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26화 (26/64)

〈 26화 〉 곤란.

* * *

ㅡ 후두두둑.

굵직한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눈을 살며시 뜨고 폰을 확인하니 벌써 시간은 9시34분.

휴대폰의 블루라이트를 맞으니 눈이 시큰시큰해 인공눈물 몇 방울을 눈에 털어 넣은 뒤, 양치와 세안을 깨끗하게 마쳤다.

“ 오늘 영화 뭐보지.”

유지영이 나보고 정하라고 선택권을 넘겼지만, 딱히 내 흥미를 잡아끄는 영화는 없었다.

애초에 영화가 보고 싶어서 유지영에게 영화를 보자 한 것이 아니니까 당연했다.

그나마 요즘 크게 흥행하고 있는 영화를 꼽자면.

ㅡ 도로위의 질주.

ㅡ 너의 여름.

‘ 도로위의 질주가 더 괜찮겠지?‘

너의 여름의 내용과 후기를 확인한 바로는 영화 자체가 달달한 로맨스코미디 영화였다. 대학교를 배경으로 일본 남학생과 여학생이 서로 눈이 맞는 대충 그런 분위기 말이다.

‘ 그건 좀 그렇잖아.’

로코보다는 화끈한 전투와 웅장한 브금이 들어간 도로위의 질주가 더 떙기는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TV에 나오는 드라마도 오글거려서 잘 몰입을 못하는 내 성격으로 보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는 판단이 선다.

CVV 영화관 홈페이지에들어가 상영시간표를 확인해 대충 약속시간과 가장 가까이 있는 시간대를 쭉 훑어봤다.

약속 시간은 2시40분.

너의 여름

12:30 13:55 15:55 17:15

도로위의 질주

12:55 14:40 17:30

도로위의 질주는 인기 작품이었지만 확실히 개봉한지 오랜 기간이 지난만큼 상영의 횟수와 그 텀 이 길었다,

‘2시 40분은 좀 그런데.’

물론 빠르게 입장하면 볼 수야 있겠지만.

“ 쯥.”

나는 혀를 차며 고민했다. 나야 오늘 휴방이라 시간이 많다 쳐도 유지영은 이미 오늘 방송을 키기로 약속한 상태인지라 너무 늦은 시간대에 영화를 보는 것은 곤란했다.

“ 그냥 너의 여름 봐야겠네.”

고민을 거듭하다 너의 여름을 보기로 마음 먹었다.

3시 55분이라는 시간대가 너무나도 적절했다. 만나서 느긋하게 밥 먹고 애기 좀 하다보면 1시간이야 금방금방 가는 시간이었다.

별일 없겠지. 라는 마인드로 영화를 예매하고 톡을 보냈다.

ㅡ 누나 너의 여름 예매했어요. 3시55분 걸로.

예매좌석과 시간을 캡쳐해 유지영에게 보냈다. 곧이어 30초 만에 돌아온 답장.

ㅡ 알겠어~ 이따보자.

ㅡ {알겠다는 이모티콘}

**

바닥에서 조금 뒹굴 거리다가 바구니에 가득 쌓인 빨랫감이 눈에 밟혀서 밖으로 나왔다. 손엔 우산과 바구니를 든 채 터덜터덜 코인세탁소로 걸음을 옮긴다.

ㅡ 덜덜덜 ...

세탁기와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의자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시선은 주지 않은 채, 곁눈질로 앉을만한 자리를 살피고 슬며시 의자를 당겼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폰을 꺼내 자리에 착석해주고. 이어폰을 껴서 먹방을 틀었다.

ㅡ 오늘 먹을 것은 김치치즈피자탕수육! 소고기 탕수육! 짜장면 세 그릇 짬뽕 두그릇! 중식 먹방입니다!

ㅡ입맛이 없어서 간단하게 시켜봤어요! 잘 먹겠습니다!

‘ 오.. 맛있겠다.

영화 보기전에 먹을까..‘

짜장면에 탕수육을 돌돌 감아서 먹는 것이 참으로 맛있어 보였다. 확실히 피밥의 먹방은 뭔가 달라도 다른가?

여러 가지 조합으로 먹어주는게 대리만족을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확실히 사람들이 괜히 많이 먹는 먹방유투버들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메뉴가 많고 다양하니, 눈이 즐겁고 식욕을 자극했다.

말도 안 될 정도의 양을 먹는 유투버들 치고 구독자가 낮은 분들은 보지 못했으니. 어느 정도 신빙성도 있지 않을까?

다만 단점이라면 보는 내가 배부를 정도로 많이 먹는 것 정도지만..

‘ 어차피 끝까지 안 보잖아.’

먹방은 댓글을 읽으면서 대충대충 봐주는게 포인트다. 간간이 스킵도 눌러주고.

ㅡ 간..간단하게요..?

ㅡ 중국집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만한 합의 바라겠습니다..!

ㅡ 6:13 콜라 첫입

ㅡ ㄹㅇ 변기 막히면 ㅈ될 듯 ㅋㅋ

ㅡ 야이 시발롬아 개 드러워 ㅡㅡ

슥 슥.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댓글을 구경했다. 댓글창을 볼 때마다 우리는 X달의 민족도, 전투의 민족도 아닌 드립의 민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매번 봐도 재미있는 댓글들이 하나씩은 꼭 있는 것 같아.

ㅡ 톡.. 톡.

아주 미약하게. 등을 쿡쿡 찌르는 촉감이 느껴졌다.

어찌나 살살 찌르던지 옷을 한겹만 더 껴 입었어도 모를 뻔 했다.

“ 저기요..”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것은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린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여성이었다.

보기 싫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본인의 패션 스타일과 화장이 제대로 잘 어울리는 느낌.

“ ..??”

“ 이지훈씨.. 맞나요?”

“ 네 맞습니다..?”

“ 팬인데...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나요..!”

“ 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져서 순간 사고가 1초동안 정지되었다가 다시 회전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팬?

이렇게 정상적인 분도 내 방송을 봐주는구나. 진짜 감동 먹을 것 같아..

내가 제지를 하지 않으니 요즘은 아에 작정하고 이상한 채팅을 치는 시청자들 때문에 곤란하던 참이었다.

내 반응이 재밌다는데 나는 분명 재미있게 반응해 준적이 없다. 맹세코.

“ 안되나요..”

단번에 시무룩해지는 여성팬분을 보고 얼른 정신을 붙들었다.

“ 됩니다!”

단번에 몰리는 시선.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어느 정도 이런 시선에 익숙해졌다.

물론 이번 것은 그 경우가 틀린 것 같긴 하지만, 지금 나에겐 중요한 것이 아니다!

팬.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들었던 그 단어가 오늘따라 유독 크게 머릿속에 울렸다.

ㅡ 덥썩.

손을 살포시 얹고 말했다.

“ 나가시죠.”

“ 일단.. 사진부터? 찍을까요?”

“ 네네! 싸인도 부탁드립니다!”

“ 포즈 원하시는 거 있으신가요?”

“ 브이 포즈도 좋고 아무거나 다 괜찮습니다!”

여성 팬 분은 아이폰을 꺼내 셀카모드로 전환 한 후, 앵글을 맟췄다.

팔을 위로 쭉 뻗어 보이는게 꽤나 불편해 보였다.

키 차이가 키 차이다보니 어쩔 수가 없었다.

“ 음.. 제가 들까요?”

“ 앗..네 감사합니다..!”

여성 팬분의 얼굴에 미약한 홍조끼가 달아올랐다. 이러면 안되는 건가?

‘ 뭔 상관이야.’

팬 분의 휴대폰을 받아들고 팔을 쭉 뻗었다. 이제야 어느정도 자연스럽게 담기는 둘의 얼굴이 보인다.

“ 아.. 잠시 제가 얼굴 뒤로 할께요!”

“ 아녜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팬 분 사진이신데 잘 찍어야죠.”

얼굴을 앞으로 빼꼼 내밀려는 팬 분을 저지시켰다.

남자라는 이유로 배려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런 사소한 것일수록 더욱 더 익숙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중이었다.

나중 가서 내가 이상하게 변해버린다면.. 내가 내 목을 치리라.

여성분의 얼굴을 뒤로 보내고 얼굴을 오히려 앞으로 내밀었다. 모델 짬밥이 있으니 미소 짓는 것 쯤은 가벼웠다.

“ 웃으세요. 스마일~”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팬 분이 카메라에 비추어진다. 맹수처럼 기회를 노리던 나는 최대한 타이밍이 좋을 때 셔터를 눌렀다.

ㅡ 찰칵.

“ 잘 나온 것 같은데요?”

“ 흐.. 감사합니다!! 진짜 평생 가보로 간직하겠습니다..”

“ 푸흡.. 그래요. 마음대로 하시고 싸인도 해드릴게요.”

“ 근데.. 마카가 없는데..”

“ 편의점 가서 사오죠 뭐.”

편의점 가서 간단하게 아이스커피와 먹을 것들을 강제로 손에 쥐어주고 제일 중요한 마카까지 사서 다시 코인세탁소 앞에 도착했다.

“ 아니 이렇게까지..”

“ 방송에서 자랑 좀 해주세요. 이지훈이 이런 사람이라고..”

“ 당연하죠!! 널리 널리 알리겠습니다.”

“ 그래도..”

“ 진짜 부담은 안 가지셔도 됩니다. 저도 첫 팬서비스로 이렇게 해주는거지. 이제부터 이렇게 안 해드려요.”

편의점에 있는 바나나우유와 핫바 삼각김밥등 있는 것들은 모조리 한 보따리 산게 부담스러웠는지 입을 열려는 팬 분의 발언을 차단시켰다.

그 동안 받은게 얼만데.. 이렇게라도 돌려주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 그럼 사인 할까요? 뭐.. 종이 같은거 있으세요? ”

“아니요! 그 대신저 가슴에다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네?”

“ 아! 등이랑 가슴에다 해주세요! 이 옷은 먼지 하나 안 묻게 집에 잘 보관 하겠습니다!”

“ 그... 건... 조금...”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 괜찮으니까 그냥 해주세요! 빨리 빨리!”

아니 이 사람아 내가 곤란하다고! 팬 분은 내가 옷을 더럽혀도 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내가 반응할 틈도 없이 손에 마카를 쥐게 하고는 슬며시 자기 가슴 쪽으로 당겼다.

술을 마신 듯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런 나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팬 분.

“ 문제 있으세요..?”

“ 없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마카를 휘둘렀다.

마카 촉이 거대한 살덩이에 움푹 파여 들어가는 것 같지만 애써 그 감각을 뇌리에서 삭제시키고 빠르고 정확한 사인을 그려나가려 노력했다.

“ 흐힛.. 이거 은근 간지럽네요..”

‘ 제발.. 소리내지 마세요.’

제발요. 저 팬 분은 아무 생각 없다. 없다. 없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