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43화 (43/64)

〈 43화 〉 노래방

* * *

“ 오셨어요?”

“ 네..”

백화연은 어딘가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배를 문지르며 식탁으로 향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은 일종의 맛보기였다.

“ 이제 제대로 레시피 알려 드릴 테니까 열심히 들어 주세요!”

“ 넵 선생님!”

백화연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7세 어린이도 잘 따라 할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하나하나씩 소스를 맛봐가며 메모지에 레시피를 기록했다.

“ 자 여기서 수박주스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 무조건 설탕을 넣어야 해요!”

“ 수박 자체가 단데 괜찮을까요?”

권아름이 말했고,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백화연은 황설탕을 다섯 스쿱이나 넣고 말없이 믹서기를 돌렸다.

“ 이건..! 드셔 보셔야 돼요. 여름이니까 당 떨어질 때 먹으면 진짜.. 매출은 따 놓은 당상이라구요.”

“ 믿겠습니당!”

“ 얼음도 같이 가는거 잊으면 안돼요.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해요!”

친절하면서 발랄한 설명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설명에 몰입했다.

수박이 곱게 갈리고, 백화연은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 깨를 통통 두드렸다. 얼핏 보면 이런 맛을 자신만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의도가 여실히 행동에서 묻어났다.

“ 이건.. 드셔보지 않으면 몰라요!

“ 넵.”

설탕 주스는 맛있었다. 그냥 간 것이 밍밍하다면 설박 주스는 철저히 먹는 사람의 오감을 충족시키는 맛이다.

건강은 책임 못 지겠지만 이걸 하나 먹는다고 건강이 나빠질 거였으면 진즉에 나빠졋겠지.

푯말에 1인1잔이라고 못은 박아 둬야겠다.

“ 뭔가 아쉽죠? 여기다 탄산수를 넣어 주면?”

넣기 전에도 맛은 기가 막혔지만, 뭔가 상품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다면, 탄산수를 조금 넣어주니 비주얼은 물론, 맛까지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sns에 환장하는 사람들 또한 만족시킬만한 음료수의 비주얼이다.

백화연의 기대감 어린 눈동자가 마구 굴러간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호응해줬다. 백화연만큼은 아니지만 나 또한 음식을 대접하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 맛있네요? 당장 팔아도 되겠어요.”

“ 맞아요! 역시 화연님..!”

“ 흐흥..흥.. 에이 아니에요.. 흥..”

백화연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

레시피를 다 배우고 이대로 가기는 아쉽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백화연은 셀럽이다.

인형 같은 외모와 출중한 요리 실력으로 공중파는 물론, 광고에까지 종종 출연하는 백화연은 눈 코 뜰 새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유지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유지영은 아싸인척 하는 기만자가 아닐까? 은근히 마당발이란 말이야. 아주 약간 의심이 들었다.

지훈은 권아름을 힐끔 보며 눈치를 보냈다. 최지현도 마찬가지였다.

“ 갔다 올게..”

권아름이 우리를 보며 소곤댔고, 이내 백화연에게 사뿐사뿐 다가가 팔짱을 꼈다.

“ 아름씨? 왜 그러세요?”

“ 오늘 한가하세요??”

“ 네네! 다음 주까지는 한가하죠? 아마..?”

다음 주 까지는 잡힌 일정도 없고, 못해놨던 요리영상 촬영이나 잔뜩 해놓을 생각이었다. 한 동안 과분한 관심으로 공중파에 많이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은 것은 좋았으나, 개인적인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개인적으로 요리영상을 올리는 것이 이리저리 불려다는 것보다는 훨씬 즐거웠다.

백화연은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는 권아름에게 의문을 느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팔을 조물락거렸다.

“ 그럼 저희랑 놀아요!”

“ 어어.. 그럴까요? 근데 뭐하고..?”

노는 것을 워낙에 좋아하는 백화연이었다. 근데 지금은 배도 불렀겠다. 딱히 할 만한 것은 없을텐데..?

노는 것은 좋아하지만, 몸을 쓰는 것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곳은 가정집이 아닌, 오직 촬영과 요리목적으로만 쓰이는 스튜디오다. 식기와 식재료 외에는 텅텅 비어 놀만한 것이 없었다.

“ 에이~ 그냥 같이 모여서 애기만 해도 재밌는거죠! 정 안되면 노래방이라도 가고!”

“ 노래방!”

그건 백화연도 무지 좋아하는 것이었다. 최근에 너무 바쁜 탓에 그나마 친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유지영과도 자주 만나지 못했다.

“ 좋아요!”

백화연이 냉큼 대답했다.

.

.

.

노래방으로 가는길.

지훈은 멀리 걸어가는 세 여자를 착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들은 공통 관심사를 두고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다.

본래 남자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저기 껴서 재잘거릴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지훈은 그러지 못했다.

‘ 주제가 왜 하필 화장이야? 다른 좋은 애기도 많잖아.’

특히나 백화연의 외모가 돋보이다 보니, 권아름의 질문은 끝날 줄을 몰랐고, 최지현 또한 은근하게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지훈은 이렇다 할 말도 꺼내지 못한 체 그저 걸었다.

“ 지훈씨는 뭐! 화장품 안 좋아하세요??”

“ 뭐 굳이 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하도 주변에서 화장품 뭐 쓰냐고 물어보는 탓에 시큰둥해진 지훈은 제일 편한 답변을 내놓았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통상적으로 이 말을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말을 꺼내지 않았다. ‘ 에이! 거짓말’ ‘ 그러지 말고 좀 알려 줘요.’ 라며 등을 쿡 찌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백화연은 그것을 아주 단단히 잘못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백화연은 진지한 태도로 말을 받아쳤다.

“ 역시.. 지훈씨 외모에는 그런게 필요 없긴 하죠..?”.

“ 이야! 지훈이 주변에서 나데나데 해주니까 이제 아에 대놓고 인정하네?”

“ 맞잖아요?”

지훈은 뻔뻔스럽게 말했지만, 그 뒤로 민망함에 헛기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렇다 해주는 것과,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었다. 최지현도 그런 낌새를 알아차리고 더욱 맹렬하게 물어 뜯었다.

놀릴 건수를 주지 않으려 했는데, 어설픈 행동에 오히려 제 발을 걸려 넘어진 셈이 되었다.

“ .. 지훈씨 외모면 그럴만하죠!”

“ ..”

젠장. 저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백화연 때문에 민망함은 배가 되었다. 어깨를 턱턱 두드리는 최지현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 우리 잘생긴 이지훈씨... 푸흡.. 야 지훈아 너가 잘생겼긴 해도 너무 뻔뻔한 거 아냐?”

“ 아 좀 저리가요 더워요.”

그는 민망함에 괜히 최지현을 떼어내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걷기를 몆분. 아무생각 없이 걷다 노래방을 먼저 발견한 것은 권아름이었다. 그녀는 오아시스를 발견 한 듯 눈을 빛냈다.

“ 저기 어때?”

대충 세련되어 보이는 노래방이었다. 4층 건물에 전광판이 달리고 마이크 그림이 그려진 흔하디흔한 노래방.

“ 가요!”

“ 가시죠 잘. 생, 긴 이지훈씨.”

지훈은 이를 빠득 갈며 진심으로 스파링 날을 기다리며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

“ 네 명입니다.”

“ 2만 5000원 받았습니다. 8번방으로 가시면 돼요~ 재떨이 드릴까요?”

종업원의 눈이 정확히 최지현과 이지훈을 훑었다. 그에 비흡연자인 최지현만이 살짝 발끈했지만, 이지훈이 고삐를 잡았다.

“ 아뇨. 필요 없습니다.”

마이크 덮개를 챙기고, 생수를 구매해 방으로 들어왔다.

권아름과 백화연이 신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이지훈도기계적으로탬버린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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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노래 위주로 불러서, 의외로 지루할 틈은 없었다.특히 백화연의 질풍가도는 임팩트가 강력했다.

짤랑짤랑 탬버린을 의미 없이 흔들다 보니 , 어느새 1시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 여기 서비스 뭐야!! 왜 이렇게 많이 줘..”

“ 그러게요! 저도 이제 지치는데...”

백화연과 권아름은 갈라진 목소리로 서로를 다독이며 위로 했다. 줘도 난리야. 라는 생각은 일체 들지도 않았다.

노래방 서비스를 무려 1시간 10분을 받았으니, 배보다 배꼽이 큰 셈이다. 지훈은 얼마 안남은 물로 목을 축이면서 최지현에게 말했다.

“ 누나 마지막으로 듀엣 고?”

“ 뭔 노래 부를껀데?”

최지현은 다리를 꼬며 나직이 말했다.

“ 여름밤의 술?”

“ 틀어보아라.”

뭔 컨셉이지. 굉장히 건방진 컨셉이었지만, 최지현의 노래는 더 듣고 싶을 만큼 좋았다. 그는 툴툴거리면서도 노래를 틀었다.

ㅡ ~

이윽고 몇년 전의 감성을 자극하던 노래가 잔잔히 흘러나왔고, 최지현은 잔잔하게 그 위에 목소리를 얹기 시작했다. 평소의 목소리가 아닌,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특유의 맑고 약간은 거친 목소리가 노래방부스를 가득 매웠다.

후렴부가 지나자 최지현은 입술에서 마이크를 때냈고, 이지훈이 차례가 왔다.이번엔 남자 특유의 목소리가 부스를 매운다. 잔잔한 랩파트가 귀에 천천히 박힌다.

백화연은금발을 배배 꼬으며 입술을 달짝였다.

두 남녀가 아무감정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이렇게 놓고 보니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라 간질간질한 기분이 마음속에 녹아든다.

" 갑시다."

노래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감성은 흩어졌지만, 백화연은 박수를 짝짝 치며 좋아했다.

" 와 진짜 잘 부르신다...! 이번 곡은 특히 잘 맞는 것 같아요!"

" 그런가요? 제가 잘 불러서 그렇죠 뭐. 예전에 이 노래를 하루 종일 들은 적도 있었거든요."

" 내가 잘 부르는 거겠지."

" 예예."

그렇게 노래방의 마지막은 마무리가 되었다.

**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백화연의 스튜디오로 돌아온 일행은, 백화연이 만들어준 칵테일을 마시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지훈아 너 뭐 낼 거야?”

“ 저 주먹이요.”

벌써 심리전은 시작되었다. 권아름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했다. 이지훈은 평소에 은근히 뱀 같은 면이 있었다. 지금 저 표정도 봐라. 아무생각 없는 척 살짝살짝 수면 위로 미소가 올라온다.

아름은 패턴을 한 번 꼬아, 가위를 내기로 했다.

“ 안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 이겼네.”

지훈은 권아름의 가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제가 주먹 낸다고 했잖아요.”

“ 심리전 쩌네.”

혼자 착각한 것은 아니고? 어쨌든 승부에서 이긴 것은 좋았다.

‘ 백화연과의 방송.’

“ 누추하지만 제 방송으로 오셔야겠습니다.”

“ 좋아요! 헤헤.”

백화연은 준연예인 같은 느낌이다. 다른 사람을 어떨지 몰라도 이지훈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지훈은 폰을 들어, 이지은에게 라톡을 보냈다.

[나] : 야야.

[ 이지은이] : 왜

[나] : 백화연 씨랑 방송하니까 오늘 방송보던가.

[ 이지은이] : 엥 ㄹㅇ?? 미쳤네. 그런분이 오빠방송에 왜 와? 계탔네. 나도 화연님이 해주는 요리 먹을래!!

[나] : 그러게나 말이다. 근데 이미 다 먹음. 내가 오늘가서 떡볶이 해 줄 테니까 그거나 먹어.

[ 이지은이] : 싸인도 받아와!

이지은은 평소에도 백화연의 유트브를 보면서 군침을 흘려댔다. 그러니 이렇게 말한 건, 백화연을 만난 이상 빠질 수 없는 절차였다.

지훈은 화장을 하는 백화연을 뒤로하고, 방송을 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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