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오늘 무슨 날인가?
* * *
“ 흣..”
마커를 든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누르니 자동 반사적으로 나오는 신음. 팬 분이 미약하게 몸을 자꾸만 뒤 트는 탓에 손이 어긋나기를 반복하며 옷 위로 살짝은 너저분한 싸인이 그려지고 있었다.
간지러움도 잘 타시는 분이 도대체 왜.
‘ 미치겠다 진짜. 동해물과 백두산이.’
소리만 들으면 굉장히 야릇한 소리였지만 표정에는 간지러움을 참겠다는 비장함이 깃들어있는지라 소리를 내지 말아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
누가 봐도 참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잇새로 세어 나오는 음절을 내가 막을 수는 없었다.
ㅡ흐힛..
ㅡ 햑...
숙제를 끝내는 마음으로 글씨를 막 휘갈겼다. 이 아무것도 아닌 지방덩이에 집착하다가는 아주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이성과는 다르게 본능은 온기를 한 가득 품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제어하랴 사인하랴 여간 바쁜 게 아니었다.
“ 후우.. 끝났어요.”
분명 간지러움 고문을 받은 건 팬 분 일텐데 내 손에서는 땀이 나고 있었다. 중학교 이후로 처음 하는 여성과의 접촉은 내 예상보다 더 크게 다가온 것으로 보인다.
“ 그럼 이제 등도..! 등은 간지러움 별로 안타요!”
네 네 그러시겠죠.
“ 돌아보세요.”
슥. 슥.
고비를 넘기고 나니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싸인이 나왔다. 등조차도 조금 간지러워 하는 것이 보였지만 등 부분은 일부러 마커 촉을 강하게 눌러 스치듯 간질간질한 느낌을 들지 않게 만들었다.
덕분에 빨리 끝난 싸인.
등 부분은 약간 진하게 돼서 번진 반면에 가슴부분의 마카는 중간중간 선이 끊길 정도로 옅게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형태는 비슷하니 만족했다.
“ 영혼을 담아서 한 싸인이니까 진짜 소중하게 해주세요.”
“ 그게 뭐에요 ㅋㅋㅋ 알겠습니다!”
진짜야.
“ 저 죄송한데 바나나우유 하나만 꺼내주실래요? 당 떨어져서.”
“ 이지훈님이 사주신건데 뭘요! 여기요.”
건네 준 우유를 받아들고 천천히 들이켰다.
“ 실제로도 방송이랑 별 다른 점 없는 것 같아서 뭔가 신기하네요..”
한창 바나나우유로 서로 떨어진 기력을 회복하고 있을 때 팬 분이 입을 열었다.
“ 좋은 뜻 인가요?”
“ 좋은 뜻이에요. 요즘 뒷 광고다. 뭐다 말이 많잖아요? xx게이트도 그렇고..”
xx게이트. 대륙의 플랫폼에서 터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명 비제이들이 서로 짜고 친 다음 한탕 크게 먹고 나르려다가 한 사람의 폭로로 인한 나비효과로 까발려진 사건,
유트브의 뒷 광고도 그렇게 밝혀진 것으로 아는데.
나도 유트브로 잠깐 본 것인지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두 행위 모두다 자신의 시청자들을 배반하고 기만하며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는 것.
팬 분의 표정은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물론 빡친 느낌이 더 컸지만.
그 중에서도 꽤나 재밌게 보고 있었던 비제이나 유투버들이 껴 있었나?
“ 걱정마세요. 저는 뭐 ... 안 그럴 껄요?”
“ 항상 믿고 있습니다! 아.. 빨래 다 돌아갔네요.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 이제 방송에서 보면 되겠네요. 들어와 주시는 거죠?”
“ 그럼요~ 이것도 받았는데.”
넉살좋게 음식보따리를 들고 웃은 여성 팬 분은 빠르게 빨랫감을 챙겨 자리를 떴다.
‘ 나도 빨리 가야지.’
날이 습해서 그런지 가만히 있어도 꿉꿉한 기분. 아까 흘린 식은땀이 비바람과 만나 알게 모르게 으슬으슬한 느낌을 선사했다.
집가서 간단하게 따듯한 물 한번만 끼얹고 나오면 될 것 같다.
**
영화관 앞에서 만난 이지훈과 유지영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먹어 허기를 달래고, 영화가 시작하기 약 30분 전.
지하에 위치한 영화관에 도착했다.
고소한 팝콘냄새와 시럽 냄새. 그 외의 비스무리 한 것들이 섞여 군침을 자극했다. 달콤한 냄새에 들어오자마자 판매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팝콘 먹을래요?”
“ 먹고 싶으면 먹어. 나는 꽤 배부르니까 콜라 정도만?”
“ 오케이.”
지훈은 속으로 유지영이 굉장히 조금 먹는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들린 곳은 써빙웨이로 유지영이 고작 먹은 것이라고는 이탈리안 비엠티 15cm에 에그마요를 추가한 것 뿐 이었다.
그 마저도 조금 남긴 탓에 30cm 짜리를 먹은 자신이 먹어 치웠다.
‘ 살 좀 쪄야 할 텐데.’
유지영은 장난으로라도 돼지라고 놀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튀어나올 때는 튀어나오고 나온 굴곡진 몸매라는 점이지만.
그건 저 누나가 이상한 거 아닐까?
유지영이라는 사람의 뼈대와 선 자체가 굉장히 얄쌍한지라 더 말라보이게 만들었다.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발목을 한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
걱정 어린 시선을 한번 보낸 지훈은 판매 카운터에 배치된 키오스크를 두드려 커플 콤보를 주문하고 배치 된 나무의자에 앉았다.
당연하게도 유지영의 옆자리였다.
“ 누나. 뭐 다이어트 같은 거 해요?”
“ 아니..? 왜 살좀 쪘나..? .”
지금 장난 하는건가? 의문을 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아무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다이어트는 아니라는 거고 원래 입이 짧은건가.
이쪽도 보편적인 미의 기준은 똑같았다.
남자라면 키가 작은 것 보다는 큰 것을 선호했고, 여자라면 뚱뚱한 것 보다는 날씬한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혹시나 다이어트를 하냐고 물어본 것인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마른 것 같아서요.”
“ 내가 좀 입이 짦아서. 너무 마르면 별론가..”
유지영은 움츠리다 뒷말을 웅얼거리듯 내 뱉었다. 가만 보면 유지영도 생각보다 자존감이 높지 않은 타입 같아 보인다.
자신이 무슨 말만 하면 말에 다 수긍하는 듯 한 태도를 취하니.
“ 걱정돼서 그러죠. 누나 이러다가 쓰러질까봐.”
“ 에이... 무슨.”
“ 일단 누나는 뭐가 됐든 좀 먹어야 되요. 아람이의 반의 반 정도만 드시면 될 꺼에요.”
“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지훈아.”
유지영은 아람이의 반의 반 만큼 먹으라는 소리에 정색을 하며 귀엽게 자신을 째려봤다. 장난기가 다분하다는 것을 알아채서인지 말투도 엄해진 것 같지만 하나도 안 무섭다.
오히려 포상을 받는 듯한 느낌이랄까.
유지영이 미묘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화내는 것이 보기 좋았다.
“ 그럼 제 반의 반으로 줄입시다. 팝콘 좀 받아올게요.”
그런 유지영의 반응을 반찬삼아 피식 웃으며 일어서 팝콘을 받아 오자마자 한 주먹씩 퍼 먹었다.
영화가 시작하면 팝콘에는 손도 대지 않는 타입이니 영화 시작 전에 부지런히 먹어두자.
팝콘을 먹다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걸 느꼈다.
영화관 입장시간이 되었나 싶어, 천장 쪽에 있는 스크린에 시선을 두었지만 아직 입장까지는 10분이나 남은 상황.
ㅡ 너의 여름 7관 3시 45분 입장.
‘ 왜 갑자기 이렇게 시끄러운거야?’
“ 누나 갑자기 좀 시끄러워 진 것 같지 않아요?”
“ 잼민이들 많아서 그런 거 아냐?”
“ 그른가.”
지훈은 두리번거리며 소음의 원인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웅성거림이 또 자신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등학생 무리가 우르르 몰려와 자신에게 싸인을 요청한다.
“ 오늘 무슨 날인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냐.
“ 휴방 날 이잖아요!”
“ 너 내 찐 팬이 맞구나.”
“ 그럼요 형. 진짜 개 잘생겨서 맨날 챙겨보는데. 실제로 보니까 캠이 구진 거였네 와...”
“ 레알 개 잘생기셨다. 아니 예쁜 건가?”
“ 야야! 그냥 둘 다지 뭐! 형 볼 때마다 보이 크러쉬 오져요 진짜!”
“ 어어.. 고맙다.”
확 높아진 텐션에 정신을 못 차리던 지훈은 어질어질한 상태로 대답했다.
‘ 늠름한 자태로 그딴 제스처 취하지 말라고 어지럽다..’
물론 팬인만큼 반가운 마음도 컸다. 남 팬이든 여 팬이든 내 방송을 봐주는 애청자인건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적응 안 되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남자의 굳건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저런 소녀가 취할법한 자세를 취한단 말인가.
“ 형 화장품 뭐 써요?? 추천 좀 해주세요!!”
“ 어어.. 안 쓰는데.. 로션하나 발라.”
“ 헐!! 거짓말.. 남자끼리인데 말해줘요!”
“ 진짜 없는데..”
“ 쳇. 알겠어요~ 사진이나 한 장 찍어요!”
고등학생이 혀를 차며 카메라를 들었다. 낮에 보았던 팬 분과는 차원이 다른 손놀림이었다.
“ 그래 그러자..”
‘ 원래 다 이런 거야. 애들이 특이 한거야.’
이곳에서 만난 사람이라고는 죄다 여자였다. 그리고 최지현 말고는 크게 괴리감을 느껴 본 적도 없는지라 이런 상황이 낮 설었다.
“ 아니 형 일로 좀 들어 와바요!”
이지훈은 끌려 가는 상태로 자리를 슬쩍 피한 유지영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진한 현자타임을 맞으며 자리에 늘어져 있었다. 초초초 하이텐션에 기력을 모조리 빨린 느낌.
유지영이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와 입을 열었다.
“ 지훈이 인기 많네?”
“ 하.. 말도 마요 저 오늘 진짜 힘들어 죽을뻔 했어요. 낮에도 싸인 하느라 후..”
“ ㅋㅋㅋ왜 남 고생들 발랄하니 좋구만.”
그건 좀.
지훈은 그저 침묵으로 대응 할 뿐이었다.
“ 낮에 싸인한 건 여성분이었어요.”
“ ?”
하룻 강아지가 사자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지만.
자신이 이 정도 까지성장 했다는 사실을 유지영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지훈은 약간 신이 난 채로 낮에 있었던 썰을 풀기 시작했다.
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유지영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터져 나오지 않았을 때 였다.
평소의 그녀라면 웃으면서 축하의 말을 건네어 준다거나 해주었을 턴데. 정말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으니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지훈은 고개를 슬며시 들고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입가에 미묘하게 걸린 썩은 미소와 왠지 모르게 싸늘해진 눈초리가 마치 바늘처럼 자신을 콕콕 찌른다.
평소에 화를 안내던 사람이 화를 내면 x된다고 했던가. 딱 그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에 애꿎은 얼음을 으적일 수 밖에 없었다.
“ 가슴에.. 싸인을 했다고? ”
“ 아 예. 해 달라고 하셔서.”
“ 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