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온기
* * *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천장.
아침부터 지훈은 역시나 부지런했고, 오늘은 이지은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날이 지났고, 이제는 짐을 비워야 할 시간이다.
여행의 마지막 날은 즐거웠다.
명소라고 불리는 곳도 많이 갔고, 제주도에서 맜있다는 음식은 거의 다 섭렵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지훈은 마지막 짐까지 챙기고 미련 없이 호텔방의 문을 닫았다.
“ 아.. 재밌었는대.”
“ 음.. 재밌었던 것 같다.”
지훈은 이지은의 달아오른 볼을 보고 읊조렸다. 얼마나 즐겁게 놀았는지, 피부가약간은 까무잡잡해졌다.
아직 진정이 안 되어서 빨간 부위도 점점 거멓게 변할 것이다.
제발 좀 선크림 바르고 놀라는 애기를 무시하고, 신나게 놀은 대가다.
원체 하얀 탓에, 까매졌다고 해도 여전히 하얀 피부를 유지하고 있지만, 여행 첫날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차이는 극명했다.
“ 화연 누나는 잘 들어갔대?”
“ 왜 자꾸 나한테 물어. 니가 물어보던가.”
“ 아니.. 조금 질척이는 것 같기도 하고.. 난 방송인도 아닌데..”
백화연은 바쁜 사람답게 스케줄 문제로 미리 항공편을 알아보고 일행보다 이틀 먼저 제주도를 떠났다.
최근에는 크리에이터를 지원해주는 회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두고 추진 중에 있어서 바쁜 것이다.
“ 잘 도착했단다.”
“ 화연 누나 너무 멋있어..”
“ 그러냐?”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귀찮아 진건 지훈이었다. 어제부터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지훈은 대충 나눴던 톡 내용을 보여주며,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지은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짹짹 댔다.
.
.
.
오랜만에 도착한 집은 구렸다.
호텔과는 다른 퀘퀘한 냄새가 스멀스멀 코끝을 찌른다.
‘ 음.. 빨리 이사가고 싶네.’
딱 이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스테이크를 한번 맛 보았는데, 갑자기 재료가 떨어졌다고 맹물만 주는 느낌이다.
여행이 바로 일주일 전 이었던, 만큼 여운이 강한건 어쩔 수 없나.
오랜만에 장롱을 뒤적였다. 요즘에는 틈틈이 옷 관리를 해둬서 그런지 먼지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지훈은 얇고 하얀 롱 티셔츠 하나를 꺼내들고, 쇄골에서부터 승모근 근처 까지 살짝 뻗은 나뭇가지 모양 타투를 매만졌다.
“ 안보이려나?”
“ 입으면 안 보일 듯? 오빠가 그런거 언제 신경 썼다고?”
“ 그래도 입고 가는게 좋지 않을까 싶네.”
타투가 과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힐끔힐끔 간보듯이 보이는 수준.
한 달 전? 흐려진 타투 리터칭도 받을 겸 해서 조금 추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스노우 볼이 굴러갈 줄은 몰랐다.
오늘은 최지현의 부모님을 뵙는 날이다. 최지현의 본가인 가평으로 내려가, 큼지막한 무쇠 솥으로 고기를 구워먹을 것이다.
장작 패기도 하고 닭도 … 잡아 먹는다곤 하는데 솔직히 그건 좀 내키지 않았다. 닭 모가지 비트는 것을 잘할 수 있을까.
상념을 끊어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최지현의 부모님에게 어떻게 대할지다. 솔직히 부모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낯설고 불편했다.
타투를 꽁꽁 가린 것도 그래서였다.
“지훈아 안녕~”
“ 안녕 하세요.”
그는 자연스럽게 앞의 문을 열어 젖히고, 안전벨트를 꽉 조여맸다.
“ 누나만 믿어! 오늘 안전하게 모실 테니까.”
“ 네 그래요.. 잘 부탁드립니다.”
진짜 잘 부탁드려야 한다. 이건 지훈의 차도 아니었고, 이채린의 차도 아니다.
돈을 내고 빌린 렌트카였다.
“ 이 새끼는 왜 면허도 안 따 놓은거야..”
“ 응 뭐라고?? ”
“ 아. 아니에요.”
그가 툭 내뱉자 운전대를 잡은 이채린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당연히 그 물음에는 침묵했다.
네비를 찍고, 잡담을 나누며 고속도로를 달리고, 말똥 냄새가 구간을 지났다. 그렇게 도착한 최지현의 본가.
먼저 보이는 것은 누가봐도 이름이 백구나 장군일 것 같은 허연 진돗개 하나와, 넓게 뻗은 마당이다.
그 뒤에는 주택 형태로 지붕이 3개나 있는 집이 보였다.
집의 구조는 알량한 지훈의 머릿속으로 상상한 시골집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자신의 집보다 몇 배는 더 넓고 좋아보였다.
그는 탁 트인 풍경과 공기에 해방감을 느끼며 공기를 들이마셨다.
“ 왔냐. 편집자 분도 안녕하세요.”
“ 앗 네! 지현씨 안녕하세요!”
“ 둘은 초면인가? 친하게 지내요. 안 그러면 저 누나한테 맞을 지도?”
이채린의 눈동자가 거짓말인걸 알면서도 일순 떨렸다. 아마 최지현의 사나운 인상에 그럴지도 ? 라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 뭐라는거야. 얼른 오기나 해라.”
“ 지현 누나 인상 어때요?”
문득 궁금해졌다. 지훈의 눈에는 그저 탄탄한 몸매를 가진 여성이었지만, 여자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 … 듬직하시고... 어.. 여자답게 생기셨지?”
“ 음.”
“ 이 자식이.”
듬직하다.. 험상 굳게 생긴건가? 여자 다운건 또 뭐지. 대략적인 느낌은 알 것 같았다.
“ 빨리 따라오기나 해. 우리 엄마가 너희 온다고.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렸으니까.”
최지현은 계란 하나를 입에 쏙 넣으며 말했다. 한 번에 빨려 들어가는 계란을 보니 웃겼다.
“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용!”
“ 어어.. 안녕하세요.”
지훈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걸 느끼며 90도로 몸을 접어 인사했다. 폴더 폰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그 인사에 최지현을 비롯한 모두가 피식 웃었다.
“ 어머. 얼굴도 잘생긴 청년이.. 예의도 바르네. 일어나세요.”
최지현의 어머니가 능글맞게 웃으며 지훈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지훈이 약간의 민망함을 느끼면서 몸을 일으켰다.
“ 뭐한거냐?”
“ 묻지 마요. 썅..”
지훈은 머쓱해하며 최지현의 뒤를 따라갔다.
상다리는 정말 부러지도록 차려져있었다. 고기와 고기 고기 고기. 누구의 입맛에 맞춤 식닥인지는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물과 김치도 많았는데, 설거지 거리가 벌써부터 걱정될 정도였다.
“ 지현아~ 그릇 좀 옮길래?”
최지현은 군말 없이 그릇을 받으러 갔다. 최민채는 최지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장난스레 소곤 거렸다.
“ 딸. 지영이는 어디 두고 잘생긴 청년만 쏙 데리고 왔어? 응?”
“ 개는 사정 있어서 못 온거거든..?”
“ 그리고 뭘 이렇게 음식 많이 했어. 안 힘들어?”
최지현은 괜히 툴툴댔다. 아무리 그녀라도 부모님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버렸다.
“ 딸 혹시 사고치려면 콘....”
“ 아! 그런거 아니래도!”
최지현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거칠게 화는 내지 못하고 씩씩 대며 접시를 날랐다.
내랑 재가 무슨...
‘ 엄마나..’
최지현의 부모님. 그러니까 최민채는 최지현이 코 찔찔이 시절 이혼했다.
불륜 폭행 그 기타 외 불온한 사정들. 전부 아니다.
그냥 서로가 안 맞아서 합의 하에 아름답게 헤어진, 평범한 부부였다. 실제로 가끔 아빠와 만나기도 한다.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굉장히 좋은 분위기 였다고, ‘최지현’ 은 들었다.
하지만 대가리가 크고 나니 의문이 조금씩 들었다. 정말로?
“ 맛있게 먹으렴.”
“ 넹!”
“ 잘먹겠습니다!”
쩝 쩝.
모르겠다. 확실한 건 슬며시 애기를 꺼낼 때 마다, 엄마는 굉장히 서글픈 표정을 짓는다.
대 놓고 묻지 않는 이유는 딱 그 이유 하나다.
최지현은 엄마가 슬퍼하는 얼굴은 보기 싫었다.
“ 응? 뭐 더 먹고 싶은거 있어요?”
“ 아뇨... 너무 배불러서.. 설거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 어허! 손님은 쉬어야죠. 이런 것까지 못하게 하면, 제 몸이 망가져요.”
“ 저도 조금 배불러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 흥흥.. 그럼 조금만 부탁 할까요?”
떨어진 허락 싸인에 지훈은 고무장갑을 끼고 옆에서 설거지를 돕기 시작했다.
이채린과 최지현은 밖에서 백구와 즐겁게 놀고 있었다.
밖에서 왈왈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 타투 예쁘네요.”
“ 아.. 감사합니다.”
“ 왜 가려요? 예쁘기만 한데.”
“ 아 저.. 그게.”
“ 아하.. 저는 타투가지고 뭐라하는 그러니까.. 꼰대는 아닌데. ”
최지현과 다르게 엄청나게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지훈은 당황해서 목덜미 부근에 가져갔던 손을 서서히 땠다.
“ 지현이는 너무 무뚝뚝해서 가끔 서러운데. 지훈씨는 붙임성이 좋네요.
저게 저래 보여도 어렸을 때는 엄마엄마거리면서 맨날 안겼는데.”
“ 누나가요?”
“ 그렇다니까요~ 어휴 언제 저렇게 컸는지. 지훈씨 부모님도 걱정 많겠어요. 이렇게 예쁜 아들 불안해서 어디 내놓겠어요?”
지훈은 순간 고민했다. 이걸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고아라는 사실은 말한적이 없었다. 그건 유지영, 최지현도 모르는 이지은과 이지훈. 둘만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말하고 싶다. 오늘 처음으로 새삼스럽게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이 뭉클하며, 가슴이 간지럽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고아라는 사실을 들킬 때마다, 돌아오는 이득은 하나도 없었다. 어렸을 때는 그것 때문에 박 터져라 싸워댔고, 커서는 알아서 눈치껏 그 사실을 숨겼다.
그럼에도 지훈의 입이 뻐끔대는 것은. 가슴 한 켠에 콘크리트를 박은 듯 숨이 콱 막혀서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저는.... 고아라서.”
“ … ”
1시간 같은 1초가 지난다. 그녀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기나긴 침묵이 지나가고.
“ 이리 와요.”
그녀는 아무말 없이 지훈의 몸을 안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