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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4화 〉 시련­4 (244/265)

〈 244화 〉 시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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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적극적으로 화련이의 움직임을 제어하려고 하자 화련이는 천천히 변해갔다.

둘이서만 있을 때는 나를 묶어둘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무도 없는 곳에 한정되긴 했지만 나를 데리고 밖으로 종종 나가기도 했다.

그와 동시에 화련이한테 밥 먹으로 계속 말하다보니 피폐하게 상접해 있던 화련이의 얼굴도 살이 붙어서 이전의 아름다움을 회복했고 나 또한 움직임이 많아져 뼈만 남았던 몸에서 점점 살과 근육이 붙어가고 있었다.

아직 탈출할 수 있는 각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 되었다는 것 만큼은 분명했다.

'다른애들은 죽었으려나.'

저렇게 까지 나를 감싸고 있는 걸 보면 그녀가 폭주했을 당시에 내 근처에 있던 하연이랑 월하가 살아남았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연하는 잘 모르겠다.

내가 루시아에게 세뇌당하지 않았다면 그녀와 제대로 된 접점이 마련됐을 가능성은 낮았으니까.

"밥먹어라 아해야."

그렇게 평범한 나날들이 계속해서 지나갔다.

'내 힘으로 이곳을 탈출해야 하는건가.'

처음에는 흡혈귀가 나를 구해줄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게 아닐지 생각했다.

용사가 나를 한 번 속이긴 했지만 이곳에 들어오기 전 흡혈귀가 자신의 세력을 데리고 용사측에 공격을 가하기로 약속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전국의 모든 각성자들을 한 군데에 끌고 온 것을 그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을리가 없었기에, 버티기만 해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로 거진 한 달 째 이곳에 갇혀 있었다.

기다리는 것 만으로는 이곳을 탈출 할 수 없다.

화련이를 갱생시키는 것이 시련이 끝나는 조건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나는 공허한 내 의식 속을 바라봤다.

현수가 없다는 것은 이 육체가 내 진짜 육체가 아니라는 뜻.

그렇다고 육체의 현상을 하고 있는 정신도 아닐것이다.

어쩌면 다른 세계의 나에게 그저 빙의만 한 걸지도 모르지.

그렇다는 건 현실을 직시하고 자살 하는 것이 시련을 클리어하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용사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그런 매니악한 조건으로 시련을 클리어 하게 만들었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외출하자꾸나 아해야."

자살은 최후의 최후까지 미뤘다.

이제는 화련이가 먼저 외출을 하자고 보챌 정도니 당장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으니까.

죽음이 정답이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는데 다짜고짜 자살하는 것은 도박이나 다름 없었다.

"오늘은 몸을 좀 풀어주겠다. 바깥공기를 쐬고 싶어하지 않았느냐. 외부에서는 절대 볼 수 없으면서도 바람 정도는 통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왔다."

화련이가 천천히 개선되고 있었다.

저번보다 훨씬 느슨하게 감긴 천의 감촉을 느끼며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시원하다.'

밖으로 나오자 마자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화련이가 나를 위해서 만든 지하실은 보온이 아주 잘 되어 있는 건지 늘 따뜻한 정도의 온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화련이를 따라서 나온 곳은 아주 시원했다.

이전보다 덜 싸맸다는 거지 아예 싸매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기가 제대로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당히 상쾌했다.

'이런 것에 기쁨을 느끼다니... 나도 갈 때까지 갔네.'

두꺼운 패딩을 입은 것 보다 심하게 몸을 감싸고 있는 데 그 안으로 들어온 한 줄기의 바람만으로 이렇게 즐거워해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어떠냐 아해야."

"진짜 좋아. 고마워 화련아."

이런 기분을 화련이 한테 들어낼 수는 없었다.

화련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조련할 수는 없다.

못했을 때 부정적인 반으을 보이는 것 보다는 잘했을 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서 그녀가 나에게 더 잘하게 만들어야 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런데 나올 때는 아해를 꽁꽁 싸맬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주변에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내가 바로 알아차리고 그 놈을 죽여버릴 수 있으니까. 아해의 전신을 보면서 같이 산책을 하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한 것이 없었다.

산책을 나가자고 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저 그녀가 조금씩 개선되려는 모습을 보일 때 마다 과하게 기뻐하며 그녀를 띄워졌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렇게 까지 변했다.

'됐어. 희망이 보인다.'

"이제 슬슬 돌아가자꾸나."

"알았어."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입도 안 막아놨네.

"오늘 산책은 어땠느냐 아해야?"

"진짜 좋았어."

내 몸을 풀어주는 화련이를 보면서 웃으니 그녀도 나를 보고 같이 따라 웃었다.

한 번 내 몸을 풀어주기 시작한 화련이는 빠른 속도로 변했다.

그녀의 주변 반경 100m정도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녀가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내 복장은 점점 더 가벼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눈을 열고 외부의 풍경을 볼 수 있었고 거기서 또 얼마 지나지 않아 평상복을 입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제 화련이에게 기대지 않고 밖을 활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도망 칠 수는 없지만.'

나는 아직도 화련이가 나를 때렸던 날을 기억한다.

단순히 내 이름을 언급 한 것 만으로도 나를 팼는데 그녀에게서 도망치려고 한다면 어떤 위험이 나에게 닥쳐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기회라고 느끼는 순간 훨씬 더 조심해야해.'

내 부탁없이도 스스로 개선점을 보이고 있는 만큼 화련이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먼저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만으로도 이 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화련아."

잊지 말아야 할 원칙.

잘했을 때는 칭찬을 해줄 것.

"아해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나?"

갑작스럽게 치고들어온 질문에 머리가 빳빳하게 굳었다.

'무슨 의미지?'

함정 질문인가 진정으로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인가.

그녀가 나를 다른 사람에게 만나게 하는 것을 고민하고 싶어서 묻는 것인지 아니면 나한테 다른 사람 필요 없이 자신만 있으면 된다는 확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딱히 만나고 싶지는 않아."

일단 부드러운 말투로 부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가 내 예상이 틀리게 되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것이 뻔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련이 너를 자랑하고 싶어.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하고 말이야."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화련이가 '역시 아해는 나만 있으면 괜찮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던 나를 풀어줄 생각을 완전히 없앨지도 몰랐으니까.

늘 쓰던 방법을 활용했다.

주장의 근거에 화련이를 두는 것.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건 진짜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화련이 네가 자랑스러워서 그런것이다.

이런 식으로 말하니 화련이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굳이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괜찮아."

"... 고민을 좀 해보겠다."

화련이가 이쪽 이야기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그녀도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과시욕이 올라왔다고도 해석할 수 있었다.

내가 밖으로나가고 싶다고 했으면 나를 위해서 고민한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지만 나는 일단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못을 박아둔 상태였으니까.

'좋아. 진짜로 나아지고 있어.'

시련을 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천천히 일을 진행해 보도록 하지. 아해가 처음에 말했던 목욕탕, 한 번 만들어 보도록 하겠다."

"진짜?"

"대신 아해는 공사 중에는 온 몸을 꽁꽁싸매고 있어야만 한다. 업자가 절대로 아해가 있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지 않게 막을 것이고 시공이 끝나고 난 다음엔 목욕탕을 완전히 청소하여 그 업자의 흔적조차 남지 않게 할 것이다. 그리고 업자는 죽이고 몸을 완전히 소멸시켜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할 것이다."

목욕탕 하나 만드는 것으로 사람 하나를 살인멸구한다는 무서운 계획을 말하고 있는 화련이었지만 나는 업자에게 측은함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당장 내가 지옥에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고통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 불쌍해 하겠는가.

사람 한 명의 희생으로 내가 생활 할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면 오히려 싼 값이라고 봐도 되겠지.

애초에 이 세계는 내가 사는 세계도 아니었으니까.

"고마워. 진짜 고마워 화련아."

이곳에서 오래 살다보니 말투도 많이 변했다.

나는 화련이 앞에서 철저한 을이었고 조금이라도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괜히 불안감에 떨어야 했기 때문에 이제는 애교가 살짝 섞인 간드러지는 목소리 정도는 숨도 안 쉬고 여유롭게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본다면 남자가 여자한테 뭐하는 짓이냐고 나를 한심하게 보겠지만 그 상대가 화련이라면 누구도 인정해 주겠지.

"고마워 할 것 없다. 오히려 너무 늦게 해준 것이 아닌가 미안하군."

그렇게 내 삼은 천천히 더 나아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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