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47화 (47/64)

〈 47화 〉 행동(2)

* * *

“ 씻어라 이지은. 나갔다 오자.”

“ 어우욱.. 지금 몇 시?”

“ 4시. 빨리 씻어라. 옷 갈아입고. 여기저기 들릴 때가 많다.”

자는 이지은을 4시가 돼서야 깨웠다. 누가 이기나 해 보자는 심보로 기다린 것이지만, 나는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고등학교 여름방학이라는 무시무시한 어드벤티지가 적용되어 누구보다 잘 자고 잘 노는 슈퍼 놈팽이가 되어 버린 이지은을 이길 방도는 없다.

“ 5분만 더...”

“ 미쳤냐. 지금 해가중천에 떴다. 일어나.”

새벽에 게임을 못 하게 하던가 해야지. 이지은의 이불을 억지로 걷어내고 발로 궁둥이를 툭툭찼다.

“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 아으 알았어..”

내 잔소리에 이지은은 비척 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물소리가 나는 것 까지 확인 하고 나서야 준비를 시작했다.

“ 아우.. 좀만 늦게 가자니까..”

“ 누가 보면 나 좋으라고 가는 줄 알겠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마트에 들려서 도시락을 쌀 식재료도 사야되고, 여행을 핑계 삼아 이지은의 옷도 사주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최지현과의 저녁 운동 약속 또한 잡혀 있었다. 여행 전인지라 확실히 바빴다.

이지은도 이번 바캉스에 동참하기로 한 지라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긴 우리가 간 여행이라곤 손에 꼽을 만큼 적으니까.

“ 빨리 입어.”

“ 에응.”

“ 그건 또 무슨 말투야.”

분명 나쁜 말은 아닌데 표정과 말투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축구장 너비인 마빡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은걸 겨우 참고 밖을 나왔다.

마트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식료품 코너로 이동했다. 마트에 오면 돈만 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지, 맛있어 보이는 것들이 잔뜩 있다.

“ 이거 살까?”

“ 아니 살 거 정해져 있어. 빨리 사고 백화점이나 가자.”

뭐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살 것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유혹에 빠져든 이지은을 끌고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먹을 것들은 백화점이나 식당에도 잔뜩 있을 테니. 괜히 구태어 짐을 무겁게 하지 않았다.

수박과 유부초밥 재료를 사고, 아이스박스에 담아갈 음료수와 각종 간식 까지도 두둑하게 챙겼다.

양손이 묵직할 정도이니, 이동할 때나 입이 심심할 때 간식이 부족할리는 없을 터다.

“ 줘. 내가 들게.”

“ 됐어. 이런 건 여자가 들어야지. 흐읍!”

이제 이런 것도 적응이 되어서 놀랍지도 않다. 이지은은 큼지막한 수박 한 통을 끌어안고 거센 콧김을 뿜었다.

“ 어휴. 뭐 자랑이라고.”

뭐 그래.. 나야 좋다.

고집스러운 눈빛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수박을 이지은에게 넘기고 비닐봉투를 들었다.

**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설고, 고급스러운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이지은도 낯설기는 마찬가지겠지.

백화점.

10층에 있는 롯데시네마를 이용하려고 와본 적은 있지만, 본격적으로 돈을 쓰기 위해 온 것은 처음이다.

나와 이지은은 괜히 명품관을 한번 둘러본 후, 적당한 여성복 매점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지은의 마음에 쏙 든 가게에 하나 나왔다.

주로 원피스나 샌들 같은 걸 파는 곳이었다. 내일 여행을 가는 만큼 바다의 어울리는 컨셉 옷들을 사고 싶은거겠지.

나는 비치된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간섭했다가 나중에 마음에 안 든다고 원망을 사는 것보다야 훨씬 났다.

“ 으음.. ”

이지은은 맘에 드는 원피스를 3개 정도로 추린 뒤, 가격표를 보며 움찔 거렸다. 생각보다 가격이 많이 센 모양.

이지은의 성격상 그냥 돌아가자고 할 가능성이 농후했기때문에 내가 나섰다.

“ 저거 입어봐도 되죠?”

“ 아. 네! 그럼요 그럼요. 입어보세요 얼른! 남자친구 분 기다리시겠다...!”

이지은의 꼬랑지를 따라 다니던 점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등을 떠밀었다. 음흉한 미소는 덤이다.

어떻게 저딴 똥 쓰레기 같은 소리를? 저딴 말을 뱉는 입은입이 아니다. 주둥이나 아가리지.

만약 그 상업용 멘트가, 내 기분을 잡치게 하려는 의도로 내뱉은 거라면 대 성공이었다. 실제로 기분이 매우 나빴으니. 이지은도 질색팔색하며 우리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 남자친구 아닙니다. 동생이에요 친 동생. 누가봐도 닮았잖아요.”

“ 여자친구 아닙니다. 오빠에요!!!”

씨발놈아.

물론 뒷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 아! 아! 죄송합니다! 워낙 선남선녀셔서.. 안.. 닮으셨기도 했고..”

“ 후.. 됐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열을 내 봤자 뭐 하겠는가. 저렇게주눅들어 사과를 하는 것을 보니 내가 맥이 빠졌다.

근데 진짜 안 닮았나?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문제였다. 만약 이런 오해가 지속된다면 이지은을 아에 떼 놓고 다닐 용의도 있었다.

옷을 사는데 30만원을 쾌척하고 우리는 푸드코트로 향했다. 맛은 기대 이하였고, 가격은 생각보다 더 비쌌다.

가격 때문에 맛이 없게 느껴지는 건가? 메뉴 3개를 먹는데 5만원을 썼더니 그 가격으로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둘씩 떠올랐다.

감자탕 대짜에 볶음밥. 고오급 피자 2판 등.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서 초밥이나 먹는 건데. 그래도 이지은은 배가 고팠는지 우걱우걱 잘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대충 다른 것들을 구경하다 택시를 탔다.

“ 우으 이 상태로 집에 가서누으면 개꿀이겠다~”

“ 그러게. 재밌겠네.”

아마. 우리는 서로다른 의미로 말한 것 같았다. 내가 향하는 곳은 체육관이었으니까.

요즘 먹고 자고가 일상이 된 녀석의 정신 상태를 한 번 일 깨워 줘야할 필요성이 있다.

쿨쿨 잠들어 버린 이지은의 턱살을 뒤지게 흔들며 이지은을 깨웠다.

“ 벌써 다 왔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 이지은.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 응 내려.”

.

.

.

“ 오 지후니~ 왔나! 빙구도 와브렸네.”

“ 헤헤. 안,안녕하세요..!”

“ 안녕하십니까.”

관장님에게 붙잡혀 버린 이지은의 원망어린 눈빛을 쳐내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내 시선은 가공할 파열음을 내는 센드백에서 멈춘다.

“ 안녕요. 누나.”

“ 요새 말이 좀 짦아진다?”

팡!

“ 좀 봐줘요.”

나는 스트랩을 둘둘 감으며 관장님의 탱크탑 권유를 태연하게 까버리고, 널브러져 있는 줄넘기를 잡았다.

“ 내일 여행 짐 다 챙겼어요?”

“ 응 다챙겼지? ”

가볍게 쌩쌩이를 몇 개 조지면서 자연스럽게 최지현과 대화를 나눴다.

파앙 ㅡ!

최지현은 샌드백을 정강이로 강하게 까더니, 씨익 웃었다. 그에 나도 줄넘기를 내려놓았다.

“ 헤드기어 껴.”

“ 하아. 저야 좋죠.”

최지현과 내 신장 차이는 7cm. 내가 최지현보다 조금 더 크다. 그 이점을 이용해야 한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또 여자의 근섬유 다발 .. 뭐시기라는 것까지 설명해야 하니. 생략하고. 최지현의 힘이 나보다 월등히 강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펀치기계를 생각해봤다.

한 대 맞으면 정신을 못 차리릴 것이다. 이 몸의 내구도는 생각보다 구리니 꼴사납게 주저앉지 않을까.

나는 열심히 풋워크를 밟으며 카운터를 넣는 형식으로 주먹을 열심히 꽂았다. 가드는 올리지 않고 거리조절에만 힘썼다. 헤드기어가 있어서 가능한 전략이다.

주먹을 맞은 최지현의 헤드기어가 흔들린다.

하지만 타격을 받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최지현은 우직하게 전진하며 내 주먹을 커버링쳤다.

“ 지훈이 잘한다이~ 어어 지은이 너는 빨리 한 개 더! 비실비실해가꼬 쓰것나. 이거.”

“ 아아악..! 이지훈 진짜아!!”

“ 어허. 투덜거리지 말고 한 개 드 하그라.”

난데없는 콩트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내 허리에 손이 휘감기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뭉개졌다.

“ 허어억..”

입에서 꼴 사나운 신음이 내뱉어졌다. 툭 툭 툭. 최지현이 헤드기어를 치며 웃는다.

“ 내가 이겼지?”

나는 대답대신 이를 악물고, 허리를 쳐 올리며 브릿지 자세를 계속해서 시도했다.

“ 소용없어.”

꽈아악. 믿을 수 없는 괴력에 몸이 억 눌린다. 진짜 말 그대로 십자가에 박힌 것처럼 몸체가 바닥에 고정되었다.

“ 이 쥐새끼 같은. 너 감정 담아서 때렸지 어? 존나 아팠어. 진짜.”

“ 응? 탭 안칠래? 응 응?”

이 굴욕적인 자세에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동해버렸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누워서 뻣대며 얌전히 최지현이 몸을 비키길 기다렸다.

탭을 치는 순간 내 마음속 무언가가 무너질 것 같았다.

“ 빨리 치라고 진짜 맞는다?”

“ 오... 존나 부러워 미친..!”

10초간의 정적.

어느새 관원들이 몰려와 포상이니 어쩌니 쌩쑈를 떨어대는 바람에 괜히 민망해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최지현의 허벅지를 두 번 쳤다.

아 존나 자존심 상한다 진짜로.

“ 나와요 이제.”

“ 어..응.”

난 스트랩을 풀고, 최지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줬다.

“ 수고했어요. 제가 봐준 거 알죠? 입 좀 다물고. ”

“ 그래.”

오늘은 좀 추했다. 다음에 이기자. 나는 되 뇌이며 최지현의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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