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2화 〉 용사­3 (262/265)

〈 262화 〉 용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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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를 우리 세계에 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근본적인 방법도 아니었고 확실히 가능할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녀에게 협력해서 그녀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현실성 있는 방법이 아닐까?

어쩌면 그녀가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이유를 만들면서 이 굴레를 끊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할 확률이 높다.

그녀는 이미 오랜 시간을 살아 오면서 대부분의 감정이 거세되어 있는 걸로 보였으니까.

­내가 그곳으로 넘어가는 걸 도와준다고?

용사가 흥미롭다는 듯 반문했다.

"그래, 네가 이곳으로 오는 걸 도와주지."

옆에 있던 연하가 입을 쩍 버리고 나를 바라봤다.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면서 당황함을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뜯어 말리지는 않는 걸 보니 나한테 최소한의 생각은 있다는 것은 아는 듯 보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래? 지금까지 내가 절대 못 건너가게 막았던 인간이 누군데 말이야.

"너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없을 것 같고, 막는 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닌 것 같아. 모든 문제는 결국 네가 죽어야 끝나는 문제 아니겠어?"

­그래, 맞아. 내가 죽어야 끝나는 문제지. 나는 지금 미치도록 죽고 싶으니까... 그래도 이야기가 잘 통하네, 나는 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못 넘어오게 막을 줄 알았어.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잖아."

용사쪽에서 약한 미소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일단 조건들이 있어."

­네가 뭘 도와줄 수 있는지도 이야기 하지 않고 일단 조건부터 말하는 거야?

"누가 을인지 생각해 보지 그래?"

용사가 입을 다물었다.

"네가 을인걸 받아들인 걸로 간주하고 이야기 할 게. 일단 너희 세계에서 우리 세계로 넘어와서 죽을 수 있다고 해도 바로 죽지 마."

­왜?죽고 싶을 때 바로 죽는 것도 안돼?

당연히 안되지.

"너를 따라서 우리세계로 건너온 놈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 지 예측할 수 없어. 건너오자마자 저쪽 세계랑 우리 세계와의 연결을 완전 끊던가, 아니면 너희 세계의 존재들을 제어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죽던가. 그렇게 계약하지 않으면 너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

"지금까지 오래도록 기다려 왔던 죽음이잖아? 조금 정도 더 기다리는 것도 안 돼?"

­그래, 알았어. 그 정도 뒤처리는 해줄 수 있지.

용사가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너희 덕분에 아낄 수 있는 시간의 일부를 투자하는 셈 치겠어. 그래서, 조건은 그게 끝이야?

"혹시 네가 우리 세계에서도 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폭주하지 말고 참아."

­그건 장담을 할 수가 없어.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지 못하는 데 억겁의 시간동안 쌓여 있던 분노를 제어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아까랑 마찬지로, 이것도 장담을 해주지 못하면 나는 너를 도와줄 수 없어."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용사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깐깐하구만.

"다른 분도 아니고, 용사님을 우리 세계에 모시는 건데 그만큼 깐깐해야 하지 않겠어? 애초에 그렇게 깐깐한 것도 아니야. 이 정도 안전장치도 없으면 우리 세계에 너무 큰 위험을 들여놓는 셈이란 말이야."

­그래, 알았어. 최대한 참아보도록 노력하고 혹시라도 폭주하게 된다면 우리 세계에 넘어가서 난리를 피울 수 있게 몸에 조치를 취해놀게 이 정도면 된거지?

"그 정도면 충분해."

­그래서, 네가 나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야? 가진 거라고는 피의 마나밖에 없는 놈이 지금은 흡혈귀도 요양 중이라서 제대로 된 실력도 발휘 할 수 없을 텐데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야?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천마는 할 수 있는 게 있어. 걔한테 부탁해서, 네가 있는 구역에 게이트를 만들라고 할게. 저번에 게이트를 통해서 넘어오려다가, 흡혈귀의 방해 때문에 빡이쳤던 거잖아.

­그래, 네 생각은 충분히 좋은 생각이고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건 맞아.

그녀의 목소리에 나를 향한 무시가 끼고 있었다.

­그런데 천마라는 년한테 허락을 맡을 수는 있는 거야? 네가 하는 게 아니잖아. 천마가 과연 네 말을 들어 줄까? 너는 나를 너희 세계로 불러 들이면서 완전히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천마는 나를 막는 방법을 찾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용사가 비웃음 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천마가 너를 좋아해서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너는 약자야. 천마가 무언가를 하자고 하면 납짝 엎드려서 일단 말을 듣고 봐야 하는 약자라고, 천마가 죽었다 깨어나도 안된다고 하면? 닥치고 자기 의사대로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할건데?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해 봐야겠지만, 글쎄? 천마는 내 생각에 반대할 때 아무런 이유없이 자기 주장만 밀어 붙이는 애가 아니야. 나를 최대한 설득하려고 노력할 테고 나도 그녀를 최대한 설득하려고 노력하겠지. 천마는 네 생각처럼 사나운 애가 아니야."

­네가 그녀의 전생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다... 뭐, 현생에 한정한다면 네 얘기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겠군.

용사가 여전히 비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일단 천마에게 허락을 맡고 오는 것이 어떤가? 네가 어떤 약속을 한다고 해도 그녀가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이니.

"아마 듣고 있었을걸?"

"나는 아해의 목소리 밖에 못 들었다. 용사가 하는 말은 기를 쓰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가 않더군."

근처의 벽이 스르르 모습을 바꾸더니 그곳에서 갑자기 천마가 튀어나왔다.

"대충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들었어?"

"용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확실히 무조건 막기만 하는 것 보다는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많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아해의 말대로, 용사가 우리 세계에 오는 것을 막는 것 만으로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다행이 천마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바로 시작해도 되는 거 아니야? 게이트를 만들 수 있는 힘은 이미 한참전에 가지고 있던걸로 아는 데 말이야.

"용사가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냐고 묻긴 했는데 지금 당장 시작할 생각은 없어.

­뭐?

용사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분명 다른 세계에 존재하고 나는 그녀의 모습도 보지 못한채 목소리만 들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살기 하나만으로 몸이 덜덜 떨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이야. 흡혈귀한테도 이야기를 하고 시작하고 싶거든."

­걔한테는 왜? 걔는 우리 얘기랑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애야. 우리끼리의 거래에 왜 걔를 끼어 들여?

"그래도 네 친구였다면서? 운이 좋으면 우리 세계로 건너오고 나서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죽을 수도 있는데, 친구끼리 이야기 할 시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걔랑 친구의 연을 끊은 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야.그런 거 필요 없어.

"너한테는 필요 없어도 흡혈귀한테는 필요할 수도 있지. 그리고 네가 죽은 다음에 너희 세계를 제어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을 따지면 역시 흡혈귀 아니겠어? 그녀한테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일을 실행 해 버리면 많이 당황할거야."

­... 하, 그래 내가 을이니까 참아야지. 금방 깨울 테니까, 최대한 빨리 용건만 말해.

용사가 잠시 연결을 끊더니 피의 마나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거의 다 사그라들었던 피의마나가 빠르게 팽창하더니 순식간에 원래 사용했던 크기로 돌아왔다.

­야, 들리냐?

"이번엔 용사가 장난 치는 게 아니겠죠?"

­걔 지금 내 옆에서 노려보고 있다. 눈이 아주 불타오르는 게 최대한 빨리 말하라는 것 같네.

흡혈귀의 말투는 상당히 평온했다.

자신을 쓰러뜨린 자가 갑자기 자기를 회복시키고 나한테 연락하게 했는데도 말이다.

­너희가 하는 얘기, 다 들었어. 네 심장에 박아 놓은 내 마나는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용사를 너희 세계에 보내서 죽이고 싶다고?

"네, 그게 가장본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사용해야 할 해결책이 되어야 하기도 하지.

­모든 변수는 나한테서 일어나. 내가 스스로 나의 변수를 차단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나를 죽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좋지 않을까?

­... 미안하다. 나는 너를 믿을 수가 없다.

­맹약을 걸면 되잖아. 설마 맹약도 못 믿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

흡혈귀가 아무런 말 없이 한 숨만 푹푹 내쉬었다.

­... 다른 방법을 찾을 순 없을까? 우리세계랑 저쪽 세계의 연결을 끊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용사를 앞에 두고도세계간의 연결을 끊는다는 흡혈귀의 말을 듣고 나는 하나의 가설을 떠올렸다.

어쩌면 흡혈귀는 단지 용사가 죽지 않았음을 원하는 게 아닐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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