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화 〉 용사2
* * *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듯 한 동안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용사측 인물들이 우리세계에 영향을 끼치기는 커녕 게이트조차 열리지 않았다.
너무할 정도로 조용한 현상에 우리는 드디어 우리세계가 저쪽세계로 부터 해방된 건 아닐까 생각해 봤지만 스팟에서는 여전히 같은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어 아직 저쪽 세계와의 연결이 끊겼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폭풍전야.
아직 폭풍이 찾아오진 않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폭풍의 공포에 덜덜 떨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잘 다녀왔어?"
"네!"
아리가 사현이의 팔을 꽉 잡고 대답했다.
시련이 끝난 직후엔 사현이를 제어하기 위해서 별의 별 짓을 다했던 아리와 가연이었지만 사현이가 그들에게 꾸준히 신뢰를 주면서 두 사람의 집착도 상당부분 감소했다.
가끔은 사현이가 아리와 가연이를 조련하는 듯한 모습도 보여줄 정도였으니 당분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진짜 평화롭네요."
한 동안 대삼린을 뒤지고, 대삼림 외에 다른 특이점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돌아다니다가 몇주가 지난 다음에야 대삼림 외의 특이점은 없다고 확신을 내리고 돌아 온 연하가 바닥에서 뒹굴거리며 말했다.
"아직도 흡혈귀님한테 연락 없어요?"
"어. 없어."
흡혈귀한테 연락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내 심장에 존재하는 피의 마나는 그녀에게 제공받은 마나인데 그 마나의 힘이 일정 주기로 약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몸이 이상하지는 않으니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거나 그녀와 나의 연결이 약해졌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아..."
연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우리앞에 펼쳐진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당장 내일 용사가 세계를 잇는 문을 만들어서 우리 세계를 완벽히 멸망시킬 수도 있고, 갑자기 흡혈귀가 나타나서 이제 다시는 만날 일 없다면서 세계간의 연결을 완전히 끊을 지도 모른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화련이가 자기 정체까지 밝히고 근방의 각성자들을 성장시켜 주고 있긴했지만 화련이조차 용사를 막을 수 없는 데 S급 각성자가 조금 더 강해진다고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스팟을 막는 방법에 대해선 연구해 봤다고 했었나?"
"해보긴 했는데...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팟이 생겨난 이유가 세계간의 연결이라고 추정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스팟을 모조리 막아버리면 이 연결을 끊을 수 있자 않을까 하고 역으로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막을 방법을 알 수 가 없다는 것.
흡혈귀랑 연락이 됐다면 그녀에게 뭐라도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들리나요?
그 때 피의 마나로 부터 언제 한 번 들어봤던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아야?"
가슴이 철렁하고 떨리는 것을 겨우 제어한 뒤 질문했다.
맞다요! 모아다요!
"왜 흡혈귀 님이 아니라 네가 연락을 했어? 흡혈귀님이 어떻게 되신 건 아니지?"
어떻게 되신 거 맞다요! 지금 흡혈귀님은 요양중이라요. 용사 때문에 피의 마나가 진탕이 됐는데 그걸 회복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고 하셨다요.
"... 그래?"
뭔가 느낌이 쎄했다.
분명 모아의 목소리는 피의 마나를 통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흡혈귀가 피의 마나를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아 또한 나한테 말을 걸 수 없어야 옳았다.
아니면 모아만의 방법을 사용해서 나에게 연락을 하던가 말이다.
"모아야."
왜 그렇게 부르냐요?
"너는 무슨 소녀지?"
거대소녀다요! 아주아주 큰 크기를 가지고 있다요! 근데 그건 왜 물어 보냐요?
모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끼기 시작했다.
"피차 눈치챈 것 같은데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이야,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
용사가 낄낄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는 순간 조금씩 떨리고 있던 피의 마나가 죽은 듯이 잠잠해졌다.
저번에 흡혈귀인척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용사는 다른 사람을 흉내내는 걸 참 잘하는 모양이다.
피의 마나까지 진동시키면서 말하길래 하마타면 못 알아볼 줄 알았다.
"왜 갑자기 나한테 연락했지?"
그렇게 대단한 이유는 아니야. 흡혈귀가 한동안 연락도 없이 잠수를 타고 있어서 걱정했을 거 아니야. 한 동안은 너희에게 간섭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해주려고 연락한 것 뿐이야. 절대로 모아의 목소리를 이용해서 너희를 속이려고 들거나,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한 적은 없어.
"그러면 이제 꺼져도 상관 없겠네?"
내 말에 용사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소름돋고 소름끼쳐서 나도 모르게 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옆에 있던 연하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어, 괜찮아."
꺼져도 상관 없긴 한데 모처럼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는 데 조금 정도는 더 대화를 나누고 싶네.
"내가 싫다고 하면?"
너한테 선택권이 있을 것 같아? 내가 원하면 네 세계로 넘어가진 못해도 네 주변에 있는 애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 시련 때 했던 것 처럼 딱 한 명만 데려와서 죽여 보내면 참 재밌겠다. 그치?
그녀의 말대로 나한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자고. 원하는 게 뭐야?"
이야, 오빠 진짜 직설적이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남자는 그렇게 안 좋아하는 데.
용사는 나를 놀리는 게 재밌다는 듯 낄낄대며 웃었다.
"그러면 네가 대화를 주도하던가요. 할머니, 저는 어려서 세상물정을 잘 모르니 나이가 많으신 용사님이 좀 리드를 해주시죠."
리드하고 말고 그런게 뭐있어. 나는 그냥 너랑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지 너와의 대화에서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은 게 아니야.
"그러면 어떤 대화를 할지는 내가 정해도 된다는 거지?"
물론이지.
상황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용사는 나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나름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어 있었다.
"너, 그렇게 죽고 싶어?"
시작부터 정곡을 찌르네, 그래 , 죽고 싶어. 이미 너무 오랜시간을 살아 왔고 더 이상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힘도 떨어지고 있어. 그냥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최대한 빨리 죽고 싶어.
"죽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거지?"
당연하지.
용사가 살짝 뜸을 들였다.
너희의 세계가 망하든, 우리의 세계가 망하든, 다른 이들이 고통을 받든, 내가 어마어마한 시련을 치뤄야 하든, 죽을 수만 있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
"우리 세계로 건너오면 죽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한 거야?"
확실하지 않으면 어쩌겠어? 우리 세계에선 일단 죽을 방법이 없는 데 다른 세계로 가야하지 않겠어? 이 세계 저 세계 막 뒤지다가 우연히 너희 세계에 걸린 거니까 나를 너무 탓하지는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우리세계에서도 죽지 못하면 어떡하려고?"
상황을 분석해야지. 너희가 우리 세계에 전염이 돼서 죽지 못하는 거라면 세 세계는 나 혼자서 깔끔하게 도전해 볼테고, 세계와 상관 없이 나라서 못 죽는 거라면... 글쎄? 일단 너희 세계를 날려버리고 시작하지 않을까?
흡혈귀는 용사가 아예 건너오지 못하게 하고 연결을 끊어 버리는 것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방법은 확률이 대단히 낮을 거라고 생각했다.
용사는 흡혈귀 보다도 훨씬 강한 존재고, 우리보다 몇차원은 위에 있는 존재다.
한 두번 정도는 용사를 저지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결국 그녀가 있는한 연결을 끊어 버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결을 끊는다고 해도 그 다음이문제야.'
우리야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 됐다지만 그 다음에는?
용사는 우리세계에서 겪였던 일을 시행착오로 삼아 다음 세계에 도전할 것이다.
그 다음 세계에서도 실패하면 다른 세계에 도전하겠지.
이런 일이 반복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굴레를 끊는 방법은 단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일단 우리 세계로 넘어오는 걸 도와줄까?"
그녀가 죽을 수 있게 만들어 주거나.
그녀가 죽을 생각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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