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합방
* * *
‘ 많이 덥나.’
앞장서서 걷고 있는 이채린의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택시를 부를까 고민하다, 이채린의 앞으로 살포시 걸음을 옮겼다.
물론 나도 땡볕에 노출 되는 것은 달갑지 않지만, 앞에서 저런 여자가 헥헥 거리며 걷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막아도 더운 건 똑같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나을 것이다.
우리 편집자님은 지켜줘야지.
“ 누나 제 얼음 좀 먹어요.”
“ 고마워..”
아까 아무생각 없이 얼음이 잔뜩 든 컵을 버린 업보를 받는 이채린을 구원해주니 얼굴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무의식적으로 내 등 뒤 그늘로 꼼지락 대면서 숨은 이채린은 그제서야 숨통이 조금 트였는지 밖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집이 어디야..?”
“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삼계탕이라도 하나 시킬까요?”
“ 에이.. 무슨 여자가 이 정도로..”
얼씨구, 앞에서 고기방패 역할하는 사람 서운해지는 멘트다. 알고서 말하는 건 당연히 아닌걸 알기에 나는 아무말 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갔다.
아까도 말했듯이 집과 카페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이지은이 오늘 놀러나간걸 감안해서 이채린을 부른 것이기 때문에 집에는 나와 이채린 단 둘 뿐이었다.
현관문에서 살짝 머뭇거리는 이채린에게 말했다.
“ 아무도 없으니까 편하게 들어와요.”
“ 어.. 그래.”
입은 왜 벌리고 있는거지? 어쩃든 우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파워냉방을 키고 잠시 의자에 앉았다.
“ 이제야 살겠네.”
“ 레알 인정...”
개인적으로 선풍기를 틀어도 에어컨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라고 생각한다. 시원한 공기가 없으면 선풍기 바람도 더운 바람이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많다.
" 수박만 있었으면 완벽한데. 아쉽네요"
" 수박 좋지.."
“ 방송 켜서 노가리나 까죠.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 근데.. 시청자들이 주접떠는 걸로 보면 어쩌지..”
“ 음.. 일반인들한테는 착할 꺼에요. 아마. 혹시 뭐라고 하면 방송 바로 꺼드릴게요.”
일반인들은 건들지 않는다.
이 규칙은 누가 딱 집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시청자들 즉 트수들과, 방송하는 스트리머 사이에 약속된 암묵적인 룰이었다.
어느 정도 이채린을 안심시킨 후 방송을 시작했다.
[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송제목: 8시 우몽어스 합방 대기조. 초특급 게스트 초청.
ㄴ 하위~
ㄴ ㅈㅎㅈㅎ
ㄴ 생방 너무 달아~
ㄴ 씻고 누웠는데.. 이지훈방송? 이건 참지. 좀만 이따 옴.
ㄴ 자아~ 드가자~
[ 핀칭이님이 75명을 호스팅하셨습니다!]
“ 방송시작부터 핀칭이님 호스팅 감사합니다. 난하 난하.”
ㄴ 나나~
ㄴ 난하~
마른 목을 물로 한번 축이고 입을 열었다.
“ 오늘은 우몽어스를 처음 하는 저를 위한 강사님 한 분을 초청했어요.”
ㄴ 우몽어스 한 판 하려고 강사님을 ㅋㅋㅋㅋㅋ?
ㄴ 임포 잘 걸리는 법 알려주던가 ㅋㅋ
ㄴ ㄹㅇㅋㅋ
“ 자 나와주세요.”
“ 안녕하세요..?”
이채린은 머쓱하게 손을 흔들며 나왔다.
[ 누구세요..?]
[ 아빠가 낯선 사람 문 열어주지 말라고 했는데..]
[ 설마.. 여자친구...? 사랑했다 씨발놈아..]
“ 그런거 아니에요!!”
“ 누나?”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는 이채린에게 아주 조금 마음의 타격을 입었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이채린을 바라보았다.
[ 0고백 1차임 ㅋㅋㅋ]
[ ㅋㅋㅋ해명이 원탑 급이긴 한데? 우몽어스 강사로 인정 해드리겠읍니다!]
[이거였네 ㅋㅋㅋ]
“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과하게 긴장 한 듯싶었다. 어깨를 살살 주무르며 이채린을 의자에 앉히고 귀에 살짝 속삭였다.
“ 저거 다 장난 치는거니까 반응 할 필요 없어요. 오케이?”
내 방송을 제일 많이 보는 편집자인 만큼 이채린도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이채린도 대충 분위기를 파악한 듯 입술을 앙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연애하니? 유지영버려!? 어!? ]
“ 님들 뒷담 좀 깠어요.”
[ 인성 문제있어?]
[ 그걸 말하면 뒷담이 아니잖아 ㅋㅋㅋ ]
“ 일단 이 사람은 님들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
[ 갑분 스무고개?]
[ 정답! 게스트!]
ㅡ개소리 쳐내.
[ 정답 유치원 교사!]
[ 정답! 학교친구]
그 후로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막 던지기와 그럴싸한 추측들이 쏟아져 내렸지만, 이채린의 정체를 맟춘 사람은 없었다.
나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트수들의 신경을 벅벅 긁었다.
“ 아 이걸 못 맞추네. 편집자잖아요. 평소에 아는척을 그렇게 해놓고...”
[아니 그걸 어케 맟춤 ;;]
[ 복면왕가보다 더 하네. ㄹㅇㅋㅋ]
[ 아 존나 꼴받네 스무고개 한 판 더해!]
“ 뭘 한판 더해요. 편집자라니까.”
[ 갓집자면 초특급 게스트 인정인데?]
[ 죽은 유트브 살려놨으면 ㅇㅈ이지 ]
[ 가‘족같은’ 분위기로 일 시키나본데 오지게 굴린 듯 ㅋㅋ]
“ 족같은 새끼한테 벤 한 번?”
[ ㅈㅅ;]
역시 벤 협박만큼 효율적인 게 없네. 나는시청자들과 가벼운 티키타카를 나누면서 방송을 이어나갔다.
**
ㅡ안녕하세요~
ㅡ하이하이!
ㅡ안녕하세용~
유지영, 최지현 외에도 말티 깡수미 등, 게임비제이 들이 아닌, 평소 일반 소통방송 (Just Chatting)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껴 있었다.
남자 목소리도 간간이 들리는 것 같고.
나도 그 사이에서 타이밍을 기다리다짤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 안녕하세요.”
“ 아! 지훈님이랑 게임 진짜 하고 싶었는데.. 반갑습니다!”
귓가에 박히는 독특하고 발랄한 목소리. 유트브에서 많이 듣던 꽤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 목소리가 그러니까.. 말티?
가물가물 했지만 말티 만큼 독특한 목소리는 기억에 없었다.
“ 저도 말티님 한 번 뵙고 싶었습니다.”
“ 와 영광..!”
“ 아오 님들 좀 조용히 좀 해주세요!”
[아무말 대잔치 정신 나가겠네.]
[오늘 내에 시작 할 수 있냐 이거?]
합방의 지각자 때문에 대기시간이 길어진 탓에, 디스코드가 난장판이었다.
사태에 심각성을 느꼈는지 이 합방의 주최자인 모스트가 상황을 정리했다.
“ 자자! 리로도 왔으니까 시작하자. 확정시민 미션은 끌게 다들 동의?”
“”어 보감.”“
스트리머들 답게 받아치는 멘트도 심상치가 않았다.
우리는 정말 우여곡절 끝에 게임을 시작 할 수 있었다.
모스트가 설정한 게임의 옵션은 대충 이랬다.
킬 쿨타임: 22.5초
임포스터 수: 2명
이동속도 1.5x
확정시민 미션: 꺼짐.
[ 5초 뒤 게임이 시작합니다.]
**
" 이거 지훈님 같은데? 처음에 오른쪽 동선 지훈님하고 지현님밖에 없었어."
말티가 확신의 찬 어조로 말했다. 이지훈은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여론은 기운 상황.
" 저 아니라니까요..."
이지훈이 할 수 있는건 허접한 반론 뿐이었다.
" 시민이 아니겠죠. 지훈님.. 죄송해요."
ㅡ띠릭!
빨간색 캐릭터 위에 무수하게 찍히는 투표.
'미치겠네.'
지훈은 우주공간으로 날아가는 빨간색 캐릭터를 보며 허망하게 웃었다.
[ 이지훈님은 임포스터가 아닙니다.]
"앗...아.."
몇 번째야 이게?
이지훈은 시민임에도 투표로 죽어 나름의 억울함을 표출하고 있었다.
벌써 시민인데 투표로 죽은 횟수만 3번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채린만 없었다면 아마강하게 샷건을 치지 않았을까.
이지훈은 샷건 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으며 생각했다.
이건 뇌지컬 게임이 아니라고.
몆 판을 연속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던 한 가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몽어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뇌가 아니라 언제든지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말 빨과 사람들을 선동 할 수 있는 정치력이라는 것.
그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정치력을 가지지 못한 이지훈에게 우몽어스라는 게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알리바이 증명을 좀 하라고 ㅋㅋㅋ]
“하.. 말해도 안 믿어주는데 어쩝니까.”
“ 으음...”
이지훈은 한숨을 짙게 내뱉은 후.
자신과 똑같이 짧은 탄식을 연속해서토하는 이채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채린은 고개를 휙 돌려버렸지만 이지훈은 똑똑히 보고 들었다.
피식피식 웃는 이채린의 웃음소리와 ‘ 아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대놓고 비웃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끅끅 대는 것이 더 굴욕적이었다.
그건 진짜로 상대가 못할 때 티 내지 않기 위해 하는 행동이니까.
“... 누나가 한 판 해보실래요?”
“ 응..? 아냐아냐.”
“ 아니긴요.. 제가 웃는 거 계속 들었는데.”
[ ㄹㅇㅋㅋ 내가 봤음.]
[ 저 실력이면 훈수충도 인정이긴 한데..]
“ 미, 미안.. 그럼 한판만 해볼까..?”
“ 네.”
이지훈은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스트리머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이채린이 대신 게임을 진행하게 되었다. 스트리머들 또한 계속 억울하게 죽는 이지훈이 불쌍해 보였는지,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 ㅋㅋㅋㅋㅋㅋㅋ아무도 반대 안 하는거 뭐냐?]
[ ㅈ버그인 듯?]
[ ㄴㄴ사실 이지훈만 죽이는 몰래 카메라였던 거임.]
“ 자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시작을 알리는 모스트의 목소리에 이채린은 비장한 표정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곧이어 어딘가 음산한 브금이 울리고 화면에 떠 오른 것은.
[ 당신은 임포스터입니다.]
“ 나이스!”
이채린이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