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강제력
* * *
“ 찌훈이 가...?”
“ 아니 잠시만. 갔다가 다시 올게?”
“ 응..!”
바짓단을 꼬옥 하고 붙잡는 나은이를 조심히 떼어놓고, 술잔에 담겨 있는 오렌지껍질을 한 입 베어 물고 밖으로 향했다.
나갈 때는 남편에게도 눈짓을 해야 했는데, 대충 합석할 일이 생겨도 괜찮겠냐는 뜻이었고, 다행히도 남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아씨의 눈빛이 다시 똘망똘망해진 것을 보니, 내 방송 말고도 많은 방송을 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후우, 그래 한 번 잘 말해 보자.
“ 드디어 오셨네. 이제야 끝난거에요?”
쭈욱.
내 볼이 당겨진다. 볼을 당긴 것은 최지현이었다. 나는 똑같이 당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나은이가 보는 앞이라서 참았다.
“ 므하는거에요?”
“ 이거 은근히... 마음에 안들어.. 그러므로 넌 내일 나와 헬스장행이다.”
“ 에...?. 아니 아니 여행 와서 그게 무슨..”
아무리 내가 운동을 좋아한다곤 하지만, 그 흔한 바벨하나 잡아보지 못한 나다.
헬스보다는 구기 종목이나 유산소 성 운동들을 더 선호하기도 하고.
어쩃든 쇠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 됐다. 들어가자 사양할 필요 없어.”
아니 내 의견은요. 마음에 안든다는 것은 핑계가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봐도 같이 운동하면서 지독하게 굴리려는 술수인데.
“ 아니..”
“ 그래서 저 분들은?”
빌어먹을 고릴라.
“ 제 팬 분들 이라시네요..”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
술자리가 끝나고 맞이한 아침. 나는 일어나자마자, 코를 훌쩍이며저 편으로 날아간 이불을 다시 덮었다.
“ 킁 킁..”
머리가 깨질 것같이 웅웅대고, 몸은 으슬으슬 떨렸다.
전날 분위기에 취해 술을 진탕 마신 탓도 있지만, 아마도 이 말도 안 되는 방 온도 때문일 것이다.
나는 피부에 살짝 돋은 닭살을 매만지며, 물 한 모금을 마셨다. 목도 쩍쩍 매말라 있고, 여러므로 최악의 아침이다.
어제 분명히 잘 때 에어컨을 끄고 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기어코 안 껐어? 심지어 파워 냉방 인 듯 바람이 숭숭 불어 방 전체가 냉골이었다.
나는 이지은의 침대 어딘가에 깔아뭉개져 있을 리모컨을 찾아 해매기 시작했다.
“ 아 어따 팔아먹었어.”
짜증이 확 솟구친 나는 체감상 영하온도로 내려간 손으로 이지은의 침대 속을 침범했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온다.
“ 어우우우! 뭐야!”
“ 에어컨 끄고 빨리 가자 조식 먹어야지.”
어제 과음을 한 탓에 나조차도 알람을 못 들었다. 시간이 빠듯하니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깨워야 한다.
어제 메뉴를 확인한 바로는 오늘 조식은 씨푸드가 주로 준비되어있다는 데. 이지은의 눈이 번쩍 뜨일 메뉴였다.
“ 먼저 씻어...”
“ 빨리 모자나 써. 조식 해산물 천지란다.”
“ 그건 못 참는데.. ”
못 참긴 뭘 못 참아.
이제야 일어나나 싶어, 옆을 힐끗 보니 이지은이 굼뱅이처럼 이불을 머리 끝까지 싸매고 꾸물럭 거리고 있었다. 전혀 못 참는 다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다.
나는 흰색 볼캡을 이지은의 머리통에 아무렇게나 씌우고, 내 모자인 비니까지 챙겨 나왔다.
“ 유현지 사장님 잘 지내고 있을라나.”
쇼핑몰 하니 또 유현지 사장님이 문득 뇌리에 스쳤다.
가끔. 아주 가끔 그립다.
“ 응 뭐라고? 유현지가 누구야?”
“ 음.. 아는사람? ”
“ 아는 사람이면 아는 사람이지 뭐야 그 대답은?”
이지은은 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치즈가 얹어진 가리비를 한입 뜯었다. 큰 관심은 없었는지 다시 식사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 덕에 오히려 나는 좋았다. 괜히 더 깊게 파고 들었다가는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 버릴 테니.
현재의 삶에 충실하자.
나는 멍하니, 꿀을 바른 프렌치프라이를 오렌지주스와 함께 하나씩 집어 먹었다.
.
.
.
“ 찌후니.. 오바!”
“ 응? 왜 그래.”
산책을 하며 유아풀장을 근방을 거닐던 중, 줄리아씨와 나은이를 만났다. 역시 어린애라 그런지 체력이 장난이 아니네.
줄리아씨의 애기를 들어보면 남편은 숙취로 고생 중인 모양이다.
‘ 어제 좀 과하게 마시긴 했지. 둘이.’
솔직히 말하자면, 이곳 기준으로 남편 김민철은 다소 ‘여자’ 같은 성격인지라 나와 죽이 잘 맞았다.
줄리아씨에게 대하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적어도 나는 오랜만에 동성친구와 술 한 잔 걸치는 느낌으로 즐길 수 있었다.
이유 없이 무진장 나를 좋아하는 나은이 덕에 연락처 교환을 하기도 했다.
흘려들은 바로는 거주지도 우리 집과 그다지 멀지 않아 신기했다.
“ 찌후니 잘생겼써!”
내 품안에 안긴 나은이가 아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줄리아씨가 너무오냐오냐 해주지 말라곤 했지만,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귀여운데.
“ 응 그래? 고마워~”
“ 찌후니 나랑 껼혼하쟈!”
내 가슴에 부비적대면서 그렇게 올려다 보면....
“ 안 되는데?”
무차별적인 칭찬 폭행에도 안되는건 안되는거지.
덜컹.
지금 나은이의 표정을 단어로 표현하자면 딱 덜컹이었다. 충격 받은 듯 입을 한계치까지 쩌억 벌리고 우물댄다.
눈가에는 눈물이 여지없이 맺혔다.
“ 자주 울어서 안돼.”
나는 나은이를 반듯이 쳐다보며 실실 웃었다. 흔히 볼 없는 푸른 눈동자에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가득했다.
“ ... 안 울었써.. 킁..”
“ ... 그래.”
“ 그럼 껼혼해에..?”
진짜 저 볼따구 한번 꼬집고 싶네.
초콜릿 달라고 애교를 피우는 것 일수도 있겠다. 어제 이후로 내 주머니에는 감귤 초콜릿이 항시 들어있었다.
“ 나은이 초콜릿 먹을래? 그 대신 하나만.”
“ 쭈세욤..”
“ 큼큼.. 자. 먹어.”
짧았던 한 바퀴 산책이 끝나고, 나은이를 다시 줄리아씨의 품에 안겨 주고 숙소로 돌아갔다.
오늘도 여지없이 식도락을 떠나기로 했으니, 그 전까지 방송이나 열심히 할 생각이다.
숙소에서는 백화연과 이지은이 서로를 치켜 세워주며 놀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합방 멤버로 슬쩍 끼워 넣어버려야겠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지은은 방송에 나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은근히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다.
“ 누나 합방 괜찮죠?”
“ 미안..”
“ 네?“
무슨 의미일까. 나는 괜히 불안감을 느꼈다.
결정적으로 이지은의 표정이 어딘가 음험했다.
‘ 컨텐츠 찍으려고 하나.’
유트브를 보면 간간이 ‘ OO하고 반응보기!’ 같은 제목이 보이는 것과 비슷한 컨텐츠를 찍으려는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나는 당해 줄 생각이 없는데.
“ 저 혼자 방송하죠 뭐.”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았을 때.
“ 왜 전화 재끼냐?”
**
“ 아니 돌아버렸어요? 지금 기껏 여행왔는데 땀을 흘리자고요? 미쳤습니까. 휴면?”
“ 여행 온 기념으로 헬스장에 내 채취를 남기고 가는거지. 자 받아.”
“ 아 치워요! 이런거 안 입는다니까!”
이 망할 스포츠브라는 내 발작버튼이다. 최지현도 그걸 알 터인데.
“ 누나 진짜 첫 인상이랑 다른거 알아요?”
“ 그래서 싫어?”
최지현은 기분 좋게 말하며 쇠질을 이어나갔다. 렛풀다운 머신의 무게추가 올라가고 등 근육이 자글자글하게 펴졌다 수축하기를 반복한다.
외관상으로 최지현의 몸은 건강미의 대명사였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잘 가꿔진 여자의 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관상용 근육이 아닌 실전 압축 근육이라는 것.
ㅡ 퉁!
50kg의 하중을 가진 가로모양 쇳덩어리가 살포시 얹혀졌다.
“ 자 이제 슬슬 가자.”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존나 웃기네 진짜.]
[ 비싼 돈 내고 가서, 한다는 게 헬스?]
[ 이지훈 표정 꼬라 박은게 내 웃음 벨이네.ㅋㅋㅋㅋㅋ]
끌려오며 어찌저찌 합의를 본 결과가 3대 측정이었다. 나는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평평한 벤치에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
차가운 바벨의 감촉이 낯설었다.
최지현이 알려 준대로 발을 제대로 바닥에 박아 넣고, 천천히 팔을 들어올린다.
“ 오 역시. 쉽네.”
[ 바벨 흔들리는거 보니까 벤치 한 번도 안 잡아본거 팩트인 듯?]
[ ㅋㅋㅋㅋㅋㅋㅋ그래도 운동 짬이 있지. 스파링 하는거 못봄?]
[ ㅋㅋ 격투기 선수들 중에서도 벤치 100kg 못 뽑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ㅋㅋ]
[벤치 100이 늬집 개 이름이냐? 텐련이 최지현이 든다고 만만해 보이나봄 ㅋㅋㅋ 현실은 빈봉 들고 휘청 거릴 년들이.]
“ 드는건 난데 왜 님들이 싸워. 어쨌든 감 잡았습니다. 100kg? 쉽죠.”
[ 못 든다에 내 왼쪽 유x 건다.]
[ 쓸모도 없는거. 누가 가져. 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의 장난 어린 조롱을 밑거름으로 쓴다. 어느새 워밍업을 끝낸 내가 들 봉의 무게는 75kg까지 올라와 있다.
“ 업 업!!”
“ 흐으읍!”
가슴을 한 번 찍고, 올라가는데 현기증이 돌며 힘이 축 빠져나갔다. 나는 볼 것도 없이 바벨에 깔리기 일보 직전 상황이 되었다.
중간에 개입한 최지현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깔렸을 것이다.
“ 아깝네. 이번엔 스쿼트 하러 가자.”
최지현이 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녀의 손 끝은 저 멀리 있는 파워렉을 가르켰다.
“ 자 잘봐.”
최지현은 렉 앞으로 이동 한 뒤 가볍게 자세 시범을 보이고는 그대로 논스톱으로 스쿼트 10개를 박았다.
그리고 하는 말이.
“ 자 쉽지? 자세는 내가 잡아 줄테니까 해봐.”
이거였다. 나는 어딘가 허해진 마음으로 뱉었다.
“ 참나.”
진짜 어이가 없네.
[ 저 정도 스쾃 깊이면 빵뎅이가 아킬레스건에 닿는거 아니냐.]
[ 참나 ㅋㅋㅋㅋㅋ ]
[ 나의 1RM은 누군가의 워밍업이다.. ]
ㅡ 벨라토스 님이 10000원 후원.
[그럼 뭐해 남자친구도 없는데.]
“ 야, 나는 안 사귀는 거거든. 나 정도면 뭐..”
“ 왜 날 봐요.”
“ 안 봤거든?”
최지현이 답지않게 큰 소리를 내며 나를 쏘아봤다.
뭐 섹시하긴 하지만 성격이 문제가 아닐까? 뭐가 되었든 최지현에게만 좋을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 누구 좋으라고.’
시간이 지나고,
내가 벤치에서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었다.
3대 측정 결과는 벤치 70kg 데드 90kg 스쿼트 80kg로 마무리를 내렸다.
토탈 240kg.
최지현이 말하길 벤치가 다른 종목에 비해 강한 편이라는데. 그냥 힘이 빠져서 그런게 아닐까.
다시는 안해야겠다. 여행 와서 까지 하는 운동이라면 더더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