아해가 있는 곳 주변에 사람을 부를 수가 없어서 그렇다."
"... 주변에 사람이 없어?"
최대한 목에 힘을 빼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것 처럼 말했다.
"그렇다. 이곳으로부터 반경 100km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목에서 부터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뭐? 100km?'
적당한 주택의 지하에 나를 가둔 줄 알았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에 가뒀다고?
"괜히 아해를 노리는 질나쁜 인간이 있을 수가 있다. 그들에게서 아해를 지키기 위해서는 아해를 격리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이유로 목욕탕을 만드는 정도의 대공사가 일어나는 곳 옆에 아해를 둘 수도 없다."
화련이의 표정은 아주 완강했다.
일말의 양보도 해줄 수 없다는 듯 억센 눈빛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제서야 화련이 얘가 얼마나 비틀어 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녕 빛은 없는가?'
"화련이가 옆에 있는데 질 나쁜 인간들이 나를 어떻게 노려?"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사람들의 시선까지 막을 수는 없다. 아해에게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도 아해의 가치가 훼손되고 상처를 입을 텐데 어떻게 사람을 이 근처에 들이겠나."
'미친년.'
화련이는 내 상상 이상으로 미쳐 있었다.
'나, 빠져나갈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할 수록 희망만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