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3화 〉 용사­4 (263/265)

〈 263화 〉 용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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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가 용사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

단지 가설일 뿐이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 또한 저쪽 세계의 주민인데 그런 그녀가 같은 세계의 사람들을 배신하고 우리에게 붙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흡혈귀의 말처럼 우리 세계가 불쌍해서, 죄를 짓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걸 수도 있지만 단지 그것뿐인 이유로 저쪽세계에서도 상당히 강한 것으로 추정되는 흡혈귀가 우리를 도와줄 만한 합리적인 이유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그녀의 실력으로 따지면 저쪽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 처럼 보였으니까.

물론 실제로 우리세계를 도와주고 싶었을 수도 있고, 그 이유와 용사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합쳐져서 우리를 도와주는 걸지도 모른다.

'흡혈귀님, 혹시 용사가 죽는 게 싫으세요?'

내가 가볍게 물어보자 흡혈귀는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나에게 보인 것은 잠깐의 침묵 뿐이었지만 나는 그 반응을 통해서 그녀가 용사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용사가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그래, 네가 단순히 선한 의지만으로 내 뜻에 반할 애가 아니지.

­하아...

자기 친구가 죽었으면 하는 사람이 어딨겠냐만은, 용사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고통을 옆에서 같이 봐 왔을 텐데도 말릴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나도 화련이를 포함한 다른 애들이 갑자기 자살을 하고 싶다고 하면 무슨일이 있어도 뜯어 말릴 테지만, 용사한테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통이 찾아왔을 테니까.

­그래, 용사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왜?

용사는 화내지 않고 천천히 물었다.

억지로 분노를 참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흡혈귀에게 물었다.

마치 네가 나를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내가 죽으려 드는 데 어떤 간섭도 하지 말라는 듯 차가운 어투였다.

­친구니까... 라는 말로 너를 설득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지?

­당연하지. 합리적인 이유를 대봐. 너도 내가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었는지 잘 알고 있잖아. 이제와서 꾸역꾸역 살면서 지금까지 산 길을 반복하라고? 나는 그렇게 못하겠어.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는 게 훨씬 더 편할 것 같아.

­앞으로의 삶에, 고통만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잖아.

­우리가 지금까지 고통 받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지? 이렇게 긴 시간동안 시간속에서 갇혀 지냈는데 앞으로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아?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 우리 세계는 고쳐지지 않을 거고, 우리 모두 죽지 못하고 영원히 살게 될 거야. 아마 너도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면 내 생각을 이해하겠지.

­...

흡혈귀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용사에게 새로운 삶의 가치를 주고 싶으면 일단 저희 세계로 오게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용사의 말처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계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는 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요."

­너희 세계로 넘어가면 용사는 반드시 죽을 거야. 다른 세계로 넘어가면 그 순간 부터 기회는 없어. 너희랑 한 계약을 모두 이행하는 순간 바로 죽어 버릴 텐데, 그 시간 동안 무슨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

흡혈귀의 말에 용사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내가 더 때문에 딱 1년을 더 참아주겠어.

용사의 말에 흡혈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기는 모른다는 듯 질문하면서도 그녀의 말 속에 들어가 있는 흥분은 그녀가 이미 용사의 말을 완벽하게 해석했다는 것을 알려줬다.

­저쪽세계에 넘어가면 딱 1년동안 절대 죽지 않아 줄게. 오래전 이야기긴 하지만 너는 내 친구니까. 너를 위해서 딱 1년만 시간을 내어 주는 거야. 어때? 이 정도면 내가 저쪽 세계에 넘어갈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아? 1년동안 나를 설득할 자신이 없으면 나를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맞지 않아? 나도 더 이상 양보해줄 수는 없어.

­...좋아. 그렇게 하자.

흡혈귀가 밝지만, 약간은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용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선심을 쓰듯 시간을 허용해 준 셈이니 더 이상 안된다고 해 봤자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니까 저러는 거겠지.

­그러면 일단 우리쪽 애들한테 싹 다 공문을 돌려야 겠네. 1년 동안 안 죽을 거면 우리 세계랑 저쪽 세계랑 오가는 일도 많을 거 아니야. 나 뿐만 아니라 세계랑세계가 연결되는 일이니까, 최대한 완벽하게 준비하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내쪽 애들은 내가 관리할 테니까 너희 쪽 애들은 네가 관리해. 저쪽으로 넘어가도 사고치지 말고, 넘어가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아예 넘어가지도 말고 그냥 죽고 싶으면 주변에 피해가안가게 혼자서만 깔끔하게 죽고... 대충 이 정도만 제대로 알려줘도 될 것 같아.

­그래, 알았어.

일이 굉장히 빠르게 진행됐다.

용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 1시간이 채 안되는 데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세계와 세계를 연결하고, 넘어오는 자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이야기 까지 모두 오갔다.

­준비가 다 되면 말해줄 테니까 너희도 게이트를 열 준비를 하고 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어? 방금전까지 싸우고 있던 인간들이 갑자기 넘어오는 건데 설명이나 언급 정도는 해줘야지.

­아예 말하지 않는 게 더 나을 거야. 우리가 갑자기 넘어가게 된 계기가 너희한테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전세계에서 난리가 날게 분명하니까.

흡혈귀의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주변에 있는 애들한테만 알려주고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기로 하는 것이 잡음없이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용사가 난리를 부리거나 하면 우리가 그들을 불러냈다는 것을 알리고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지만, 지금 밝혀봤자 시간도 더 늦어지고 애초에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말할 수 있는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징조 정도는 주는 것이 어떻겠는가?"

화련이의 의견도 나랑 동일했지만,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 화련이의 생각이었다.

용사의 세계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화련이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징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계어디를 가도 대삼림은 존재했고, 어떤 도시든, 어떤 지역이든 대삼림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화련이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대삼림에 찾아가 중앙 지역에 존재하는 S급 몬스터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아무리 화련이가 강하다고 해도 인간은 인간이었기에 하루에 수십개도 넘는 대삼림들에 작업을 치다보니 상당히 힘들어 보였지만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 일종의 경고의 표시를 해줄 수 있었다.

그들은 왜 대삼림의 몬스터들이 갑자기 죽어나갔는지 모르니 저번에 시련을 일으켰던 이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

화련이가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면 하연이와 월하는 우리 도시에 닥칠 충격에 대해서 대비했다.

일단 용사 세계와 우리 세계를 잇는 연결 고리를 우리 도시 근처에 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비해서 사회제도를 정비하고, 사람들을 긴장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상당히 신속하게 진행됐고, 불과 일주일 만에 모든 대삼림에 존재하는 S급 몬스터들의 씨가 완전히 말라 버렸고 우리 도시에서도 용사세계의 사람들을 받아드릴 만한 준비가 되는 등 빠르게 자리 잡았다.

용사측에서도 준비가 모두 끝났다는 연락이 왔으니, 이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일만 남았다.

'용사를 믿을 수 있나?'

당장 두 세계를 연결한다고 하니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약 용사가, 폭주해서 우리 세계를 파괴하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들을 어차피 지금 연결하지 않았어도 파괴되었을 거라고 위안하면서 씹어 삼켰다.

우리가 먼저 용사에게 제안을 했기에 용사가 폭주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긴거지 이전과 같이 막기만 했으면 용사가 폭주할 확률이 오히려 더 높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어느 정도 평안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겠다."

화련이가 게이트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장소는 우리 도시 근처에 있는 작은 공터.

화련이가 만들어낸 게이트가 용사의 세계에 나타나고 약속한 대로 1분의 시간이 흐르자 흡혈귀와 용사만이 게이트의 안으로 들어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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