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호텔(2)
* * *
“ 진짜 귀엽네.”
고영희는 언제나 옳다.
이채린에게 맡겨놨더니. 왠 패셔니스타 고양이가 한 마리 나타나서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표정은 시종일관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지만. 그것마저도 귀엽다.
“ 벌써 살이 조금 찐거 같은데.”
배가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빵빵했다. 물리적으로 이틀 만에 찌는 것이 가능한가?
ㅡ 누나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간식이랑 밥 너무 많이 주면 안돼요.
이놈 지능이 보통이 아닌 것은 첫 만남 때부터 알아봤다. 타이밍 좋게 나를 집사로 간택한 것만 봐도 그렇다.
눈치도 빠르고 간혹 내 말을 전부 알아듣는 듯한 느낌도 받는다.
그것뿐이랴. 믿기지 않겠지만, 문고리를 혼자 따고 태연하게 밤 산책도 다녀오던 놈이다.
그런 놈이 이채린에게 간식 하나 얻어먹기?
나야 단호해서 그런 술수에 넘어가지 않는다지만 이채린이라면 왠지 퍼 줄 것 같은데.
내가 고민하며 잠시 책상을 두드리며 앉아 있자 제법 빠르게 답장이 돌아왔다.
ㅡ .... 이미 줘 버렸는데... 사료도 다 혼자 뜯어서 먹어 놔서 bb... 미안.
( 그랜절 박는 이모티콘.)
ㅡ배 뽈록해진 것도 귀여워서 괜찮긴 한데. 이제부터라도 조금만..
ㅡ 알겠드아~ 여행 잘 다녀오고!
ㅡ 옙. 편하게 쉬세요!
내가 뭐라고 이채린에게 왈가불가 하겠는가. 10일 동안 성심성의껏 맡아주는 사람한테 말이다.
‘ 기념품이나 잔뜩 사다줘야겠네.’
바텐더가 넘겨준 코스모폴리탄을 받아들고, 입에 한 모금을 머금었다. 이건 여담이지만, 코스모폴리탄은 영화 섹스엔더시티에서 주인공이 즐겨마시던 한 때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물론 나도 방금 바텐더에게 설명을 들은 것이지만. 바텐더는 내가 흥미를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털어놓기 시작했다.
“ 이 술은 뉴욕에서....... 새콤하면서 깔끔한 맛이 일품이죠. 손님 이미지랑 너무 잘 어울리세요!”
“ 아하.. ”
그렇다고 하니 뭐... 나는 눈치껏 맞장구를 치며 말을 받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역시나 수다스럽다.
바텐더가 유유히 물러가고, 나는 그제서야 알록달록한 전구들을 보며 편안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다.
ㅡ 지후니..?
ㅡ 찌훈이!
어눌한 말투에 두 목소리.
이질적인 목소리였지만 내 이름이었기에 나는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 찌후니!”
밝게 웃는 내 허리 근처에도 올까말까한 귀여운 꼬마와, 호박색 머리를 찰랑이며 웃는 여자. 볼 것도 없이 외국인이었다.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흠칫 했지만, 이내 실례라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그들이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 안녕하쎄요?”
“ 찌후니!”
너는 그 말 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 하지만 천사 같은 외모버프로, 절로 아빠미소가 발사되는 듯 했다.
“ 그래 지훈이야. 이지훈.”
“ 찌훈이!”
“ 나는 당시의 팬입니다! 유트브 챙겨봄이다! 지후니. 안자도 대나?”
여름입니다만.
외국인 팬은 나로써도 처음이었다. 그나마 한국어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다.
나는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그녀와 꼬마는 수상할 정도로 많이 만났던 이상한 사람의 부류에는 들지 않는 듯했다.
다짜고짜 다가와서 시비를 걸거나 하는 이상한 새끼들 말이다.
허접한 생활 회화는 쪽팔려서 써 먹을 생각도 못 했다.
나는 말없이 옆에 있던 나무 의자의 등받이를 툭툭 두들겼다.
“ 감싸합니다!”
“ 꼬맙다!”
바텐더는 꼬마에게 따듯하게 데핀 우유를, 여성에게는 시원한 생맥주를 내 왔다. 그래 일단 기본적인 것 차근차근.
“ 어디서 왔어요?”
아주 천천히 느릿한 어조로 내뱉었다. 초등학교에서 영어 수업을 배우는 초등생들이 말 하듯, 시작은 where are you from? 부터였다.
“ 미꾹에서 왔다.”
“ 여행?”
“ my husband.....”
구체적인 설명까지 한국어로 하기에는 무리였는지, 그녀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뭐 나는.. 여차저차 머리와 구글 바빴고까지 동원해 해석했다. 그녀의 말로는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남편 따라 한국으로 이민을 왔다는데.
그게 벌써 8개월 차란다.
때문일까. 비록 발음은 어눌했지만,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녀의 뜻을 마침내 알아들은 나는 고개를 두리번 대며 그녀가 말한 남편이란 존재를 찾았지만, 코 뺴기도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어디있는거지?
몇 번 이런 곤란한 상황에 데이다 보니 조심성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또 방송을 하는 입장인 만큼 이런 행동에 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 그럼 남편 분은?”
“ 어.. 올 껍니다! 지훈도 인사합니다!”
아니 별로 인사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속으로 그 말을 삼켜야했다. 어떻게든 인사시키려는 꼬마에 애절한 눈빛 때문이었다.
많아봐야 5살6살 정도 되 보이는 꼬마가 먹던 우유도 내려놓고 내 이름을 연신 부르는데 도저히 거절의 뜻을 보일 수가 없었다.
‘찌훈이 찌훈이’
이 귀여운 한마디 한마디에 모든 감정이 다 담기는데. 진짜 요즘 흔히들 말하는 예의 없는 잼민이가 아니라 정말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종류의 귀여움이었다.
정작 엄마인 그녀 또한 나와 남편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기대하는 눈치인지라, 말려주기를 기대 할 수도 없었고.
‘ 괜찮겠지.’
나도 모르겠다.
**
한편 수영장의 한 구석. 이제야 잠잠해진 최지현과 유지영은 서로를 노려봤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최지현이었다.
“ 진짜 안 딱딱해?”
그리고 그 말은 유지영의 속을 한 번 더 뒤집어 놨다. 저 뇌까지 근육으로 가득 찬 고릴라는 지금 무심코 내었던 '개 물렁물렁해'에 마음을 쓰고 있었다.
유지영은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참으며 옷을 여몄지만, 최지현은 거기서 한 술을 더 떴다.
“ 내일. 지훈이 데리고.. 호텔 헬스장이나 가봐야겠네.”
그렇게 말하고 맨몸 스쿼트를 조지는 비키니 최지현은, 유지영의 참을성을 축내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 이,이...”
“ 너무 화내지 말고. 가자 지영아. 술 빨 죽이던데.”
김수희는 이때다 싶어 끼어들어 유지영을 우쭈쭈 달랬다. 경험상 오래 끌어봐야 마음 쓰는 것은 유지영이었다.
“ 으음.. 근손실 오는데.”
최지현은 괜히 자신의 엉덩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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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쪼콜렛 더 쭈세욤...!”
“ 으응? 하나 더? ”
물론 마음 같아선 기념품으로 남겨 둔 감귤맛 초콜릿 마저 더 주고 싶은 심정이었던 나다.
하지만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는 것을 좋아할 부모는 없겠지?
“ 괜찮나요?”
“ 괜찮은 것입니다. 아빠 오기 전에 얼른 먹습니다. 나은.”
들었지? 라는 표정으로 똘망똘망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나은(셀리.) 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초콜릿 껍질을 정성스럽게 벗겨 작달만한 손에 올려놓았다.
“ 짤 먹겠습니다!”
나은이는 그렇게 말하며 한 입 거리도 안되는 초콜릿을 4등분으로 쪼개 오물오물 씹었다. 중간에 우유까지 마시는 것을 보니 간식을 한두 번 먹는 솜씨가 아니었다.
“ ....그래.”
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볼 뿐이었다.
이거 너무 귀여운거 아니야? 나중에 결혼하면 꼭 딸로 낳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었다. 비록 여기가 모순된 역전세계라 하더라도 이 정도 치명적인 귀여움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나는 마구 쓰다듬고 싶은 것을 참고 초콜릿을 미리 하나 더 준비해 두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훤칠한 비율의 남성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줄리아씨의 등짝을 내리쳤다.
쌘 것은 아니었고,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 여보? 제가 오늘은 간식 그만 주라고 했죠..? 나은이도 그만 먹고. 자 얼른 주세요.”
“ 씨러요!”
“ 얼른요. 주세요.”
“ 씨른데...”
나은이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결국 초콜릿을 넘겼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끄윽 대며 울음을 삼키며 눈가를 문질렀다.
어렸을 때 아이들은 엄마보다 아빠를 더 많이 좋아한다더니, 나은이는 줄리아씨의 넓은 가슴에 푹 파묻혔다.
쓰담
“ 큼.. 안녕하세요? ”
“ 아... ”
남편의 눈이 매서워졌다. 명 물론 나를 향한 시선은 아니었다.
줄리아씨는 신나서 내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듣는 내가 더 불편하고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이런 말 하기는 그런데 눈치가 진짜 더럽게 없다. 그만해.
“ ...지훈씨군요. 반갑습니다. 애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먹방을 많이 봐서 하하..”
“ 아 네.”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만, 평소 집에서도 내 영상을 많이 시청하는 것인지 남편의 따가웠던 눈초리가 한층 온화해졌다.
방송인이니 그런저런 불순한 의도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 여보는 이따 봐요.”
“ ....****”
줄리아씨는 고개를 숙이고 영어로 웅얼거렸지만.
“ 지금 여기서 영어로 해보자는거에요?”
라고 한마디가 날아가자 흡사 리트리버처럼 꼬랑지를 흔들었다.
딱 빠지기 좋은 타이밍.
나는 컵을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섰다.
“ 그럼 이제 저도 가보겠습니...”
“ ....”
“다.”
유지영의 눈빛이 왜 저러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