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31화 (31/64)

〈 31화 〉 후폭풍

* * *

결국 아파트까지 유지영을 업고 올라왔다. 중간에 입주민분들을 밀폐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 얼마나 민망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온갖 고난과 역경을 거쳐서 드디어 도착한 유지영의 집 현관.

안심하긴 이르다.

아직 마지막 관문인 도어락 비밀번호가 남아 있었다.

“ 어우 진상. 비밀번호 좀 눌러봐요.”

“ 으음...”

ㅡ 띡 띡 띡

문이 열리지 않는다. 원래대로라면 뒤에 띠로리­ 같은 경쾌한 음정이 들려야 할 타이밍이었다.

“ 빨리요 에이.. 설마.. 아니죠?”

나는 비몽사몽한 유지영에게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순간적으로 최악의 상황이 전구처럼 뇌 속에서 번쩍였기 때문이다.

술 취했다고 자기 집 비밀번호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 이거.. 왜 안 열려어..!”

엄한 문 손잡이를 위 아래로 덜컥 당기는 유지영. 아주 잘 흔들리는 문 손잡이가 내 마음을 표현한 듯 했다.

“ 자.. 다시 한번 해봐요 얼른. 침착하고.”

그렇게 내가 불안에 떨면서 말하자, 유지영은 다시 도어락을 두들겼다.

사람의 습관이란게 무서운 것이라고 정말 다행히도 문이 열렸다.

“ 집이다아.”

“ 저는 집 이제 가야되는데 허허,.”

너무나도 정반대인 상황에 절로 한 숨이 나왔다.

“ 잘가아~”

얄밉네?

미련 없이 나를 보내는 유지영을 침대에 눕혔다.

이 누나 혼자 살면서 침대는 5인용 정도 쓰는 것 같은데.

유지영을 침대 벽면 쪽으로 밀어 놓고 침대에 살짝 걸터 앉았다.

이미 수면욕이 성욕을 이긴 상태인지라 별 생각은 안 든다. 다만 나는 집 언제가지라는 막연한 걱정뿐.

유지영은 이불보를 꼭 쥔 채, 옆으로 몸을 둥글게 말고 고개를 파묻었다.

근데.. 저 누나 뭐하는거야?

“ 어어? 그만!”

찰싹. 윗옷을 벗어 제끼려는 유지영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렸다.

심장이 철렁했다.

뭐 여자는 집에서 팬티바람이 국룰이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이라도 적용 된 걸까?

아니면 그냥 술 마시면 옷을 벗는 고약한 버릇이 있는 것 일수도 있었다.

‘앞으로 술은 절대로 못 마시게 해야겠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유지영을 멍석 마냥 돌돌 말았다.

번데기처럼 변한 유지영이 나를 향해 시선을 던지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한 번 더 굴렸다.

“뭐야아..?”

“ 말 해도 모를걸요.”

나는 간단하게 목만 축이고 찜질방으로 향했다.

당연히 집가서 잠을 청하는 것이 베스트였지만 졸음이 몰려와 머리가 띵할 정도였다.

아직 그렇게 까지 늦은 시간도 아닌지라 택시를 타고가기에는 너무나도 차가 막히고, 지하철을 타고가자니 너무나도 피곤하다.

아마도 최근에 뭐 딴 짓을 한답시고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않은 것이 지금에 와서야 터진 것 같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찜질방.

나는 대충 눈에 밟히는 24시 사우나에 들어가 결제를 마쳤다.

찜질가운을 받아들고, 일명 수면 굴에 들어간 나는 기절하듯 수마에 빠졌다.

**

유지영은 살갗을 파고드는 푹신함을 만끽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여느 때와 똑같다.

익숙한 천장과, 아침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따스한 자연광.

유지영은 둘둘 말린 이불을 걷어차고, 공기를 맞으며 끙끙 앓는 신음을 냈다.

온몸이 축축하다. 겉 옷 아래에 있는 나시가 땀으로 흠뻑 젖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아주미적지근한 온도의 바람마저도 매우 시원하게 느껴졌다.

“ 어윽.. 근데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숙제가 있는 듯한 기분에, 유지영은 천천히 옷을 벗으며 생각했다.

화장실 거울에 보란 듯이 비추어지는 땀으로 반질거리는 몸. 깨질 듯이 지끈거리는 머리까지.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바보 아닐까. 유지영은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로 기억을 더듬었다.

술... 이지훈... 방송..

점점 흩어졌던 기억이 퍼즐처럼 맞추어진다. 이내 너무나도 선명하게 자신이 부린 추태들이 하나씩 떠 올랐다.

“ 이런 씨....”

이지훈에게 업혀서 몸을 뒤 흔들며 교태를 부리던 것도, 이지훈에게 담배냄새가 심하다고 한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애 앞에서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려 한 것도.

전부 다.

심지어 옷을 벗은 것은 보통 남자들이었다면 신고를 해도 할 말이 없는 짓이다.

단 둘이 있을 때 옷을 벗은 것만으로도 남자들이 당황하기에는 충분하니까.

유지영은 이게 꿈이길 바라며 볼을 꼬집었다. 빨간색 자국이 날 정도로 강하게.

하지만 야속하게도 벌겋게 달아오른 볼이, 살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뭉근한 통증이.

이건 모두 현실이라고 말해준다.

지금이 몆시지?

유지영은 얼굴에 비누거품을 닦아내지도 않고 핸드폰을 향해 달렸다.

PM 2:45

“ 얼마나 쳐 잔거야..”

이 정도면 잔 게 아니라 잠시 죽었다 깨어난 것 아니야?

유지영은 자신의 잉여력에 경의를 표하며 혀를 찼다.

ㅡ 읽지 않은 메시지 11개.

읽기가 두렵지만. 천천히 판도라의 상자를 열 듯 조심히 메시지를 정독해나가는 유지영.

첫 톡은 너무나도 친숙한 최지현. 그렇다면 두려울 것은 없었다.

[ ㅋㅋㅋㅋㅋ아 개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뭐냐?]

ㅡ사진.

“ 이건 또 뭐야.”

이지훈의 커뮤니티에 올라온 자신의 사진.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로 있는 아주 멍청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 나 미친년 맞는 것 같아..]

[ ㅇㅇ너 같은 미친년은 쳐 맞는게 맞지? ㅋㅋㅋㅋ]

재미도 없는 드립에 반응해 줄 이유는 없었다. ㅎ; 한 글자로 대응을 마쳤다.

유지영의 신경은 어차피 한 곳으로 쏠려 있었다.

읽씹을 할 수도 없는 이지훈의 문자.

‘전화하자.’

[ 오. 드디어 일어나셨네.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 그.. 미안.]

[ 나름 재밌던데요. 밥이나 얼른 챙겨드세요. 저 게임중이라 끊을게요. 톡도 한번 보시고.]

[ 어... 어 그래.]

“ 나만 심각했던 건가..?”

이지훈의 담긴 태연한 말투에, 걱정을 한 자신이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유지영은 의아해하면서도 조금은 편한 기분으로 세안을 끝 마쳤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설마.. 손절 당한건 아니겠지?

자신의 경험상으로 이건 아무리 보살이라도 짜증날 만 했다. 입장을 바꿔서 다른 사람이 술이 떡이 되어서 그런 짓을 한다면?

엉덩이를 걷어 차주지 않았을까.

“ 하아.. 모르겠다.”

당사자가 그렇다니까....

잠시 걱정되었지만 이지훈의 성격상 대놓고 말하면 말했지 괜히 돌려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지식으로, 남자의 마음을 알아채기는 너무 어려웠다.

남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물며 그 남자가 이지훈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 얼굴 실화냐..”

유지영은 자신의 기준으로 띵띵 부은 얼굴에 경악하며 얼린 마스크팩을 얼굴에 하나 올렸다.

얼마나 잔 것인지 얼굴이 평소에 2배는 부어올라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얼굴의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던 유지영은 이지훈이 보라는 톡이 궁금해져 폰을 다시 들었다.

[ 이거 좀 잘나온 거 같아요 ㅋㅋㅋ]

잘나오긴 했네. 니 얼굴이

바보같이 찍힌 자신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속의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었다. 곱게 휘어진 눈매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입가.

그와 상반되는 왼쪽 팔에 새겨진 강렬한 사자문신.

이런 애한테 내가 그렇게 추태를 부렸다고?

이지훈이 아무생각이 없다고 해서 유지영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생각없이 추태를 부린 만큼,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떠오른다.

넒은 등판과 하얀 목덜미.

담배냄새와 섞인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끝까지 챙겨주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될 거 였다면, 이성의 끈을 조금이라도 잡고 있을걸.

어제의 호사를 누린건 자신이 아니다. 멍청하게 네 발 짐승이 된 유지영이었지.

[ 너만 잘 나와 놓고 무슨]

[ 아닌데요? 이 사진 포브스 선정 ‘세상에서 제일 유지영이 잘 나온 사진인데요?’]

[ 파리 잘 들어갈 것 같이 나온 사진 1위.]

[ 그 ‘드립’ 빨리 사진 지워ㅡㅡ ]

[ 놉. 이 사진은 저만 볼 꺼니까. 안 지울거에요. ]

[ 에휴.. 방송 잘해라.]

[ 제가 할 말인 것 같은데 뒷수습 하는거 구경이나 가야겠다.]

“ 아.”

남의 집 걱정 할 때가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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