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 시련5
* * *
"으어어어."
입에서 저절로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디가 아프거나 한 건 아니었다.
단순히 따뜻한 물이 내 몸을 감싸는 것 만으로도 기쁨에겨워 몸이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따뜻한 물이 내 몸을 마구 흐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해서 흐르는 물로는 정리할 수 없는 묵은 때를 손으로 몸을 빡빡밀어 닦았다.
몸을 씻을 수 있는 비누나 타올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한 사람이 만든 시설의 완벽한 안전을 확인하기도 힘든 와중에 비누나 타올같이 대량 생산하는 물건의 안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누와 타올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기분 좋나?"
"어. 살 것 같아."
안타깝다면 상당히 안타까운 일인 게 나 혼자서 이곳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지하실과는 다르게 이곳의 물은 일단 근처의 지하수를 끌어다 쓰는 것이어어서 내가 이상한 짓을 잘하면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이유로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
비단 내가 빠져나갈 뿐만 아니라 이곳으로 유입되는 물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녀가 나서서 빠르게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나는 오히려 화련이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좋다며 그녀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옷도 벗지 않은 채 흐르는 물을 맞으며 씻는 상황에 이르렀다.
되도록이며 수영복 정도는 입고 씻고 싶었지만 화련이가 새로 옷을 사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옷도 안 갈아 입고 씻을 수 밖에 없었다.
옷을 벗고 씻어도 되지 않냐고?
어차피 모든 것을 화련이한테 의존하는 상태인데 몸 보이는 게 뭐가 부끄럽다고 안 벗냐고?
화련이가 나한테 특별하게 충고해줬다.
내가 옷을 벗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알아서 잘 대처하라고.
흥분한 미친년은 제어가 완전히 불가능했기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옷을 입고 씻었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뒤 업자의 죽음으로 만들어진 탕에 몸을 집어 넣으니 순식간에 몸이 노곤노곤하게 풀어졌다.
지하실은 아무리 온도가 높아도 지하실 특유의 칙칙함이 있어서 기분이 나빴는데 탕 안에 들어오니 주변의 뷰가 그리 좋지는 않더라도 몸이 편하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나도 들어가겠다."
화련이가 수영복을 입고 탕 안으로 들어왔다.
내 몸에 닿는 남이 만든 물건은 내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면서 절대 들여놓지를 않는데 왜 화련이가 입는 옷에는 아무런 제재가 없는 지 의문이다.
절대로 화련이의 젖은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억울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해야, 다음에 외출할때는 다른 곳을 한 번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떤가?"
"다른곳?"
"그렇다. 아해도 늘 산만 구경하는 건 슬슬 질리지 않나."
아주 좋은 신호였다.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더 나은 삶으로 개선해줄 의지를 보이다니.
처음에는 천천히 먼저 제안을 해왔는데 요즘 들어서 점점 그 속도가 가속이 되었다.
이대로 있다보면 몇개월 안에 외부에서 만들어진 물건을 사용할 수 있게 될 수도 있었다.
"나를 위해서 그런말을 해주는 거야? 고마워."
일단 칭찬부터 박자.
"나는 화련이 네가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아. 네가 옆에 있다면 어디든 상관 없긴 하지만 네가 더 즐길 수 있는 곳이라면 나도 더 좋을 것 같아."
이제는 익숙해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웃자 화련이도 따라서 웃었다.
"다음에는 계곡에 가보자꾸나."
"계곡?"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였다.
산이나 숲은 통제가 잘 되는 곳이다.
동물이나 벌레같은 건 화련이가 죽여버리면 되고 그곳에서 닥칠 수 있는 위험이라고 해봤자 산에서 구르는 것 정도 밖에 없는 데 그것은 화련이의 반사신경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을 뿐더러 그녀가 내 몸에 꼭 붙어있기 때문에 넘어지고 싶어도 못 넘어졌다.
그런데 계곡은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계곡이라면 강, 내지는 천이 흐르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곳에 들어가서 한 번 삐끗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내 몸에 남이 만든 옷도 못 입히겠다고 말하는 화련이가 데리고 갈 만한 장소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계곡의 물에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서 생긴 화학적인 무언가 보다 건강에 나쁠 수도 있는 물질들이 많이 들어있을 테니까.
일반적인 사람에겐 거의 해를 끼치지 않는 물질들이겠지만 상대가 화련이니까.
"물론 물 속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물에 대한 안전도 확신할 수가 없고 실수로라도 아해의 코에 물이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내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테니."
"밖에서 구경한 한다는 거지?"
"그렇다."
방금 화련이의 이야기를 듣고 한가지 위험한 생각이 떠올랐다.
화련이가 나를 지키려 드는 이유는 나를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화련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강해지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화련이도 나에대한 과보호를 줄이지 않을까?
"내가 약하니까 네가 고생이 많네."
이번에도 역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철저하게 화련이를 위하는 척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약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간절한 눈빛을 하고 화련이를 바라보자 화련이가 당황한듯 눈을 떨었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고생하는 게 싫어."
"괜찮다. 아해를 위해서 하는 고생은 고생이 아니라 기쁨이다."
"네가 나를 위해 고생할 때 서로 좋은 일을 하면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간을 봤다.
화련이가 조금이라도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한참 뒤로 미룰 생각이었지만 화련이의 표정에서 약하긴 하지만 대견하다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좋아.'
"화련아.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아해를 말이냐?"
"어. 내가 강해지면 네가 나를 위해 고생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잖아."
화련이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한테 제한되어 있는 환경에서 너한테 배우면 나한테 위험이 닥쳐올 일도 없잖아."
화련이가 아직도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자 쐐기를 박았다.
고민하고 있는 화련이를 건드는 것은 위험 요소를 증가 시키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도박수를 걸 때라고 판단했다.
"설마 내가 강해지면 너한테서 탈출할거라고 생각해서 그래? 나는 너한테서 도망갈 생각이 없어."
평소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망갈 생각이 없다는 말은 곧 도망갈 생각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도박수를 던진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강함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평소엔 금기시되는 말을 꺼내면서 눈을 빛낸다면 그녀도 내가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밀어주지 않았다.
"... 알겠다. 아해를 위해서 교육과정을 준비해 주지... 하지만 추천하지는 않는다. 내가 거의 모든 위험을 배재해 놓긴 할 것이지만 힘을 기르기 위한 수련은 필연적으로 위험과 고통을 동반한다."
"괜찮아."
"내가 안 괜찮다."
화련이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아해가 훈련의 힘듦탓에 혹여나 나를 미워하게 될 까봐 너무나도 두렵다. 아해가 고통따위에 굴복할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너무나 걱정이 된다."
"걱정하지마. 내가 화련이를 싫어하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내가 화련이를 걱정한다는 감정을 가득 담아서 말하니 화련이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일주일 안에 수련을 진행할 수 있게 준비해 두겠다. 지하실 정도의 크기로는 어림도 없으니 사람을 불러서 새 공간을 만들어야 겠군."
화련이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체감이 확 됐다.
이전이었다면 공간이 없어서 안된다고 할 일은 벌써부터 사람을 부를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제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지하에 새로운 시설을 만드는 것은 반대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천천히 바꿔가니까 되잖아.'
이건 아마 화련이가 실제로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허구한날 화련이를 미친년이라고 취급하고 있긴 하지만 화련이는 본질적으로 강한 사람이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그녀를 정상으로 돌려놓으려고 하니 느린 속도로라도 정상의 영역에 돌아올 수 있는 거겠지.
지금의 화련이라고 해서 나와 신혼집에서 알콩달콩 살며 만인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상상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약하다는 이유로 피해왔을 뿐 그 환상적인 길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변할 수 밖에 없겠지.
나는 경계심을 차근차근 누그러뜨려 가며 그녀를 치료하면 되는 일이다.
화련이가 지하에 수련장이라는 이름으로 큰 공터를 만든 것은 내가 그녀에게 처음 부탁을 하고 3일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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