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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35화 (35/64)

〈 35화 〉 합방(3)

* * *

“뒤에서 화면만 잘 찍히게 찍어주세요.”

[ 편집자가 아니라 노예였네 ㅋㅋ]

[ ..나쁘지 않을지도?]

[ 무히려 좋아~]

[칼질 좀 치네]

[ 저 정도면 엉성한건데?]

칼질로 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김치 한포기를 잡고 일정한 속도로 썰고 있는 중이니까.

‘ 칼질이 그냥 칼질이지.’

그냥 앉아서 애기 좀만 하고 있으면 빨리해왔을 건데. 이채린이 한사코 도와준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별거 아닌 요리를 찍게 되었다.

나는 접시 위에 키친타올을 깔고, 그 위에 노릇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김치는 구운 김치와, 생 김치. 두 개 다 준비했다.

“ 맜있는 냄새..”

삼겹살과 김치 이것만큼 맜있는게 있을까? 이채린은 이미 기름에 절여진, 김치와 삼겹살을 보고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카메라를 찍는 와중에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아주 잘 보일 정도로.

그대로 놔둔다면 내가 냄비 밥을 하는 동안 삼겹살이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시원한 김치와 삼겹살을 잘 싸서 이채린의 입에 가져다 댔다. 처음엔 거절하던 이채린이었지만, 내가 딱 한 번 더 권유하자 거절하지는 않았다.

“ 한입?”

“ 아...”

[우리도 줘 씨바알~]

[ 응애 나 아기 트수. 나도 한입조.]

[ 아.. ㅆㅂ안되겠다. 삼겹살 시켜야지.]

[ 배달 삼겹살은 갬성이.. 부족한데..]

“ 개 맛있어...”

이채린은 황홀한 표정으로 화면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고작 삼겹살 하나에 저렇게 반응해주니 기분이 좋기도 민망하기도 하다.

내가 해주는 요리를 겉으로라도 맛있게 먹어 준다는 것 하나로도 음식을 준비할 맛이 났다.

[ 안 봐도 맛있어 보임 ㄹㅇ]

[ 아는 맛이 가장 못 참지.]

나도 입으로 한 점 가져 간 뒤. 냄비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열자 그 즉시 풍겨 오는 고소한 냄새. 주걱으로 밥을 몇 번 휘저어 보니 밥도 아주 포슬포슬하게 잘 지어진 것이 만족스럽다.

“ 이제 카메라 놔두고 이것 좀 가져가 주실래요?”

“ 오키.”

쌈장 기름장, 같은 부수적인 것들을 전달하고 밥까지 퍼서 걸상을 깔고 앉았다.

밥 묵자.

##

[ ㅋㅋㅋ이제 뭐함?]

[ 노가리?]

“ 저희도 뭘 할지 모르겠습니다. 슬슬..”

[ ㅈㄹ ㄴ]

[ 쉬도 때도 없이 런각잡네..]

[ 가지마 가지마 가지마!]

“ 아니 편집자도 좀 빨리 가서 쉬거나 편집해야죠.”

맞잖아.

“ 너는 방송 좀 오래해야지.. 편집할 거 없어.”

오랜만? 아니 거의 처음으로 보는 듯한 이채린의 단호한 모습이었다. 조금 당황스럽네.

[ 고생이 많다... 집자야.]

“ 감사합니다~”

“크흠.”

진심이 담긴 말이 내 정곡을 찔렸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길게.. 하지 않았네.

방송시간을 보니 3시간이 조금 넘었다.

방송종료에 가져다 댔던 커서를 슬쩍 화면 밖으로 감추고 공손히 앉았다.

“ 그럼 할 거 추천좀..?”

[무친년... 무친년...]

[겜이라도 더 하던가.]

“ 보드게임 같은 거 없어?”

“ 할리갈리 있긴 한데 그거라도 어떻게 한 판 고?”

“ 고.”

보니까 채팅창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할리갈리야 워낙 유명한 보드게임이니 트수들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간 것 같았다.

보드게임은 미니체스와 미니 바둑도 보였는데 그걸 꺼내는 순간 빗발치는 훈수를 감당해야 하기에 조용히 다시 자리에 넣었다.

방구석 ㅈ문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니.

“ 룰은 알죠?”

“ 모르면 간첩이지.”

그 정도였나? 카드를 내다 똑같은 과일이 5개가 되면 종을 치는 되는 게임이니 어려울 건 없었다.

“ 벌칙도 하나정하죠?”

“ 뭐로 할까.. 늦게 누르거나 잘못 누를 때 마다 딱밤?”

“ 감당 가능한 거 맞죠? 그럼 너무 아프니까 스택 두 번 쌓이면 그렇게 하기로 하죠.”

원래 카드가 다 동나면 끝나는 게임이지만, 우리 식대로 룰을 약간 변경했다.

카드를 잘 배분 한 뒤 게임을 시작했다. 벌칙이 걸린 만큼 이채린도 나도 절대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상태였다.

슥.

탁.

슥.

탁.

몇 번의 공방이 오가고 드디어 이채린에게서 바나나5개가 그려진 그림 카드가 떨어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종에 손을 가져갔다.

평소의 둔탱이 같던 사람은 어디 가고, 훌륭한 반사 신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손 위에 손이 겹쳐졌다. 겹쳐 졌다기보다는 파리를 잡듯이 내려 찍었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중요한 건 첫 게임을 내가 가져 왔다는 것이었다.

“ 어후.. 아파라. 딱 대세요.”

나는 살짝 전류가 흐르는 듯한 손을 탈탈 털며 말했다. 1승 1패로.

이미 전에 스택 한번은 쌓아 놓은 상태였다.

“ 아.. 너무 아까워!”

이채린은 아쉬워하며 머리카락을 들쳐 둥근 이마를 훤히 드러냈다. 앞머리 깐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순간 생각이 다른 곳으로 분산 될 정도로 하얗고 예쁜 이마가 내 눈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게임은 게임.

손길이 거침이 없는 것을 보면 내가 때린 딱밤이 별로 안 아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지은에 돌 머리에 딱밤 단련을 해온 손가락인데..

나는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활 시위처럼 당겼다.

중지손가락이 뻐근할 정도로 강하게 당겼으니 파워는 세겠지.

말했듯이 이채린은 은근히 놀리는 타격감이 쏠쏠하다. 나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이채린을 놀려 먹었다.

“ 빨리 때려!”

때릴까 말까. 고민은 짧다.

ㅡ따악!!

손가락을 던지듯 짧고 강렬하게 쳤다. 이채린은 곧바로 이마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물었다.

“ .. 굿?”

[ ㅋㅋㅋㅋㅋㅋㅈㄴ쌔네.]

[남자라고 봐주다가 골디로져.]

[ 영상 안 올라와도 하루는 봐드리겠습니다..]

이채린은 고통을 삼키며 얼굴 위로 억지미소를 띄워 올려 보였다. 눈에 살짝 독기가 들어 간 것을 보니 게임에 집중해야 할 듯 싶었다.

“ 빨리 하자..”

조금 무서운데?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 같다.

슥.

탁.

슥.

탁.

조금 더 장난 끼가 없어진 할리갈리가 진행되었다. 이건 뭐랄까.. 이런 건 게임이 아니다.

나도 이채린도 최고로 집중한 상태에서 게임은 계속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5개 짜리 레몬카드가 내려 놓는게 내 눈에 보였다. 나는 당연히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종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ㅡ땡.

종소리가 작게 울리고, 이채린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 너도 대.”

“ 네? 왜요 제가 이겼...”

이채린의 시선을 따라가 고개를 내리니, 아래 부근에 레몬 1개짜리 카드가 떡하니 깔려 있었다.

내가 졌네?

똑같은 과일이 한 개 더해지며 더는 5개가 아니게 되어버렸다.

나는 조용히 이마를 들어올렸다.

“ 씨게. 때려도 뭐라하면 안된다..?”

걱정은. 이채린은 그래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 제가 때린걸 생각하세요. 인정?”

[ ㄹㅇㅋㅋ만칩시다.]

[ ㄹㅇㅋㅋ]

[ ㄹㅇㅋㅋ]

[ ㄹㅇㅋㅋ]

아파봤자 얼마나 아프겠어.

어쩌면 나도 편협한 사고를 가진것일지도 모른다. 근데 아무리 봐도 이채린의 딱밤이 아플 것 같진 않았다.

이채린은 왼손으로 오른손의 팔목까지 감싸쥐며 내 이마를 조준했다.

“ 으..”

따아악!

이마에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아팠다. 생각보다 더.

겉으로는 걱정하는 척 이마의 가 부분을 때리다니.

“ 씹...”

편견을 가진 나 새끼를 원망하는 것이 전부였다. 뒤 늦게 예전에 봤던 한 기사를 떠올렸다.

ㅡ여성은 예로부터 근신경계가 발달되어서 평균적으로 같은 체중대비 남성에 비해 절반의 힘을 더 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본 기억이 있었다.

몸으로 체험하니 비로소 믿게 된 사실이었다.

‘ 진짜였네.’

불쾌한 통증이 지속되는 부위를 꾸욱 눌렀다.

“ 미,미안.. 괜찮아?”

“ 별거 아닌데요.”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로 호들갑 떨 것은 아닌데, 이채린은 기어코 내 이마에 얼음이 든 컵까지 대려고 하더라.

작은 손가락이 서늘한 것은 괜찮았지만, 컵 따위가 머리 위에 올라오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나는 살살 움직이는 손을 떼어냈다.

‘ 이럴 거면 뭐 하러 쌔게 때린거야?’

[ 유지영님이 1000원 후원.]

ㅡ 방송 계속 할거면 겜이나 하자. 서로 아픈거 하지 말고.

“ 어 누나? 이미 5명 꽉 찬거 아니었어요?”

ㅡ 한명 빠졌어.

“ 근데 방송보고 있었던거에요?”

ㅡ 아니? 내가 왜.

“ 그냥 물어봤죠. 갈게요.”

얼떨결에 섭외를 당해버려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슬슬 이채린도 집에 가야할 시간에 타이밍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시청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집 앞까지만 이채린을 배웅했다.

“ 잘가요.”

“ 너도 방송 잘하고! 오늘 재밌었다..”

“ 가끔식 나오고 싶으면 말해요 반응 괜찮던데.”

“ 그래도 되나? 또 올게!”

“ 그래요.”

이채린이 사라질 때 동안, 담배를 꼬나물던 나는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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