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3화 〉 시련­3 (243/265)

〈 243화 〉 시련­3

* * *

화련이는 미쳤다.

일단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하고 갈 필요가 있었다.

사람이 바라보는 걸로 가치가 훼손된다는 말을 하는 인간을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가치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소름이 돋는 말인 것이 그녀가 나를 일종의 소유물로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명심하자, 화련이는 미친년이다.

미친년을 상대하기 위해선 미친놈이 되어선 안된다.

아주 똑똑해야만 한다.

화련이는 미친 데다가 강하기까지 하니까.

억지로 희망감을 끌어올렸다.

그녀에게서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 할 것이 뻔했지만 어떻게든 행복회로를 돌렸다.

"아해야. 갑자기 왜 그렇게 보느냐?"

"그냥, 슬퍼서."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비 맞은 강아지 처럼 내가 불쌍해 보이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뭐가 그리 슬픈가?"

"나는 화련이가 내 여친이라는 걸 다른 사람한테 자랑하고 싶었거든.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우니까."

절대로 화련이의 심성을 건들여서는 안된다.

폭주하는 차를 멈추기 위해서는 천천히 속도를 줄여야지 앞에 벽을 세워서 막으려고 했다간 벽도 망가지고 차도 망가질 것이다.

"큼큼, 내가 그렇게 좋나?"

"당연하지."

화련이의 입꼬리가 하늘을 뚫을 것 처럼 올라갔다.

"화련이랑 데이트도 하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싶고 경치 좋은 곳도 구경하러 가고 싶어."

하나하나 따져보면 밖에 나가고 싶다는 말이었지만 모든 것이 전부 화련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좋다는 느낌으로 꾸몄다. 아무리 화련이가 광기에 젖어있다고 해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있고 싶다고 하는 데 기분이 나빠할리는 없지.

"헤헤헤."

그 증거로 화련이가 애 처럼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맑고 해맑아서 평소에 봤다면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지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나라는 걸 완전히 숨길 수 있을까? 그러면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을 거 아니야."

나도 최대한 해맑게 말했다.

꿍꿍이 하나 없다는 듯 말하니 화련이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나중에 가서 안된다고 할 확률이 상당히 높았지만 당장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 자체는 꽤 큰 호재였다.

"고민을 좀 해보겠다... 아해를 꽁꽁싸매고 간다면...나쁘지 않을 지도 모르겠군. 내가 옆에 붙어있으면 그 누구도 아해를 건드릴 수 없을테니까."

화련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만약 이 세상에 화련이보다 강한 사람이 존재했다면 그 사람에게서 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밖으로 내보내주지 않겠지.

그나마 화련이의 무력이 아주 강해서 다른 사람의 시야만 막는다면 일단 데리고 나갈 수는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다.

"일단은 여기에 있어라."

자기는 어디 갔다올 것 처럼 말한 화련이었지만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나랑 같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계속 히죽 거리면서 나를 계속 바라봤다.

****

"후우... 후우..."

화련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누가 보면 격한 운동이라도 한 것 처럼 보이겠지만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5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안하고 숨을 거칠게 쉬고만있었다.

그녀가 긴장과 걱정을 완전히 풀 때까지 나는 가만히 있었다.

"꼭 나가야만 하는 거냐?"

화련이가 처량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속에서 어떤 분노와 불만을 찾을 수 없었기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 안된다는 이유로 내 온 몸은 꽁꽁싸매져 있었고 그 누구도 내 목소리를 들어선 안된다는 이유로 내 입은 꽉 막혀 있었으니까.

거기에 더해 다른 사람이 내 체형을 완전히 유추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로키까지소폭 줄여놨으니 이 정도면 걱정이 되는 게 더 이상한 정도였는데 그녀는 이런 상황으로도 나가는 게 싫은지 5시간 째 숨만 격하게 쉬고 있던 것이다.

'어차피 사람도 없는 장소잖아.'

아직 방에 나를 가둔 상태로 이 근처에 사람도 데려오지 않았는데 사람이 많은 곳에 나를 데리고 간다는 건 아무래도 무리한 부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산지에 가서 산책이나 한 번 하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걱정반 설렘 반으로 들떠 있던 화련이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완전히 긴장해서 저러고 있는 것이었다.

"알았다."

화련이가 결단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았다.

한 번 눈앞이 반짝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혹시나 사람을 볼 수도 있고 눈 하나도 밖으로 빠져나가선 안된다는 화련이의 말 때문에 내 눈까지 완전히 막혀 있던 것이다.

눈앞이 반짝인 것을 제외하면 나는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있는 그 어떤 기회도 없었다.

몸이 꽁꽁싸매져 있었기 때문에 공기가 달라진것도 느낄 수가없었다.

발에 감긴 천이 너무 두꺼워서 발에 닿는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후우... 후우..."

그나마 제대로 이동했다는 걸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화련이의 빨라진 호흡덕분이었다.

"천천히, 한번 움직여 보거라."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채이는 흙의 감촉은 느낄 수 없었지만 밟는 부분에 따라 미묘하게 경사가 변한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여기는 지하실이 아니다.

분명히 밖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이제 화련이한테 만족감을 줘야해.'

그녀의 걱정과 긴장을 뚫고 겨우 여기까지 왔다.

그녀한테 밖으로 나올 메리트를 주지 않는다면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할 지도 몰랐다.

온 몸이 꽁공싸인 채 입 까지 막힌 내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녀가 나를 이끄는 감각에 모든 것을 맡긴채 그녀에게 기대 걷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게도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나를 데리고 움직이는 것을 즐기는 것 처럼 보였다.

앞을 못 보는 인간을 보조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기쁜지 모르겠지만 긴장한 듯 떨리는 숨소리에서 웃음소리가 살짝 섞여있는 걸 보면 그녀는 분명히 즐기고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나오는 것도 괜찮겠구나. 매일 같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있는 것 보다는 색 다른 길을 함께 걷는 것이 더 좋을 테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이 워낙 두껍다 보니 화련이한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시력이 매우 좋았으니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것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지.

"이렇게 10분만 더 걷다 가자꾸나."

10분.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막 짧은 시간은 아니었다.

10분이 20분이 되는 건 금방이고 20분이 30분이 되는 것도 금방이었다.

'이렇게 천천히 바꿔나가면 돼.'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음에 나올 때는 눈을 풀어달라고 하자.

화련이를 보고 싶어서 눈을 풀어달라고 하는 건 이해해 줄거다.

그것도 안된다면 내가 화련이한테 전달할 수 있는 신호를 만들자고 하자.

아무것도 안하고 걷는 것 보다는 화련이랑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게 좋을테니까.

"10분 지났다. 아해야."

화련이가 나를 잡았다.

눈앞이 한 번 깜빡이니 나는 지하실로 돌아와있었다.

경사진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지하실로 왔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스르르륵

내 몸을 꽁꽁 묶고 있던 천이 천천히 풀려나갔다.

"아해야. 어땠느냐?"

화련이의 몸은 땀으로 범벆이 되어 있었다.

세계관 최강자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만큼 어지간한 운동으로는 지치지도 않는 화련이었는데 10분간 나랑 산책을 한 것 만으로도 저렇게 까지 몸이 젖은 것이다.

"좋았어. 진짜진짜."

화련이의 품안에 꼭 안겼다.

내가 지금까지 그녀의 신경을 안건드리려고 노력하면서도 그녀에게 먼저 스킨십을 하는 것을 지양한 이유가 이것때문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보상을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히히... 나도 좋았다."

화련이가 나를 꼭 안았다.

진짜로 첫 단추를 땠다.

화련이 스스로도 즐긴 모양이니 이제 상황만 잘 조절하면 천천히 제한이 사그러 들거다.

그 모든 과정을 절대로 조급하게 진행해서는 안된다.

철저하게 화련이가 좋아서 하는 거라고 착각하게 해야하며 내 생각은 아예 들어가서는 안된다.

힘든 길이겠지만 이 길을 끊낼 수 있어야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지.

나는 화련이를 좋아하지만 이 세계의 화련이까지 좋아해주긴 힘들었다.

빨리 이곳을 탈출해서 원래 세계의 화련이를 보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화련이는 나를 보고 맑게 웃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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