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 대삼림 탐색1
* * *
"...자살이요?"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죽지도 못하는 곳에서 최강자로서 저렇게 살아왔으면 죽고 싶을 법도 하지.
"자살이 목표면 그냥 넘어오게 두고 죽게 내버려 두면 되는 거 아니에요? 죽기 전에 장소를 빌려드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아아...
흡혈귀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용사 혼자 넘어가서 깔끔하게 자기 목숨만 날릴 수 있다면 우리도 용사를 도와줬겠지. 그런데 너희 세계로 넘어간다고 해서 용사가 죽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 너희세계에서도 죽지 못한다는 걸 깨달으면 적어도 수천년은 폭주해서 날뛸 거야. 우리는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너희 세계는 완전히 박살이 나버리겠지.
흡혈귀의 말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럴수도 있구나.'
만약 죽을 수 있다고 해도 문제야. 용사의 육체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을 스스로에게 가하면 주변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텐데 그 정도 영향력을 받은 너희 세계가 무사할지도 문제지.
'그러게요.'
만약 용사가 안정적으로 혼자 잘 죽는 다고 해도 한 번 열린 차원간의 연결이 어떻게 흘러갈 지 아무도 알지 못해. 단순히 연결이 유지되어 있는 선에서 그친다고 해도 그렇게 연결된 곳을 향해서 수많은 존재들이 너희 세계로 넘어가겠지. 어떤 애들은 용사처럼 깔끔하게 자살하려고 넘어가겠지만 어떤 애들은 새로운 자극을 찾는다면서 난리를 피울 확률이 아주아주 높아, 적어도 절반 이상의 이들이 그렇게 활동할 거라고 확답할 수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네요...'
진짜 딱 죽기만 할 수 있다면 그냥 용사만 죽고 끝낼 수 있을 텐데...
'근데 괜찮겠어요? 용사가 엄청 화난 것 같던데요.'
그 년이 아무리 화났어도 할 수 있는 일에는 제한이 있어. 이번에 간섭력을 많이 써서 너희 세계에 지랄을 할수도 없을 거고 어차피 우리를 죽이지도 못하니까 속으로 화만 삭히고 있을 거야. 어쩌면 오랜만에 제대로 된 분노를 느껴서 행복을 느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 둘은 친한 친구였잖아요? 친구의 꿈을 눈 앞에서 막아버린 셈이 됐는데... 괜찮으세요?'
내 말에 흡혈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용사랑 친구가 아니야. 아주 오래전에 친구였던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친구도, 적도 아니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사용해서 시간을 버티는 건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일이야. 내가 용사를 막는 건 걔가 죽기 싫었으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너희 세계가 영향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그런 것 뿐이라고.
나는 용사가 죽는 게 싫냐고 물어본 적 없는 데 저렇게 세세하게 말하는 것 보면 흡혈귀도 아직 용사에게 마음의 앙금이 남아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튼, 용사가 우리 쪽에 이렇게 건너와서 너희 세계까지 침투하려고 했으니 한동안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거야. 간섭력이 공짜로 주어지는 건 아니니까 못해도 몇달간은 안전할 수 있겠지.
'그 몇달간 도대체 무슨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까요?'
어지간히 많이 준비한다고 해도 저쪽 세계의 침공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적들도 머리가 있는 존재다 보니 우리가 대처하면 그들도 우리에게 대처해서 반응할테고 기본적인 역량 자체를 강화하자니 짧은 시간동안 올릴 수 있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었다.
글쎄... 너희 세계의 비밀을 탐구해 보는 건 어때? 우리세계에서 긴 시간동안 살아보니까 알겠더라. 우리 세계에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아주 많이 있었어, 너희 세계와 우리세계의연결을 끊는 연구도 그렇게 진행하고 있으니까 너희도 한 번 살펴보는 건 어때?
자연스럽게 화련이에게 고개가 돌아갔다.
눈치 빠르네 다른 사람은 캐치하지 못하는 것도 쟤라면 캐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너한테는 말을 할 수 있어도 쟤한테는 말 못하니까 네가 얘기 좀 전해줘.
'알았어요.'
그러면 이만 가 본다. 나도 간섭력을 많이 사용해서 요양을 좀 해야할 것 같거든.
용사 뒤를 따라오던 흡혈귀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
그 때도 곧 죽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 데 지금은 더 심각한 상황 아닐까?
어쩌면 용사에게 공격을 당하면서 저렇게 평온한 표정을 지은 걸 지도 모른다.
"천마야, 너는 우리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냐?"
"흡혈귀가 그랬거든, 몇 개월 전까지는 새로운 침공이 없을 테니 대비를 해 놓고 있으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비는 우리 세계에 대해서 더 알아가는 거라더라."
화련이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너희와 비슷하게 알 것이다. 태양계의 3번째 행성... 이 정도만 알고 있지. 아해의 말 대로 우리 세계에 대한 탐사를 진행해 볼 가치가 없지는 않을 것 같군. 게이트가 나타난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을 테니까."
"두 분이서 탐사하실 거에요?"
월하가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하지 않아야 겠나. 다른 이들은 할 게 많지 않나."
화련이가 덤덤히 말하자 월하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앞으로 특이점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저도 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어차피 조직을 운영하는 건 밑 사람들이지 제가 아니니까요."
그리 말하는 월하의 눈에는 절대로 화련이를 혼자서 내 옆에 붙여놓지 않겠다는 듯한 강렬한 의지가 엿 보였다.
"저도, 당장특이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할 일이 없어요!"
연하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리고 이것저것 조사 하려면 저 같은 정보계열 각성자의 능력이 꼭 필요할걸요?"
"저도..."
하연이가 굉장히 소심하게 손을 들었다.
"다 가면 나도 가고 싶어요!"
리우잉까지 손을 들자 화련이가 인자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알았다. 다 같이 돌아다녀보지. 몇개월 정도의 시간이 있다고 했었나? 나도 게이트를 한 번 만들어 본 적이 있으니 어쩌면 저쪽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오는 길을 막는 기술을 만들 수 있을지 모른다."
흡혈귀쪽들이 많이 연구를 하고 있다던데 그 결과를 들을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시작하는 것 보다는 지금까지 연구해온 저쪽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시작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바쁘니까.'
"그런데 어디부터 가야해요?"
리우잉의 말에 다 같이 입을 다물었다.
진짜 어디로 가야하지?
"지구의 중심?"
"지구의 핵까지 가겠다는 소리는 아니시죠?"
화련이가 곰곰히 턱을 매만졌다.
"한 가지 생각 나는 곳이 있다."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말해주시면 얼마나 좋을 까요."
월하의 비꼼에도 화련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몬스터 들이 마치 다른 세계인 것 처럼 잘 살아가는 곳이 하나 있지 않나."
"대삼림을 말하시는 거에요?"
화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마목이 많이 박혀 있는 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마목을 크게 치지 않아도 외부로 마목이 퍼져 나가는 일이 잘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런 곳들에는 무언가 차이점이 있을 것 같지 않나? 어차피 어디로 향해 가야 할 지 모른다면 그런 특이점이 있는 곳을 찾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도 동의해요. 그런데 한반도에 있는 유일한 대삼림은 저번에 몬스터를 잡으면서 S급 몬스터를 다 처리한 이후에 끊임없이 관리를 해서 그 크기가 점점 줄어들고 있거든요. 단순히 토지의 차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면 대삼림이 있던 곳의 상황을 뒤져봐도 좋겠지만..."
"중국으로 가 보자는 말을 돌려 하는 구나. 중국에는 큰 규모의 대 삼림이 꽤 많다. 종류도 많고 크기도 제각각이니 여러가지 케이스를 두고 분석할 값어치는 충분하겠지."
화련이의 말에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측 존재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뒀으면 좋겠군."
그렇게 우리의 대삼림행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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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네요..."
연하가 축 쳐져서 말하니 화련이가 손가락 하나 튕겨서 순식간에 그녀를 뽀송뽀송하게 만들어 줬다.
"여긴 분위기가 무슨 정글 같아요..."
"이곳에 살고 있는 몬스터들이 그쪽 환경에서 생활하는 이들이라 그렇다. 몬스터들 때문에 환경이 바뀐 것인지 마나적인 환경 때문에 이런 몬스터가 산 건지 알아 보기 위해서 일단 이곳으로 왔는데..."
화련이가 말을 멈추고 연하를 바라보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반짝 하고 빛났다.
"힘들어 할 걱정은 안해도 되겠군."
"다들 화이팅 해봅시다!"
연하의 말에 화답하듯 위에서 거대한 악어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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