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9화 (9/64)

〈 9화 〉 치킨이 아니네..

* * *

[ 오늘 방송은 휴방입니다. 지영님과 합방 하기로 했으니까 많이 보러와주세요.]

간단한 방송공지를 남기고 옷장을 뒤적였다.

최소 몇천 명에게 보여질 몰골인데 추레하게 입고 갈 수는 없으니.

­ 스륵.

옷장 속에는 옷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기본 적인 색깔인 검은색이 70 흰색이 20 네이비색이 10 정도.

나는 그중에서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검은색 카라티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이거 어떠냐."

" 움.. 괜찮은디?"

이지은은 과자가루가 묻은 손을 쪽쪽 핢으며 말했다.

내가 꺼내 든 것은 흰색 면바지.

이지은의 저 성의 없는 눈빛을 보니 왠지 입으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다시 옷장에 모셨다.

" 됐다 너한테 물은 내가 잘못이지."

"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네?"

나는 이지은의 말한 귀로 듣고 흘려보내며 검은색 슬렉스 바지를 꺼냈다.

' 이걸 입으면 그래도 반은 가지.'

언제나 실패없는 올블랙 패션은 자주 애용하는 아이템이었다.

나는 거울을 힐끔 쳐다보고 옷 매무세를 가다듬었다.

맨날 나시와 운동복만 입다가 오랜만에 일상복을 입으니 달라붙는 촉감이 꽤 어색하다.

" 갔다 온다. 저녁은 알아서 시켜 먹어."

" 오키! 근데 오빠 방송나오면 개 웃길듯 푸흐.."

" 들어오면 맞는다."

이지은은 노르스름한 천장한번 쳐다보더니, 무언가 떠 오른듯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저 웃겨 죽겠다는 눈빛에 조금의 수치감과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아직 나를 아는 누군가가 방송을 본다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못 한 상태였다.

" 친구들한테 다 말함 ㅋㅋㅋㅋㅋㅋ 개 웃길듯 ㅋㅋㅋㅋㅋㅋㅋ"

" 도랐나 니? 김치찌개나 먹을래?"

도리도리.

어딜 까불고 있어. 나는 격하게 도리질을 치는 이지은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방송을 시작하면서 제일 나아진점은 아무래도 생계였다.

비록 시청자50명밖에 안 되는 소규모 방송이었지만 2주간 번돈만 따지자면 직장인 월급만큼은 벌었으니.

적어도 이번 달은 먹을것 정도는 주머니 걱정없이 먹을수 있었다.

' 나를 뭘로 보고 다 말해야지 '

반대로 이지은은 수영복 가방을 챙기며 밖으로 향하는 이지훈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유지영은 여고생들 사이에서도 롤 잘하는 스트리머로 유명했다. 그런 방송에 우리오빠가 나온다니.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는 법이었다.

이런 평생 안줏거리를 두고 물러설 내가 아니다.

이지은은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이 소식을 일파만파 전하기 시작했다. 이 날 이후로 친구들에게 시달릴 자기 미래도 모른 체.

**

동네 문화센터에 위치한 한 수영센터.

수영을 끝내고 샤워까지 끝마친 이지훈은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수영장에 드나들 때마다 내가 동물원에 물개가 된 느낌을 받는 중이다.

온몸을 전부 가리는 검은색 레쉬가드를 입고 수영을 하므로 더 그랬다.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과 그 속에서 헤엄치는 물개 이지훈.

수영 빤스와 수영모 이 두개의 국룰 조합은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오늘은 심지어 자기 가랑이를 슬슬 만지는 여자까지 봤기 때문에 충격이 더했다.

수중딸이라니 시발.

이지훈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눈빛은 진짜 원래 세계의 남자가 여자를 보는 아주 기분 나쁘고 끈덕진 눈빛이였다.

둘만 있었다면 너를 강제로 범할 수 있다는 그 변태적인 눈빛.

그년이 몸을 떠는 거 보니반찬이맛있었나 본데 진짜 미친년인 줄 알았다.

내가 이 모순된 세계에서 자란 남자가 아니라서 망정이지, 보통 같았으면 수영장 전체가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나는 집에서 미리 가져온 비닐우산을 피고 센터를 빠져나갔다.

시간을 보니 꽤 서둘러야 될 것 같았다.

ㅡ 후두두둑.

굵은 빗방울이 우박처럼 강하게 떨어져 내리며 비닐우산을 찢어 버릴 듯이 쳐댔다.

동시에 비린 물냄새가 코를 찌른다.

항상 비가 올 때면 어렸을 때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비바람이강하게 불어와어깨와 바짓단이 물로 흠뻑 젖었다.

' 이래서 좃같다니까.'

나는 우중충한 기분을 물방울과 함께 털어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리 집에서 유지영의 거주지인 서초구 까지는 약 1시간.

원래 오토바이를 타고 가려했지만, 비가 너무 많이와서 지하철을 타야했다.

시간을 보니지하철을 타고가면 딱10분 전에 도착이 가능한 시간.

길을 걷던 나는 난데 없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

ㅡ 냐아아앙..

검은색 suv 차량 밑에서 들리는 애달픈 고양이의 울음소리.

본능적으로 눈길한번 주니 고양이는 기다렸다는 듯, 한쪽다리를 절뚝이며 느릿하게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어느새 내가 들고 있는 비닐우산까지 다가와 금빛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본다.

­ 냐아아..

내가 이지은도 아니고, 고양이에 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이 녀석은 영역싸움에서 처참히 패배하고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녀석의 갸날픈 다리에서는 이미 상처가 곪아서 누런짓물이 세어나오고 있었다.

" 비비지마라. 난 너 못 데려가."

검은 고양이는 내 다리의 머리를 비볐다. 다리에 부드러운 털에 감촉이 느껴진다.

고양이는 온몸으로 어필하고 있었다. 살고 싶다고.

지금 동물병원에 가면 당연하게도 늦는다. 1시간은 기본이고 두시간 까지도 늦을 수 있겠지.

내 민심이 곱창나는 것은 물론 기회를 준 유지영에게도 민폐였다.

정말 나에게 이득이란 하나도 없는 손해만 보는선택이었다.

전화로 양해를 구할까도 싶었지만 오히려 시청자들에 화만 돋구는 꼴이 될까 싶어 전화 대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우연히 '가는 길에보인 길 고양이가 '우연히' 다리에 상처를 입고 영양실조가 걸려 있는 상태라 동물병원에 들렸다 왔다?

시발 존나 말 안 되잖아?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가 다 놓치는 경우가 발생할수 있었다. 늦어놓고 구라까지 치는 추한놈.

인증하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한번 씌워진 프레임은 쉽게 벗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 아 진짜 안 되는데 씨발."

나는 그 애처로운 몸 부림에 무의식적으로 수영가방에 검은고양이를 담고 동물병원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ㄴ 왜 아름이만 옴?

ㄴ 빨리 고추데려와!!!

ㄴ 이 정도면 차를하나 뽑아서 오는 거 아니냐 ㅋㅋㅋ?

ㄴ ㅋㅋㅋ 천하의 유지영이 하꼬한테 합방 노쇼도 당하네 ㅋㅋㅋㅋ

ㄴ 아니 이지훈인가 이지현인가는 안옴?

­ 알고 보니 남자인척 하는 넷카마였던 거 아니냐 ㅋㅋㅋㅋㅋ?

" 매너채팅 하세요 무슨 일이 있으시겠죠."

류지영은 싸늘하게 채팅창을 내려봤지만 성난민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번 점화된 주제는 산불마냥 끝도 없이 커져 간다.

ㄴ ㅋㅋ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는 건 기본 아니노.

­ ㄹㅇ 하꼬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ㅋㅋ

" 자자 여러분!! 진정하세요! 마스터 승격전 대신 아람이의 실버 솔랭을 구경해 보시는 건 어때요 ㅎㅎ..!?"

ㄴ 치아라 마 ㅋㅋㅋㅋㅋㅋ.

ㄴ 아름이 귀엽농 ㅋㅋㅋㅋㅋ

ㄴ 롤만 보니까 슬슬.. 챌린저게임만 보다보니까 왜 내가 더 기빨리냐.

­ 그거 인정. 한판한판이 존나 힘듬.

ㄴ 먼저 술이라도 까자 이래서 언제 마스터 승격전 다보고 먹방까지봄.

­ 방송시간 길어져서 오히려 좋을지도..?

" 애들아 나랑 아람이만 있어도 재밋잖아. 오시면 마스터 승격전 안하고 술먹방으로 바로 넘어가면 되지."

원래 단순한 먹방을하며 yes or no나 QNA를 하려 했지만 유지영은 기지를 발휘해 술먹방으로 주제를 옮겼다.

여자스트리머와 남자스트리머의 술먹방.

이건 시청자들의 구미가 당길수밖에없는 먹이였다.

' 지훈씨에게 말 안한 게 조금 그렇긴 해도..'

이만한 방법이 없었다. 옆을 보니 권아람도 좋은 생각이라는 듯 책상밑으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ㄴ ??? 술먹방?

ㄴ ㅋㅋㅋㅋ오랜만에 술고래 유지영 출격함?

[ 비바비바밤보님이 1000원 후원]

­ 권아름 20살 첫 술먹방.

ㅡ아람이느으은... 귀여운촉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귀엽게 태어 난...

" 아아아악!! 언니 저 사람 벤해!!! 이상한 거 보내지마요!!"

" 싫은데? 흐흐... 우리 아람이 귀엽넹~?"

영상속에서는 술이 거하게 취한 권아람이 애교를 부리고 있는 흑역사가 재생됐다.

애교를 부린 후 책상에 대가리를 쾅!! 소리 나게 박자 언니인 권아름이 다가와 한숨을 내쉬며 방송을 끄는 영상이었다.

유지영은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진 권아람을 보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아익...! 하지 말라고요 언니!"

ㄴ ㅋㅋ ㄹㅇ 씹레즈같네 아람이 ㅋㅋㅋㅋ

ㄴ 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엽긴 해 아람이

" 안주 시킬 건데 투표창 띄울 테니까 추천 좀 해주세요."

[ 투표창]

­ 회

­ 치킨

­ 소곱창 막창.

­ 중국집.

­ 감자탕

투표 결과는 전부 비등비등했다. 차이가 나 봐야 3퍼센트에서 4퍼센트.

유지영은 결과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 다 시키죠 뭐."

ㄴ 왜 물어봤냐고 ㅋㅋ

ㄴ 술은 안주빨 이긴 하지..?

ㄴ 술먹방이 아니라 푸드파이터 아닌교..?

ㄴ 아람이가 라면 15봉은 먹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 술은 제가 사올게요!! "

권아람은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맡겨만 달라는 눈빛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유지영 또한 자신이 나가기는 귀찮았기에 별문제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30분쯤 지나자 배달음식이 가지런히 놓이고 술병들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회 짬뽕 짜장, 소곱창 대창,감자탕 등. 마지막 남은 음식은 치킨뿐.

그리고 마침내 초인종이 울렸다.

ㅡ 띵동!!

" 제가 나갔다 올께요!!"

권아람은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받았다. 아니 받으려 했다.

" 치킨이 아니었넹.."

" ... 안녕하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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