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관계의 첫 걸음
* * *
은발이 손 깍지 사이사이로 빠져나간다.
머리카락을 들어올리자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향기가 한번에 훅 뿜어져 나오며 후각을 자극한다.
흔히들 말하는 정수리의 구린내가 아닌향긋한 과일향기였다.
" 죄송할 필요는 없어요. ."
유지영이 차가운 냉수와 컨디션을 건냈다. 그걸 받아들은 이지훈의 손은 자연스럽게 뗴어질 수 밖에 없었다.
" 후으.. 고마워요."
사람이 왜 이렇게 착한걸까.
더 이상사과의 말을 전하는 것도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예쁘고 기분좋은 말이라도 그게 반복해서 들리면 짜증이 나는데 그게 듣기 거북한 말이라면 어떻겠는가.
" 저,전 화장실좀 갔다 올게요."
" 넵."
유지영은 화장실이 많이 급한지 황급히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자연스럽게 방안에는 권아람과 남아있게 되었는데 녀석은 아저씨나 낼 법한 소리를 내며 음흉하게 웃었다.
" 이 오빠 진짜 술 엄청 약하네. 흐흐.."
사돈 남말하고있네. 라는 말이 목 울대 끝까지 차올랐지만 겨우 참았다.
그도 그럴게 아까 도네영상에서는 아주 박치기 공룡뺨치게 박치기를 하지않았는가.
" 원래 맥주에 좀 약해."
" 오빠 그래도 방송에서 이상한 말은 하지마세요 나중에 다 업보로 돌아오니까. 이거 참고로 다 경험담임."
" 그래.. 아람아 고오맙다."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미묘하게 자신의 동생인 이지은과 닮은 권아람의 충고에 술이 확 깼다.
" 난 바람좀 쐬고 올게."
차가운 냉수로 비쩍 마른 목을 축여 취기를 날려버린 후, 배란다로 향해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유지영이 진즉에 방송종료버튼을 눌러버렸기에 시청자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천천히 드니유독 별을 많이 품고 있는 밤하늘이 보였다. 원래 보던 뿌옇게 먼지가 낀 하늘이 아닌 맑고 꺠끗한 하늘.
가슴과 어꺠를 활짝 피고,독한 담배연기 대신 맑은 공기를 한껏 집어넣었다.
취기로인해 몽롱한 정신이 번뜩이며 마치 산속에 온듯한 기분이 들었다.
" 이래서 사람들이 윗공기가 좋다고 하는거였네."
방송에서 술은 이제 자제해야지.
하마터면 남의 방송을 폭파시킬뻔 했으니. 앞으로는 좀 조심할생각이다.
남성성을 버릴 생각은 없으니 조금 수위 높은 발언을 자제하는 정도로.
**
" 하악질 하는것 보소."
수의사가 보낸 4장의 사진속에는 각기다른 포즈로 하악질을 하고있는 담덕이가 있었다.
누워서 하악질,식빵을 굽는 자세로 하악질 ,꼬치를 이리저리 건들다가 하악질.
이정도면 진짜로 하악질이 습관인가 싶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나한테는 개냥이니까.
" 그래도 귀엽지?"
" 고양이 주웠다는거 진짜였네요? 왜 주웠어요?"
" 음.. 그냥?"
" 그래요?? 짭."
왠지 어렸을 적이 떠올라 지나치지 못한거였지만 굳이 남에게 밝힐만한 가정사는 아니었다.
모호하게 답변을 내 놓은 후 얼음이 가득담긴 콜라를 쭈욱 들이켰다.
그나저나 진짜 잘먹네.
권아람의 경이로운 먹방쇼는 방송이 끝나고도 지속되었다. 저 아담한 체구에 음식들이 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 궁금했다.
진짜 위에 블랙홀이라도 있는건가?
" 천천히 먹어 아람아 좀."
권아람의 입술이 음식 기름으로 반질거렸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완벽하게 립글로즈로 착각할 모양세.
이지훈은휴지를 3칸 정도 뜯은 뒤, 손을 뻗어 권아람의 입가를 문질렀다.
보면 볼수록 이지은이 떠올라 괜히 챙겨주게 된다. 원래 인싸들은 기피하는 편인데 권아람만큼은 묘하게 편했다.
" 어우 오빠 그런 얼굴로 그런짓 하지좀마요."
" 내가 무슨짓을 했는데."
권아람은 대답대신 똑같이 휴지를이지훈의 입에 들이밀었다.
곧이어 입술에 부드러운 3겹 휴지의 감촉이 느껴졌다.
" 오 좀 설렐뻔."
" 그쵸? 제가해도 이런데 오빠가 하면 어후.. 나라서 버틴거죠."
서비스식 멘트에 권아람이 나무 젓가락을 내려 놓으며뿌듯한 표정을지었다.
한껏 올라간 어깨가 권아람의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애기 해준다.
" 오빠 근데 이거 봤어요?"
" 뭐 말하는거야?"
곧이어 보여지는dlwlgns1의 방송국을 화면. 볼것도 없이 내 방송국이었다.
그리고 보여지는 수많은 댓글에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황무지 같았던 휑한 댓글창은 어디가고, 생기가 넘치는 댓글창이 존재하고 있었다.
ㄴ 방송켜주세요 제바알!! 일용할 양식을 주세요!!
ㄴ 기만자 기만자 기만자 기만자 기만자!
ㄴ 여친 못사귄다며 여친 못사귄다며 여친 못사귄다며!!
이건 안사귀는 거라고 해야지 엄연히 뜻이 다르다고 !!!!!!!!
ㄴ 문열어 문열어 문열어 문열어!!
ㄴ 이사람 얼굴책이나 별스타그램은 안하나요?
물론 댓글창이 혼돈의 도가니이긴 했지만.
처음 받아보는 폭발적인 관심에 얼떨떨한 기분이 든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무슨일이 있었냐는 표정으로 권아람을 쳐다보니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음식을 입에 집어넣었다.
" 잘생겨서곘죠.? "
" 그런건가..?"
어쨋든 유입이 늘어난다는 것은 좋은징조.
어차피 개인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유지영의 도움으로 이뤄낸 쾌거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더욱 열심히 해야한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굵고 짦게 떳다가 태양처럼 져 버리는 방송이 아닌, 얆고 길더라도 끈질기게 오래가는 엿가락 같은 방송이니까.
" 언니 여기요!"
권아람은 유지영의 입가에 살짝 묻은 양념소스를 보며 휴지를 건냈다.
그러자 도리어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싸늘한 눈초리.
한기서린그녀의 눈빛에 권아람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 언,언니.. 제가 뭐 잘못했어요?"
" 아니."
. 권아람은억울한 듯 보였지만 감히개기지는 못한체애꿎은 냉수를 들이켰다.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 지영씨? 아람아?"
순간 둘의 시선이 나에게 온전히 쏠린다.
둘의 대해서 아는것이라곤 유트브 구독자수와 이름뿐,정작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나이와 취미 같은 것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지훈이라는 사람에게 처음으로다가와준 둘인 만큼, 나도 한 발자국은 내딛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술의 힘을 빌려서 말할 수 있을것만 같다. 캔맥주가 수북이 쌓여있는 검은봉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 자기소개 한번씩 어떄요.?"
술을 마신 상태가 아닌, 평소라면 절대 꺼내지 못했을 낫간지러운 말이 튀어나갔다. MT도 아니고..
둘은 커다란 눈을 꿈뻑이다 이내 정신이 돌아온 로봇처럼 어색하게 호응을 하기 시작했다.
" 좋아요!!"
" 좋네요."
**
우리는 땅바닥에 정좌로 앉아 버터오징어와 땅콩을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훅 꺼졌던 취기가 스멀스멀 다시 올라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입이 풀리기 시작한다.
술자리에서는 방송보다는 좀더 진솔하고 현실적인 애기가 오갔다.
방송에서 컨셉을 잡으며 재미를 위해서 하는 술먹방이 아닌,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자리였다.
" 그래서 누나는 왜 방송 시작했어요?"
" 음.. 아무 생각없이 방송보다가.. 아 내가 재보다 롤 더잘하는데 한번 켜볼까? 딱 이런마인드였지."
" 누나도 생각보다 되게 단순하네요? 흐.."
" 큼.. 그럼 너는?"
" 저는원래부터인방을 즐겨보긴 했지만... 그래도 굳이 이유를 꼽자면 돈 때문에 시작했어요.
제가 알다시피 조금 궁하잖아요?"
나름 진솔한 답변에 개그를 넣은거였는데, 그녀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유지영은 그렇다 할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그리고왠지모르게 그 모습을 보자 장난기가 치 솟아올랐다.
" 왜요.. 저 별창같아요?"
" 아, 아니! 그런거 아니야!"
발작을 일으키며 황급히 고개를 내 젓는 유지영. 얼마나 급했으면 작달만한 손으로 내 손을 꾸욱 짓눌렀다.
손 위로 약간은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만큼은 따듯했다.
사람에게 힐링 받는다는게 이런건가?
전에는 일에 치여서 상상도 못했을 온기. 그건 위험할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 장난이었어요."
" 놀, 놀랏잖아.. "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는 유지영. 동시에 손등위에서 느껴지던 가벼운 압력이 없어지려 한다.
그 조그마한 손을 다시 낚아채 도망가지 못하게 그 위에 손을 포갠 후 입을 열었다.
" 돈좀 많이벌게 생긴건 사실이에요. 흐흐.. 유지영 빨대 최고."
지금 할 수 있는건이런식으로라도 감사를 표하는 것 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로 나를 도와줬는지 물어보려 해도 술자리내내 묘하게 대답을 회피하며 레오리를 잘해서라고 대답할뿐 이었으니까.
솔직히 누가 그걸 믿겠는가.
" .. 그, 그래.고마우면 레오리나 열심히 연습해. 잘만 하면 그마도 갈걸?"
" 네. 챌린저님 말.."
ㅡ 쿠웅!
순간 벽이 부딫히는 둔탁한 소리.
깜작놀라 옆을 돌아보니 떡이 된채로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부여잡고 있는 권아람이 보인다.
어찌나 세개 부딫힌건지 고운 이마에 뻘건 혹이 하나 솟아올랐다.
뭐 오빠 술 되게 약하네요? 내로남불 쩌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꽐라를 들쳐매고 침대에 눕혔다.
" 이만 들어가 볼게요. 재밌었어요."
" 태워다 줄까...?"
혹시라도 그런말을 꺼낼까봐.택시는 이미 불러놓은 상태.
" 카카오 택시 불렀어요. 심심하면 또 놀러와도 되요?"
끄덕.
그녀의 흔쾌한 수락에 나는 기분좋게 현관을 나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