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융화
* * *
긴장감이 우리를 덮쳤다.
조금만 있으면 그녀들이 우리 세상에 건너 온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쿵쿵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건너올 수 있을 거라는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분석해 본 결과 그녀들이 우리 세계에 여유롭게 건너올 수 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았다.
만약 그녀들이 건너오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아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녀들이 제발 넘어올 수 있었으면 좋다는 마음을 가진 채 그녀들을 바라봤다.
화련이의 본체가 그들을 위해서 구석으로 물러났고, 게이트의 중앙을 차지한 용사는 천천히 그들의 세상과 우리들의 세상을 잇기 시작했다.
'안되는 건가?'
만약 제대로 연결이 되고 있는 거라면 우리 앞에도 세상이 연결 되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용사가 있는 곳의 공간만 크게 일렁이고 있을 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곳에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우웅!
그런 생각을 가지자 마자 우리 세상에서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련이가 게이트를 만들어낸 부분에 해당하는 곳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듯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이트 출현과는 조금 다른 그 신호에 다들 숨을 삼키고 허공을 바라봤다.
우우우웅!
진동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커져갔다.
자신이 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라는 것을 알리는 듯 떨리는 진동이 계속 울러퍼졌다.
한 동안 엄청난 진동이 계속되더니 허공에 하늘색의 색상을 가지고 있는 게이트가 갑자기 등장했다.
쾅!!
게이트가 나타나면서 발생된 충격파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꽤 가까이에 있던 나는 그 충격파에 휩쓸려 뒤로 밀려났는데, 그렇게 밀려나는 나를 화련이가 꼭 안아 줬다.
다른 애들조차 뒤로 날아가는 걸 보면 충격의 여파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였다.
"이쪽에서 먼저 게이트를 여니 너무 손쉽게 이어 버리는 군."
화련이 말대로였다.
지금까지 절대 우리 세계에 못 넘어 오다가 화련이가 게이트를 만든 것을 계기로 이렇게 까지 쉽게 우리 세계에 발을 들였으니까.
"네가 게이트를 열어 줘서 그런 것도 있지만 방해자가 없는 것도 컸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겁을 먹었다거나 기에 눌린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기로만 들어왔던, 봤다고 해도 분신만 봐 왔던 지금이랑은 달랐다.
용사의 본체를 마주 하니 나도 모르게 몸이 떨리고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압도적인 강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자연스럽게 작아졌다.
"후우."
용사가볍게 숨을 들이쉬자 주변의 공기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 중에 포함되어 있는 마나가 약해지고 그녀의 마나로 환원됐다.
"다른 세계는 이런 느낌이구나?"
용사가 기지개를 쭈욱 하고 펴자 흡혈귀가 따라 나왔다.
"어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직접 해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우리 세계보다는 훨씬 희망적이야. 나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한 건 없지만, 그래도 망할 제약이 없다는 건 느껴져서 나 스스로 나를 죽임으로서 이 미친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지."
"계약기간이 아직 1년 남았다는 거 잊지마."
"누가 뭐래? 지금 당장 부터 1년이다. 나중에 가서 제발 죽지 말라고 빈다고 해도 나는 바꿔줄 생각없어."
"그 때가서 살고 싶다고 말... 해주길 바래."
흡혈귀의 소심한 발언에, 용사가 피식하고 웃었다.
"야, 이수현이라고 했었나?"
"네, 이수현입니다."
"너희 세계 좀 안내해줘라. 게이트를 열 때 마다 한 번 싹 훑어 보긴 했는데 디테일한 면에서는 역시 현지인을 다라잡기 힘들어."
용사가 내 어깨에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녀는 여자 치고는 키가 꽤 컸다.
내 어깨에 무리 없이 팔을 올릴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장난스럽게 내 어깨에 팔을 올리자 월하가 그녀를 사납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부터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노려봤지만, 이제와서는 더더욱 화난 표정으로 용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도 어느 정도 참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월하는 자신의 화를 참고 있지 않은 것이 내 눈에도 그대로 보였다.
나 한테도 보이는 월하의 감정을 당사자인 용사가 알아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너는 왜 그렇게 꼴아 보냐? 나한테 불만있어? 네가 좋아하는 남자한테 어깨동무하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들어? 마음에 안 들으면 옆에와서 나한테 말 하던가 그럴 용기도 없는 놈이 무슨."
용사가 피식 웃으면서 기세를 쏘아 보냈다.
나름 상당히 강력한 기세를 풍기는 것을 보고 아무리 월하라고 해도 이건 안되겠구나 싶었는데 월하는 용사의 기세마저 이겨내고 용사를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면이 있으면 사과라도 하는 건 어떠신가요."
"내가 잘못한 게 있었나?"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시련을 당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당신 입으로 직접 시련이라고 이름 붙인 일을 겪고 난 뒤에 우리는 모두 크든, 작든 변화를 거쳤어요. 그것에 대한 사과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 기억난다."
용사가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에 올려놨던 팔에 힘을 줬다.
얼굴이건, 말투건 절대로 사과를 할 말투가 아니었기 때문에 괜스래 긴장감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알았어. 내가 미안해. 그때는 내가 어떻게든 죽고 싶어서 좀 미쳐 있었던 것 같아."
"저희가 고통당하는 게 당신이 죽는 것과 연관이 있나요?"
"흡혈귀한테 협력하는 애들을 망가뜨리면 당연히 나한테 이득 아니겠어? 지금이야 이렇게 협력하게 됐지만, 그때까지는 우리가 이런 관계가 될지 상상도 못했잖아. 내가 너희한테 잘못을 한 건 맞지만,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아. 어쩔 수 없었잖아? 그 때는 서로 적이었으니까. 지금이라도 제대로 사과하고 좀 사이 좋게 지내면 되는 거지. 적어도 1년 정도는 계속 얼굴보고 살 사인데 말이야."
용사의 말에 월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천천히 물러났다.
내 어깨에 올라와 있는 용사의 팔을 유심히 보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항이 더 남아있는 것 같았지만 일단은 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아무튼 빨리 안내나 해줘. 오늘 하루 동안 이 세계에 대해서 파악해야 다음에 다른 애들을 데리고올 거 아니야. 나랑 흡혈귀 말고도 이쪽세계에 오고싶어 한 애들이 얼마나 많은 데 걔네들을 전부다 내버려 둘 생각이야?"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오늘 하루 동안은 흡혈귀와 용사 단 둘만이 우리세계에 있는다.
그 동안 지구 전체를 슥 훑어 본 뒤 몇 명단위로 우리 세계에 올지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이건 뭐야 먹는 거야?"
"먹는 거 아닙니다."
"그러면 이게 먹는 거야?"
용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흥미를 가졌다.
시간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상황에서 영겁의 시간을 버텨냈다고 하는 데 그 시간동안 우리 세계의 물건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물건이 나오지 않기라도했던 걸까?
용사는 그야말로 호기심 투성이였고 흡혈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말 다행인 것은 우리에겐 모든 호기심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만능 도구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뭐야?"
"스마트폰이라는 거에요. 여기에 모르는 걸 검색하시면 바로 정보를 알 수 있을 거에요."
용사와 흡혈귀는 스마트폰 사용법도 금세 익혔다.
자판을 치는 법은 물론이고 세세한 앱 사용법 까지 금방익혔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녀들이 사실 우리 세계에 대해서 어지간한 건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럴리가 없지.'
그녀들의 호기심은 스마트폰으로 틀어 막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다음에는 어떤 존재들을 데려오는 게 좋을 지 회의를 진행했다.
******
용사와 흡혈귀를 시작으로 정말 많은 수의 존재들이 하나둘씩 우리 세계에 발을 들였다.
우리 세계에 발을 들인 목표가 단지 죽음인 존재들은 순식간에 자살했고 다른 존재들이 우리 세계에 후유증이 남지 않게 잘 처리해줬다.
단순히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임시 방편으로 스마트폰을 지급했다.
그들의 길고 긴 역사 속에서 스마트폰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물건이 존재했던 적이 있어서 대부분은 쉽게 적응했고, 물건은 비슷해도 안에 담긴 내용은 상당히 달랐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흥미를 끌 수가 있었다.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인터넷으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게 된 것은 우리에게도 상당히 긍정적인 일이었다.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몇몇 존재들과 저항감 없이 이야기 할 수 있었으니까.
워낙 많은존재들이 넘어오다 보니 크고 작은 문제들이 계속해서 발생했지만, 아무도 서로를 혐오하지는 않았기에 천천히 그 문제들을 지워나갈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