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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49화 (49/64)

〈 49화 〉 관광

* * *

화창한 제주도의 날씨.

이곳도 더운 것은 마찬가지지만, 서울과는 본질적으로 공기부터가 틀리다.

나는 폐부의 공기를 잔뜩 밀어 넣으며 귤 향이 나는 듯한 이 깨끗한 공기를 맞이했다.

“ 여기 호텔 키. 한 세 시간 쉬다가 밥 먹으러 가면 될 것 같아.”

제주도의 첫날은, 암묵적으로 쉬어가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여행 기간이 무려 10일이나 되니 첫날은 쉬엄쉬엄 물 흐르듯 넘어가도 문제가 없었다.

나도 포근한 날씨에 괜히 노곤노곤 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호텔의 가장 큰 장점인 대형 풀장이 구비되어 있었다.

“ 가자.”

나는 가벼운 짐들과 카드키를 이지은에게 넘기고, 캐리어와 짐 들을 끌었다. 우리가 사용할 방은 701호에 문을 열고 조심히 들어 가본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나무 바닥. 미니멀한 가구들이 눈에 먼저 띄고 욕조와 깨끗한 화장실도 보였다.

이것이 호텔?

이지은도 나와 똑같이 눈을 크게 치뜨고 멍하니 멍을 때리다 푹신해 보이는 침대에 몸을 날리고 베개에 볼을 부비기 시작했다.

“ 흐헤흐헤헤. ”

“ 오바 떨기는.”

진짜 호들갑을 떠는 듯했지만, 괜히 흐뭇했다. 이지은도 나도 집에서 메트리스만 깔고 잔다뿐이지 침대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기본적으로 우리 집보다 최소 2배 정도는 넓어 보이는 방이다. 조용히 침대로 가 몸을 뉘여 본다.

“ 아. 좋긴 하네.”

그렇게 한참을 멍 때리고 있다가, 에어컨을 조작해 방의 온도를 낮추고, 화장실도 구경할 겸 들어가서 물도 빼준다.

다른 방도 구경 갈까 했지만, 유지영이 말하길 다른 방도 아주 조금의 디테일 차이가 있을 뿐 큰 차이가 없다 했기에 다시 빈둥대며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잠에..

“ 야!! 애들아!! 여기 엄청 좋다!!”

들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ㅡ 오.. 개 재밌겠다.. 지은아. 우리 버리고 가니까 좋아...?

“ 너희들이랑 수영장 가는 것도 좋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어. 미안하다!”

ㅡ 됐다 됐어. 니 얼굴 말고 방이나 보여줘 얌마.

“ 기둘! 곧 보여드림.”

이지은은 어느새 손에 들려 있던 감귤 초콜릿을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공항 면세점에서 산 것이었다.

“ 오빠... 좀 나와바..”

이지은이 아주 작게 속닥대며 눈치를 줬다.

친구들에게 내가 보이는 것이 껄끄러운 모양이다.

뭐 부끄럽기라도 하냐?

“ 싫다.”

“ 아 쫌 나오라고!!!”

흔들 흔들.

밸런스가 좋은 내 몸은 흔들리기를 반복하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이지은이 체념하고 내 몸에서 손을 뗄 때 쯤.

ㅡ와아아아아!!!!!

휴대폰 스피커가 우렁차게 울음을 토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감탄사를 내 뱉었다.

“ 어우 시발 깜짝아.”

물론 욕이 튀어나가긴 했지만, 의도는 분명 감탄사였다. 어쩔 수 없었다. 국군 장병들과 흡사한 커다란 함성에 여자 특유의 하이톤이 합쳐져 엄청난 소리가 고막을 강타했다.

ㅡ 새 아가 인사드리옵니다!!

ㅡ미친련인가 진짜. 오빠 안녕하세요!!

“ 아오 진짜 또 이러네.. 그러니까 나오라고 했잖아!”

나라고 알았냐. 깜빡 잊고 있었지만, 최소한 이지은의 학교에서 나는 웬만한 B급 연예인 뺨을 갈길만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오민서 사건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유명해진 것이었다. 그 양아치 같은 오민서 패거리를 몰아냈다는 이유로 아이들은 나를 빛의 남신이라고 칭송하고 다녔다.

‘ 어우 골머리야.’

그게 무슨 별명이란 말인가? 그들의 입장에서는 좋은 의도로 한 것이겠지만. 나는 몸에 닭살이 쫘악 돋았다.

그래도 이미 모습을 보였는데 외면 할 수는 없었다. 또, 이지은의 절친한 친구들이라면 나도 환영이다.

“ 어 그래 애들아 안녕?”

ㅡ 남신님...

ㅡ안녕하세요오!!!

눈을 회까닥 뒤집고, 있는 귀여운 여학생 한 명과.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 마찬가지로 귀여운 여학생 한 명.

ㅡ와... 여한이 없다..

이거 굉장히 머쓱한 기분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주아주 오묘한 기분. 방송이었다면 주접 좀 떨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여긴 현실이다. 나는 천천히 회상하기 시작했다.

“ 어.. 다영이 그리고... 수민이?”

ㅡ허어억...!!

“ 어떻게 알았어??”

종종 하는 애기를 들었지. 이지은의 베프랍시고 이름은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이지은의 찐 친은 애석하게도 그 둘 뿐이어서 기억하기도 쉬웠다.

“ 일단 좋아 해줘서 고마워? 근데 너무 좋아하지는 말고.. ”

“ 몰려다니면서 나쁜 짓 하면 안된다, 남에게 해코지도 절대 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다음에 한 번 놀러오면 맛있는 거 해 줄게.“

“ 으윽. 꼰대.”

“ ....”

말이 너무 길었나. 나도 모르게 말을 너무 늘어트린거 같다. 다행인건 이지은의 친구들이 나쁘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려 준다는 것이다.

“ 어어. 애들아 너무 말이 길었다. 미안. 들어가.”

**

3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고, 일행은 전부 로비에 모였다. 우리는 조금 기다리다 내려가서 호텔에서 제공하는 저녁을 먹을지, 밖으로 나가서 물 회를 먹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고민은 호텔 단지를구경하러 쏘다니면서도 이어졌다.

여행은 사진과, 먹는 게 남는 것 이라고 했던가. 호텔에 온 이후로 가장 심각하게 고민이 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 물회에 소면 말아서 소주 한잔...!”

“ 귀찮으니까 호텔에서 주는 밥 먹고 소화시켰다 수영장.”

둘 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뭐든 좋았던 나와 이지은은 잘 다듬어진 풀들을 보며 한가로이 휘파람을 불었다.

“ 아,아니면 내가 해주는 요리 먹을래..?”

“ 화연아 그건 아닌거 같아. 또 갬성이 있거든 갬성이.”

“ 그렇지..?”

백화연이 시무룩해하자 이지은이 손쌀 같이 달려나가 토닥여줬다.

끊이지 않는 논쟁. 갑론을박이 약 10분이 이어지고, 약간의 지루함을 느낀 내가 입을 쩌억 벌리고 하품을 하자, 다투던 최지현과 유지영이 내 의중을 살피며 선택권을 나에게 넘겼다.

그래 이제 밥 좀 먹을 때 됐지.

나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이 식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 물회 먹죠.”

반박할 여지도 없이. 단호한 어투로 말하자 논쟁은 깔끔하게 종식되었다.

제주도하면 또 물회가 끝내준다는 말을 들었었고, 이왕 여행을 왔으면 첫날이더라도 한 번은 나가 봐야겠지.

이 호텔의 장점은 시설과 뷰가 좋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굳이 차를 나가지 않더라도 조금만 걷는다면 바다가 나오고, 그 부근에 밀집 되어 있는 횟집이 많았다.

대충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 실내. 우리는 맛 보다는 쾌적한 환경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횟집에 입장했다.

맛도 괜찮겠지. 피부를 적당히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여자들이 숯을 태워 불을 피우고, 각종 해산물을 굽는 것이 썩 괜찮아 보였다.

우리는 항아리 물회라는 메뉴를 시켰는데, 나오고 보니 그냥 적당한 그릇에 담아 나온 물회였다.

음 조금 실망스럽네?

진짜 항아리 뚜껑이라도 쓰는 줄 알고 기대 했었는데.

그래도 맛은 좋았으니 불평 불만 같은건 하지 않았다.

새콤 달콤 매콤하면서 시원한 것이 여름에 먹기에는 진짜 제격이다. 특히 육수에 둥둥 떠 있는 살얼음이 뒷골까지 땡기게 만들었다.

“ 후아... 잘 먹었다.”

“ 맛있네요. 제가 낼께요. 누나.”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카드를 쥐어드는 유지영의 신용카드를 뺐고, 내 카드를 꺼냈다.

자잘한 커피들이나 간식 같은 것들은 전부 돌아가면서 냈지만, 정작 돈이 나간다 싶은 굵직한 것들은 전부 유지영이 계산을 한다.

그녀가 돈이 많고, 우리들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관계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탑이다.

돈이 많고 적고는 관계 없다.

오는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을 아주 철썩 같이 믿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지영을 만류하고, 내 카드를 꺼내어 카운터로 향하고 있을 때. 최지현이 먹잇감을 발견한 표범처럼 장난스럽게 눈동자를 빛냈다.

“ 야야 그럼 우리 그거 할까?”

“ 뭐? ”

“ 카드 뽑기로 정하는거지. 다 신용카드 꺼내. 일단 내꺼랑 유지영꺼랑 지훈이꺼.”

최지현은 잠시 동안 고민하다, 나와 유지영의 파란 신용카드를 가지고 카운터로 성큼성큼 걸어가 카드를 내밀었다.

“ 죄송한데 이 중에서 하나 골라주시겠어요?”

오. 나도 유지영도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우리는 최지현이 하려는 것이 요즘 유행한다는 카드뽑기라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저렇게 하면 소소한 재미도 챙기면서. 마음상할 일 없이 계산을 할 수 있겠네.

다만 지금 우리가 먹은 것은 소소 하다기에는 금액이 컸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지그시 쳐다봤다.

묘한 곳에서 승부욕을 불태우는 유지영도 침을 삼키기는 마찬가지.

긴장되는 순간이다.

종업원은 귀여운 라이언 이모티콘이 그려진 분홍색 카드를 거침없이 뽑았다.

“ ㅋㅋㅋㅋㅋㅋ하자고 하는 사람이 걸리는건 과학이지.”

“ 누나 잘 먹었어요.”

“ 꺼억. 감사.”

우리는 한 마디씩 하며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후로 우리의 여행에서 카드 뽑기는 일종의 관행이 되어 버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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