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10화 (10/64)

〈 10화 〉 옷좀 가져다 주세요

* * *

" 하아.. 내가 왜 그랬지."

대책없이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치료하고, 애견 호텔 방에 맡겨버리기 까지 했다.

수의사의 말로는, 워낙 겁이많고 사람을 피하는 녀석이라 며칠만더 늦었으면 아사했을 거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 그런 녀석이 왜 나한텐 머리까지 비볐는데.'

웃음을 흘리던 나는 간단하게 살고 싶은 생존본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애꿎은 짐승을 탓하면 뭐 하랴.

어차피 선택은 모두 나 자신이 내린 것이다.

고양이를 그냥 무시하지 않고 주워서 동물병원에 데려간 것도, 멋대로 합방약속에 늦은 것도 전부 내 선택이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어려서 부터 몸소 배운 사실이었다.

나는 다 젖어버린 팬티라도 갈아입기 위해 속옷 가게에 들려 수건과 새로운 팬티를 구매한 뒤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뇌를 비우고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한 유지영의 아파트 공동현관 앞.

나는 필터까지 타버린 담배를 발로 밞으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 존나 들어가기 싫다진짜.'

시청자들에게 욕먹기도 싫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방송을 하기도 싫다.

바지와 상의는 수건으로 대충 닦아내긴 했어도 엄청나게 찝찝하다.

선생님께 혼나러 교무실에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ㅡ 띵동!

피곤한 표정으로 초인종을 누르고 문 너머로 우다다다 달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나를 반기고 있었던 것은, 어쩐지 아쉬움과 당황한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권아람의 표정이었다.

" 치킨이 아니었넹.."

" .... 안녕하세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

" 언니.. 일로 나와봐요.."

권아람은 방음부스의 문을 열고 속닥였다. 권아람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도착했구나.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친 유지영은 마이크를 끄고 캠을 내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님 도착한 거 같으니까 잠시 갔다 올게?"

ㄴ ㅇㅇㅇㅇㅇ...

ㄴ 딱 먹을 거 세팅되니까 오는 것도 꼴받노 ;;

ㄴ 무슨 사정이 있을수도 있지 좀.

ㄴ 정액이라도 쳐 싸질렀노? 뭔 사정임 사정은 ㅅㅂ ㅋㅋ

ㅡ 선생님...여기 그런방 아닙니다..

이지훈은 들어가자마자 쉴 틈도 없이 유지영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 죄송합니다."

" 괜찮아요.."

유지영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 숙인 이지훈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를 나무라지도 그렇다고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그저 그의 몸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우산은 어디다 까먹고 두고왔는지, 윗옷과 바지는 물로 젖어 그의 전반적인몸의 윤곽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검은티 위로 슬쩍 비추는 복근과 한쪽 팔에 그려진 큼지막한 사자문신은 그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짝의 위압감을 주었고.

무심코 얼굴을 들어올리면 보이는 백옥 같은 피부와 살짝 충혈된 빨간 눈은 여자의 보호 본능과음심을자극했다.

나를 유혹하려고 이렇게 왔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야릇했다.

유지영이 침을 꿀꺽삼키고 있을 때 이지훈이 처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샤워좀 할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은 유지영의 동공이 사정없이 굴러 갔다. 물론 그것까지 눈 여겨볼 상황이 아닌 이지훈은 전혀알아채지 못했다.

' 비 오는 날 씨발 '

속으로 욕지기를 삼키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비 오는 날이면 날마다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으니 입맛이 썼다.

지금 상태를 말로 설명하자면 계곡에서 신나게 놀고 씻지도 못 한 채로 차를 타는 아주 더러운 느낌이다.

이 상태로는 방송이고 뭐고 찝찝해 죽을 것만 같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 황당한 발언이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까?

유지영은 자신이 뭘 잘못 들었다는 듯 입을 크게벌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보며 나는 속으로 사죄를 빌었다.

' 내가 생각해도 괘씸하네.'

하지만 이 상태라면 물이 마르면서 꿉꿉한 냄새도 같이 풍길터였다. 어서 빨리 이 좃같이 달라붙는 옷을 벗어 던진 후 뜨끈한 물에 온몸을 맞대고 싶었다.

오케이 싸인을 받은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샤워실로 향했다.

" 언니... 정신 차려요. 방송하러 가야죠!"

권아람은 얼이 빠져 있는 유지영의 말랑한 볼살을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유지영은 이지훈이 향한 샤워실 방향 쪽으로 눈을 고정시킨 채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니가 저렇게 정신이 나간게 이해는 가기 때문에 재촉하지는 않았다.

이지훈이라는 사람의 외모는 자신이 봐도 각자의 이상형을 바꿔버릴 정도로 잘생겼었는데, 그의 방송을 열렬히 시청한 유지영은 어떨까.

그래도 유지영은 나름 프로방송인 답게 ' 방송' 이라는 단어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ㄴ 화면 셧터 올려!!!

ㄴ 큰거 온다 큰거온다 큰거온다!!!

ㄴ 문 열어줄 때 까지 숨참는다 흐읍!!!

" 여러분 지훈님이 도착했어요! "

휑한 바탕화면 오른쪽 밑에 캠이 다시 떠 올랐다.

그 속에서는 풋풋한 목소리로 입을 연 권아름이 캠에 얼굴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들이밀고 있었다.

ㄴ 얼굴좀 치워!!

ㄴ 우웩 씹 더럽네 ;;

ㄴ 욕 멈춰!!아람이는 아가야.. 지켜줘야 해 ..

" 응애!"

ㄴ ㅋㅋ 아니 혼자 피자 4판을 쳐먹는 애기가 어딨음

ㄴ 그래서 이 거시기는 어디 있는데 ㅋㅋ

" 샤 !! 샤샤...."

샤워하고 있다고 말하려 한 권아름은 뒤 늦게 급 드리프트를 쳤다.

샤워하고 있다고 말하면 방송이 불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잘 드리프트 친거 같긴 한데.

' 또 욕먹잖아 ..'

뜻 밖의 수치플에 권아름의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ㄴ 아오 씹레즈년 진짜 적당히를 모르네

ㄴ 아람이 귀엽다 귀엽다하니까 진짜 선을 가지고 줄타기를 하네.

ㄴ 우리 아람이는 입닫고 밥 먹을 때가 제일...

" 제일?? "

많고 많은 욕중에 한줄기 빛 같은 채팅을 발견한 권아름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 돼지 같아 씹 돼지련아.

­ ㅋㅋㅋㅋㅋㅋ억빠 인 줄 알고 입꼬리 올라가다가 표정 싸악 바뀐 거 봐라.

­ 어림도 없지 컽!

" 나 말 안해.."

**

" 와.. 무슨 화장실이 우리 집보다 넒은거 같냐."

이지훈은순백의 욕조를 보며 샤워기 물을 틀었다. 커다란 욕조는 두개만 들여놔도 우리 집을 반 정도는 채울 정도로 크다고 느껴졌고.

깔끔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화장실 내부는 마치 호텔이라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부러운 마음에 괜히 매끈한 벽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샤워를 이어나갔다.

­ 촤아아아..

뭐 딴생각을 하긴 했지만 샤워는 3분도 안 되는 시간안에 끝 마쳤다.

안 그래도 늦었는데 딴 짓을 할 만큼 염치와 눈치가 없진 않았으니.

수건함을 열어 수건을 챙긴 뒤, 온몸을 벅벅 문지르던나는 한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저 옷을 다시입는 건 좀...'

걸레처럼 너덜너덜 해진 카라티와 쭈글쭈글하게 주릅이 잡힌 바지가 거치대에 걸려 있었다.

옷을 보며 고민을 거듭하던이지훈은 결국 체념하며 유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뭘 입든 저 미치도록 차가운 옷들 보다야 낫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여보세요??"

다소 건조한 통화음이 10초쯤 지나자 다소 어리둥절한유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이 새끼는 또 뭐가 문제지 라는 생각하지 않을까.

진짜 첫인상 밥 말아먹었네.

ㅡ 진짜 진짜 진짜 죄송한데 옷 좀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 남자 옷이 없으면 그냥 원래옷이라도 입겠습니다.

ㅡ 있긴 해요..

이지훈은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전화가 끊기고얼마 지나지 않아화장실 문틈 사이로유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지훈씨?문 앞에두고 갈게요."

" 넵. 감사합니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최대한 목소리톤을 올려서 밝게 대답했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 가지런히 개어진 옷을 챙겨 화장실로 돌아왔다.

유지영이 준 것은 박시한 후드티와 냉장고바지.

다행히도 남성용 옷이었지만 그 사실은 전혀 이지훈의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후드티에는 미키마우스가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고, 그캐릭터의벌바닥 부분에는쿠찌라는 로고가 예쁘장하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쿠찌.

그게 어떤 옷인가.

로고하나가 박힌 것만으로도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은 훌쩍 뛰어넘는다는 명품 중에 명품이었다.

옷 좀 좋아하고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 즐겨입는 그런 옷.

이걸 도대체 왜 입으라고 남에게 내주는 건지 의문이 들지만 입으라고 준 옷을 거절할수는 없었다.

' 그래 입자 옷이 그래 봐야 옷이지 시발.'

마음을 굳게 먹고 조심스럽게 머리를 집어넣었다.

불평 불만 할 때가 아니다.

이상한 옷이 아닌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환복을 마친지 3초.

이지훈은 옷을 입자마자 뭐라도 묻으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후드의 소매를 전완근의 끝까지 잡아올렸다.

괜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기 본능에 각인된 가난이 이 옷을 꺼리고 있었다.

' 후우 가자.'

기 빨리는 환복을 마친 후, 방음부스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제일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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