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57화 (57/64)

〈 57화 〉 시도

* * *

“ 어우 내 목 빠지겠네.”

“ 흥.”

헤드락을 호되게 당한 그는, 툴툴대며 어깨와 목 부근을 돌려댔다. 뚝 뚝, 평소보다 관절의 소리가 약간 크고, 아팠다.

유지영에게 당해봤자 얼마나 아프겠는가. 포상이지. 이런 1차원적인 생각으로 당했다가 잠시 블랙아웃이 올 뻔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훈이 받는 것은 사과가 아닌, 노골적인 외면이었다.

지훈은 어이가 살짝 없을랑말랑 했지만, 유지영이니까.

‘ 이해해야지.’

“ 똑똑?”

“ 똑똑? ”

“ 뭐.”

“ 화났어?”

“ 반말 하지 말라고.”

“ 네.”

지훈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작전상 후퇴였다.

솔직히 이 쯤 친해졌으면 말을 놔도 될 것 같은데.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고, 요즘은 은근슬쩍 말까기를 시도중이었다.

최지현은 물론 유지영, 이채린한테까지 말이다.

물론 그 중 단 한 명 에게도 반말 까기를 성공하지는 못했다.

왜 도대체 그렇게 누나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것인지가 의뭉스러웠던 지훈은, 몇 번이고 물어 봤지만 명쾌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커뮤니티에 접속해 알아낸 답은 ‘ 원래 여성분들은 누나라고 불리는 것에 환상이 있습니다. ’

라고는 하는데, 반말을 까도 누나라고 부를 수는 있잖아?

결국 알아낸 것은 없었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고 차가 멈췄다.

유지영과 지훈은 서로를 보며 아이컨텍을 나눴다. 먼저 항복한 것은 지훈이었다.

“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 …”

“ 요.”

유지영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운전에 집중했다. 그녀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지훈의 존댓말자체가 묘한 울림이 있었을뿐 더러, 왠지 반말을 까게 되면 진짜 거리감이 확 좁혀져 소위 말하는 ‘찐친’으로 변모할까 우려스러웠다.

솔직히 말해서 이지훈은 성격이 여성스러운 편이었는데, 반말 까지 놓게 된다면 이지훈에게서 성기를 벅벅 긁는 자신의 친구를 투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이건 서로를 위한거니까.‘

절대 사심으로 이러는 것은 아니다. 유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지훈이 목을 계속해서 주무르는 것이 신경 쓰였던 그녀는 먼저 입을 열었다.

“ 머리 많이 길었다. 너.”

유지영이 입을 먼저 열었다는 것은 화해의 제스쳐였다. 지훈 또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앞머리를 집게손가락으로 쭈욱 당기며, 기장을 확인해보았다. 대충 눈을 콕콕 찌르는 기장.

“ 그러게요 좀 자르긴 해야겠네. 혜리님한테 받아볼까.”

“ 진짜 컨텐츠에 미쳤구나. 네가.”

“ 겸사겸사 머리도 자르고, 컨텐츠도 찍는거죠. 뭐. 솔직히 말하면 제 머리 잘라주고 싶다는 분들이 꽤 많거든요?”

단 한 치의 허세도 섞이지 않은 사실이었다. 메일함만 까 봐도 헤어제품과 화장품 광고 문의가 수두룩 빽빽했다.

40만 뷰티유튜버인 혜리도 그 중 하나.

하지만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이 받아쳤다.

“ 우리 지훈이가 월클 병에 걸렸구나.. 그것도 말기야 말기.”

“ 됐고. 무슨 머리가 여자들한테 잘 먹혀요?”

유지영의 장난기가 다분한 태도를 무시한, 지훈이 물었다.

“ 몰라.”

“ 아직도 삐지셨나?”

유지영의 팔을 쿡쿡 찔렀다.

그러니까 저 표정은 아마 무언가가 맘에 안들 때 나오는 입 삐쭉 표정이었다. 알고 보면 유지영만큼 표정에서 감정이 들어나는 사람이 없었다.

웃긴 것은 저런 태도를 고수하면서도 말을 잘 들어준다는 점이랄까. 솔직히 그런 점이 더 귀엽지만.

그런 맘을 알 리가 없는 유지영은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으로, 목적지인 한강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그는 그저 웃으며 등받이에 체중을 실을 뿐이었다.

**

한강 공원.

우리는 모자를 푹 눌러 쓴 채, 대충 한강을 걷고 있는 중이다. 탁 트인 풍경 뒤로 사람들 돗자리를 깔고 앉아 라면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쓰읍.”

“ 아. 군침 돌아 진짜.”

우리도 그런 것들을 즐기러 온 것이었다. 양손에 라면을 하나씩 들고 챙겨 왔을 리가 없는 돗자리 대신 바지를 돗자리로 삼고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철푸덕 앉은 뒤,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특유의 자극적인 냄새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었다.

이 좋은 날씨에 먹는 라면... 진짜 못 참는다.

예전의 들은 말로는 야외에서 먹는 라면이 맛있는 것은 마냥 기분 탓은 아니라고 했다.

야외의 차가운 공기와 면발이 만나 면을 탱글하게 만든다고 했었다.

라면을 질리도록 먹어서 이골이 난 나조차, 한강공원에서의 라면은 인정이었다.

“ 그래서 소원이 뭐야?”

배를 채워 기분이 좋아진 유지영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솔직히 내가 뜯어내봐야 얼마나 뜯는다고.

오히려 자신이 기대하는 듯한 눈빛. 응해 줄 의무가 있는 건가. 그렇게 쳐다봐도 나는 진짜로 바라는 게 없는데.

“ 이미 이뤄서 딱히 없네요.”

“ 이미 이뤘다고??”

뭐 사고 싶은 것도 없고, 만약 있다고 해도 유지영에게 사달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 누나랑 야구보고 한강 왔는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저 같은 소시민은 이걸로도 만족이라고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약 3초 뒤에 수명 다한 노인들처럼 큭큭 웃었다. 개그 실패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때 봤던 유지영의 사쿠란보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 뭐,무,뭐라고?”

“ 기억 안 나요? 저 방송에서 누나 뽑았던 거.”

“ 알긴 하지 하는데... ”

“아 몰랐! 방송이나 켜!!”

무슨 말투지? 일단 굉장히 귀여운 건 확실한 것 같다. 유지영의 작달만한 손이 내 몸을 마구 밀쳤다.

허나 그 손에 담긴 힘은 생각보다 강해서 아팠다. 제기랄.

“ 아니... 누나... 누나한테 방송 장비 있는데. 억..”

나는 정통으로 맞은 옆구리를 문질렀다.

**

[ 안녕하세요 지영님~]

[ 유사장 빨리 문열어!!!]

[ 급하다 급해 열어 열어ㅓ 열어 열어 열어 여러여러여렁여러!!!]

[ 누나 문 열어요!!!!! ㅠㅠㅠㅠㅠ]

유지영들의 시청자들의 유형은 여려가지였다. 진성으로 롤을 좋아하는 시청자들과, 유지영과 입씨름을 하는데 힘을 쓰는 시청자들.

아니면 유지영의 출중한 외모에 반해 그지 깽깽이 같은 말투로 채팅을 치는 남자새끼들.

“ 곧 킵네다.”

“ 기달기달.”

한강 헤프닝 이후 다음날 , 유지영과의 2차 합방.

말했듯이 점점 트위지 tv 스트리머 파티겸 시상식이 다가오고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

우리는 방송을 키고, 넓은 테이블 위에 조리도구들을 모두 올렸다.

뒷북에 뒷북에 뒷북을 치는 (수제) 달고나 커피를 만들 겸 진행하는 방송.

유지영이 요리방송이라고 당당하게 방송 푯말을 내걸긴 했지만, 유지영의 요리실력을 아는 나로써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유지영은 거진 배달만 시켜 먹고, 냉동식품만 먹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질은 고사하고 김치 볶음밥이나 후라이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라도 만들 줄 알면 다행이었다.

‘ 그래도.. 괜찮겠지.’

설마 최지현처럼 레시피를 알고도 황혼의 뒤틀린 음식을 만들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혀가 저리네.

우리가 그 후로 한 것은 간단했다. 존나 저었다. 죽도록 저었다. 뒤지게 저었다.

단순 노동의 반복.

그 끝은 달콤하리라고 자기위로를 하면서 젓는다.

“ 아.. 살기 싫다.”

내가 왜 저기 옆에 보이는 진동 거품기를 놔두고 이러고 있는가. 따지고 보면 이건 전부 유지영 탓 이었다.

원망 섞인 푸념이 아닌, 팩트의 기반한 ‘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 학생 눈 둘려 ^^]

[ 공지로 한 말 지켜야지?]

[ 유지영이 공지 하지 않았음?]

[ ㅋㅋㅋ 내가 알게 뭐야~]

그러니까 엊그제 한강에서 방송을 키지 못했다. 유지영이 불현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로써는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유지영은 잠시 산책을 나간다고 했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평소 운동량이 부족한 유지영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오겠다는데 당연히 대 찬성이지.

문제는 그 산책이 2시간이 넘도록 이어져, 나 혼자 방송을 진행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 술에 취해 돌아온 유지영은 벌칙으로 달고나 커피를 만들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1시간 동안 커피를 젓고 있다는 점.

이럴 거면 내기에서 이긴 보상으로 일일 노예권이나 하사 받을 걸 그랬다. 방송에서 부려 먹는 재미가 쏠쏠 했을 텐데.

나는 잠시 유지영을 데리고 나갔다.

“ 왜,왜?”

미안한 건 아는 건가. 유지영은 괜히 뼈 밖에 남지 않은 자신의 전완근을 만지며 호소했다. 아까 젓다가 근육통 때문에 포기한 결과물.

“ 제육볶음 기대할게 지영아?”

“ 너,너너너!!?”

파닥 파닥. 나는 조용히 팔을 저지하며 속삭였다.

“ 누나가 해도 된다면서요.”

술에 취해 개가 되었던 유지영의 말이었지만, 그것도 또 하나의 유지영이었다. 나는 분명 한강에서 반말의 허락을 받았고, 유지영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귀엽게 이지후후후운 이라고 한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빗장을 열어 재낀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직진만이 남았을 뿐이다.

“ 하지마. 진짜 하지마. 시청자들 듣는다고!”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볼륨을 켜고, 귓등에 스마트폰의 스피커를 쑤셔 넣어도 못 듣는다.

“ 싫은데 지영아.”

유지영은 고개를 도리도리 휘저었다. 에쉬그레이로 예쁘게 염색한 머리가 나부낀다. 그녀는 내적으로 갈등을 끝냈는지, 나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하루에 ㅅ… 번 만.”

“ 네?”

“ 하루에 세 번만 하라고!!”

“ 아니 그게 뭐에요?”

무슨 아이템도 아니고. 하지만 하악질하며 으름장을 놓는 유지영 때문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뼈를 내 준 것은 유지영이고, 살을 취한 것은 나였다.

그러니 이 정도는 물러서고, 양보해줘도 된다.

유지영은 괜히 성난 발걸음으로 쿵쿵대며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가볍디 가벼운 그녀가 발을 굴러봐야 사뿐사뿐 소리가 날 뿐이었다.

그녀는 추가로 절대 방송 중에는 반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진짜 타당한 이유가 궁금해지긴 한다.

뭐. 그래도 방송에서 반말을 쓰지 않는 것은 나도 동의한다. 자처해서 악성 우결단들의 먹잇감이 되어줄 필요는 없을 꺼다.

“ 아닌가...?”

우결... 나쁘지 않을지도.

나는 다시 진지하게 고민을 이어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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