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28화 (28/64)

〈 28화 〉 영화

* * *

이걸 뭐라고 해 줘야 할까. 여자들은 다 여우니까 조심해?

너는 남자가 무슨.. 조심 좀 해라?

충분한 필터링을 거쳐 말해도 듣기 좋은 소리가 튀어나오지는 않을 것 같아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사심 같은 건 분명히 없었을 것이다. 그냥 팬이 해달라니까 어쩔 수 없이 해줬겠지.

아까도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본 바로도 남고생 팬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휘둘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다 더해, 다소 여자 같은 이지훈의 성격상 딱히 거부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가슴에 싸인을 하는 모습이 도화지에 그려진다.

그 팬이라는 여자가 사심을 품고 실실 쪼개며 싸인을 받는 것도 함께였다.

‘ 그 미친년은 뭔데 지 가슴에 싸인을 해 달라고 하지?’

해달란다고 그 제안을 덥썩 받아 무는 이지훈에게도 화가 조금 난 건 사실이었지만, 당연히 근본적인 분노는 그 정체모를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스트리머가 특수성이 있는 직업이라고 해도.

그녀의 상식선에서 처음 보는 남자에게 가슴을 들이밀면서 싸인을 해달라는 것은 절대로 이해 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쭙. 일단 들어가자.”

타인을 향한 분노를 굳이 지금 터트려서 분위기를 망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유지영은 콜라를 먹으며 타들어가는 속을 달랬다.

“ 네.”

지훈은 조심스럽게 유지영을 관찰하듯 뒤 따라가며 말했다.

‘ 괜찮은 건가?’

일단 어찌 저찌 넘어간 것은 좋지만. 아까 탄식을 내 뱉던 유지영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그 이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긴 했어도.

그건 분명 정말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 그냥 거절할걸 그랬네.’

찝찝한 마음을 안고 7관에 들어가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옆 좌석에 앉은 유지영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스름한 조명 덕인지, 유지영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빛났다.

조그마한 손으로 콜라를 쪽쪽 빨던 유지영이 시선을 느꼈는지 지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 왜?”

“ 기분 안 좋아요?”

“ 아니. 내가 왜?”

“ 아닌데.. 안 좋아 보이는데요?”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유지영은 내심 찔렸지만 여기서 인정해 버리면.. 꼴이 우스워 질 거라고 믿었다.

여자가 돼서 남자한테 서운한 마음을 토로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이지훈의 집요한 시선을 피한 것도 그래서였다

“ 짜증 낼 거 알았으면 안하는 건데..”

조용한 목소리로 이지훈이 중얼거린다. 무슨 소린가 해서 뻔히 쳐다보니까 이지훈이 얄밉게 웃었다.

“ 왜요? 팝콘이나 좀 먹어요. 자.”

“ .. 배부르다니까.”

유지영은 그 말과 동시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쏘옥. 하고 입속에 들어오는 팝콘.

진한 카라멜로 코팅되어서 색이 노란 카라멜 팝콘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시럽의달콤함을 느끼게 된 유지영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 너,너 무슨..”

“ 손 닦았어요.”

그 말이 아니잖아.

분명히 입속에 팝콘과 함께, 가느다란 이물질이 들어갔다가 나왔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이지훈의 손..이 분명했다.

“ 아. 영화 시작한다.”

그 태연하다 못해 무심한 한 마디에 유지영도 입술만 달싹이며 스크린을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

‘ 이 시발 알바 새끼들 죽일까.’

지훈은 빈 컵을 우그러트리며 화를 삭이고 있었다.

너의 여름.

네이버 관람객 평점과 평론가 평점 또한 좋은 아주 무난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400만 이라는 관객수와 수많은 빅 데이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으니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훈이 생각지도 못한 아주 큰 쥐 덫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로 영화가 이쪽 세계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

그건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치명적인 단점이다.

남자가 손가락을 꼼지락 대면서 여선배의 고백을 대차게 거절 한다던가. 그런 것들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보다가 그런 공격에 당했을 때는 육성으로 육두문자를 내 뱉을 뻔 했다.

지훈은 흐느적대며 유지영의 얼굴을 구경했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장면 장면마다 표정이 하나하나씩 바뀌어서 보는 맛이 있었다.

혹시라도 신경 쓰일까 숨을 죽이고 봤으니 알아챌 일은 없을 것이다.

‘ 아 또다.’

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몰입하는 표정.

유지영은 손까지 쥐었다 피며 영화에 몰입하고 있었다.

자막을 안보고 있어서 의미모를 일본어만 들리지만 대충 엄청 중요한 장면이 아닐까?

유지영은 잘 가다듬어진 손톱까지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영화를 시청했다.

뭐가 저렇게 심각한걸까.

지훈은 잠시 영화의 내용이 궁금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옆으로 내 저었다. 아까의 그 망측한 광경을 다시 볼 자신은 없다.

‘ 누나 얼굴이나 봐야지.’

변태 관음증 환자 같다고 취급해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유지영을 보는게 훨씬 더 유익할거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러닝타임 2시간20분에 달하는 빌어먹을 영화가 끝났다. 영화의 쿠키영상 까지 보고나서야 자리에서 엉덩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지훈은 유지영의 손에서 빈 콜라 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며 말했다.

“ 재밌어요?”

“ 응. 완전 재밌던데? 특히 하이라이트 부분..! 역시 평점은 거짓말 안 한다니까.너도 볼만했지?”

음 그렇구나.

잔뜩 상기된 표정을 짓는 유지영을 보니 도로위의 질주를 볼 걸 이라는 후회는 사라졌다.

남은 콜라와 팝콘을 다 비우고 말했다.

“ 네. 저도 볼만 했어요. 오랜만에 나와서 보니까 좋네요.”

“ 그럼.. 다음에 또 보러 올까?”

“ 또...”

“ 싫으면 말고..”

잠시 표정이 굳는 이지훈을 본 유지영이 당황하며 말을 틀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행히도.

“ 그래요 도로위의 질주 상영 끝나기 전에 보러오면 되죠. ”

라는 긍정의 표현이었다.

“ 이제 뭐 할까? 배 안고파?”

“ 집가야 하지 않을까요. 누나 방송도 켜야 하고.”

“ 으.. 막걸리에 파전 땡기는데..”

유지영이 먹구름을 잔뜩 낀 하늘을 보며 말했다.

일단 술이 들어가면 방송을 2시간은 늦게 킬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심했다.

비 오는날 파전 막걸리는 먹고 싶은데..

유지영이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자 이지훈이 말했다.

“ 그럼 오늘 같이 술 먹방이나 할까요?”

“ 너 휴방인데 괜찮겠어?”

“ 네.. 뭐 휴방이라고 특별한 걸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방송만 안 킨다 뿐이라서.

어차피 저희 둘 다 방송 시간은 짧잖아요?”

“ 그래도 휴방인데.. ”

“ 유트브에 올릴 소스만 좀 주세요. 요즘 이사 생각중이라 영상도 꾸준히 찍어 내고 있거든요?”

“ 그래..?”

실제로 유튜브나 생방송이나 술이라는 주제는 치트키였다. 시청자 수나 조회수가 대박을 쳤으면 쳤지 절대로 쪽박을 찰 일은 없는 조합.

한번 정해진 이상 막힘은 없었다.

둘은 주차장으로 이동해 유지영의 차를 타고,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 방송을 켰다.

야외 방송용으로 항상 차에 구비해 놓은 장비들이 있었다. 유지영도 히키 기질이 있는지라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나름 프로방송인인 만큼 구색은 다 맞추어 놓았다.

[ 게스트와 술 먹방.]

ㄴ ㅇㅎ

ㄴ ㅇㅎ

ㄴ ㅇㅎ 웬일로 구라 안 까고 진짜 켰네. 믿고 있었다고!!!!!!!

ㄴ 유지영의 술먹방... 이건 귀하네요.

ㄴ 레즈야.. 비오는 날 파전 막걸리 국 룰이지?

ㄴ 벤츠 모는 여자 ㄷㄷㄷ

ㅡ 밴츠가 아니라 세금 잡아먹는 애물단지 아니냐 ㅋㅋㅋㅋㅋ 복귀 한날 이후로 차타는 거 오늘 첨 보는거 같은데.

ㅡ ㅂㄷㅂㄷ오지네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라 그냥 레즈야...

“ 하이~”

ㄴ 게스트 누구임? 게스트 누구임? 게스트 누구임?

“ 이지훈이라고 합니다. 너무 자주 나와서 질리시죠?”

ㄴ 오우 쉣... 그저 빛...

ㄴ 저희 지영이 방송에 출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ㄴ 휴.. 오늘 안 들어오면 인생 절반 손해 볼 뻔 다행이다.

ㄴ ㅜㅑ 오늘 학원 뒤졌다.

ㅡ 부모님한테 니가 뒤지겠지 ㄹㅇ ㅋㅋ

ㅡ ㅆ발련이.

[ 피리부는 여장군님이 1000원 후원]

ㅡ power sex

ㄴ 혼틈 섹ㅋㅋㅋㅋㅋㅋ

ㄴ 이지훈과 유지영의 술먹방.. 이게 야쓰지 뭐겠어!? 안그래?

ㄴ 무친련... 무친련...

‘ 역시 매콤하네.’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자신의 시청자들의 비하면 확실히 채팅이 조금 어지러웠다. 내 방송이 신라면 정도라고 치면 유지영의 방송은 틈새라면에 고추 송송 정도?

뭐 이쪽이 더 체질에 맞아서 상관은 없다만.

운전 중에는 신경을 긁지 않기를 바랬다.

유지영의 운전 실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과하게 힘이 들어가 있어서 나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대버렸다.

흠칫.

살짝 옆을 돌아보는 유지영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 누나 천천히.’

“ 여러분 운전 중에 신경 긁지 마세요. 제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순간 옆으로 찌릿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드는 것 같지만, 무시했다. 할 말은 해야지.

ㄴ 아 ㅋㅋㅋ

[ 말랑이님이 3000원 후원]

협박 당해서 차를 타고 있다면 눈을 3번 깜빡거려주세요.

깜빡 깜빡 깜빡

“ 너...”

“ 눈이건조해서 허허...”

걸려 버렸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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