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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역전세계의 실업자-58화 (58/64)

〈 58화 〉 플레그 세우기

* * *

최지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방송 시간이 길고, 시작 시간이 늦은 그녀와 같은 스트리머들에게는 너무나도 흔한 일이다. 이미 생체리듬도 그쪽에 맟춰 졌기 때문에 몸이 죽도록 피곤하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일고, 식욕 성욕이 왕성해진다. 최지현은 생리통이 심한편은 아니었지만,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물론 은근히 사람을 거슬리게 하는 기분 나쁜 통증은 지속된다.

“ 좃같구만.”

최지현은 한 마디로 모든 감정을 함축하고, 온 찜질팩을 아랫배에 천천히 올렸다. 새삼스레 호들갑도 떨지 않았다.

건강한 여자라면 누구라도 겪는 일.

그녀에게는 매끈하고 탄탄한 근육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했다.

오늘은 격투기를 하러 가는 날.

그녀는 몸의 외형뿐만 아니라, 기능적인 면도 중요시했기 때문에 날마다 운동을 섞어하고 있었다.

“ 하아. 이지훈은 뭐 하려나.”

[ 야 뭐해 운동 ㄱ.]

운동을 같이 할 사람하면 이지훈말고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긴 하지만, 남자가 아니다? 뭔 개소리야.

어쩃든 격투기 실력이 매우 출중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최지현은 대충 냉장고에서 달달한 우유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답을 기다렸다.

10 분

20분

30분.

답은 오지 않았다. 그 시각 이지훈은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최지현은 한숨을 쉬었다.

“ 짜증나게.”

이게 모두 엄마 때문이다. 엄마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최지현은 알게 모르게 그에게 신경을 쏟고 있었다. 더 짜증나는 것은 이지훈을 추켜세우는 듯한, 엄마의 말이 전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 그 만큼 잘생긴 애가 어딨니.’

‘ 착하고 성격 좋아.’

‘ 운동 하는 남자가.... 죽’

괜히 부정하면서 운동을 나선다. 혹시 모르지. 이미 운동을 하고 있을지.

익숙한 길을 걸어, 체육관 안으로 들어간다.

진한 암컷의 땀 냄새와 고양감을 느끼게 해주는 열기가 확 풍겨 왔다.

냄새는 썩 좋지 않았다. 애초에 같은 여자의 땀 냄새가 좋을 리가 없을 뿐더러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 어 지현이 왔나? 지훈이는?”

“ 어.. 저도 모르겠네요.”

“ 둘이 싸웠나?”

“ 아뇨. 제가 걔랑 뭐 하러 싸워요?”

최지현은 스트랩을 둘둘 감으며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 그.. 표정이 안 좋길래 함 물봤다.”

내가 그랬나? 뭐 30분 동안 괘씸하게 답을 씹어서 아니꼽긴 했다. 그동안 해 달라는 것도 다해 줬는데 정작 부를 때는 답을 씹다니.

“ 실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저랑 스파링 한판만 해주세요. 관장님.”

“ 어어..? 요즘.. 관절이 마이 아픈데..”

“ 에이 엄살은. 아직 정정하신데.”

팡팡ㅡ!

최지현은 샌드백을 치며 몸을 달궜다. 잡생각이 많을 때 해소 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몸을 힘들게 만들어서 잡생각이 안 들게 하면 된다.

그녀다운 방식이었다.

“ 관장님 빨리 와주시죠.”

관장님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

“ 어때?”

“ 으음.”

[ 말해 뭐해 ㅋ ㅋ.]

[조온나 맛없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계속 대답을 내놓지 않자, 유지영은 떨떠름하게 제육볶음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물오물.

새침하게 일말의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신하게 씹는다.

“ … 맛있잖아?”

그러면서 나를 질책했다. 왜 맛있다고 아무 말도 안 하냐는 듯이. 하지만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 ㅋㅋㅋㅋ협박??]

[ 아 맛있다고 ㅋㅋ (내 기준으로.) ]

[ 먹을만함. ( 내 기준으로.)]

[ 태양초에 x돈 돼지고기 들어갔는데 먹을 만은 하겠지?]

그들의 말마따나, 재료가 재료인지라 맛없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맛을 음미하는 중이었는데,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이걸 이렇게 몰아가네.

여러모로 대단한 시청자들이었다.

그것 말고도 나는 아직도 커피를 젓고 있는 중인지라, 맛이 있다고 해도 입맛이 떨어지는 상태였다.

밥이고 뭐고 이제는 찐덕해진, 이 커피를 내 위장 속으로 집어넣어야겠다.

오기가 광기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오히려 거품기를 잡은 팔과 손에 박차를 가했다.

“ 말해! 이 자식아아.”

“ 맛있다니까요..”

“ 영혼을 담아서. 못해? 응?”

“ 와. 맛있어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쳐 먹으라고 제발 ㅋㅋ]

[ 해탈한 거 좃나 웃기네 ㅋㅋㅋㅋㅋㅋㅋㅋ]

[ 남자는 저게 맞지. 커피나 저어라 ㅋㅋ]

[ 맘스타치 감튀도둑 엄응식님이 강제퇴장당하셨습니다.]

[ 전완근 핏줄 나온거 존나 빨고 싶다. ㄹㅇㄹㅇ]

[ 지훈 형! 틴트 뭐 써요? 정보좀 제발... ㅜㅜ]

아아. 세상이 이리 넓고도 아름다우니 날아갈 듯 기분이 좋구나.

이 기분 좋은 날에 만드는 이 딴 커피는 맛이 좋겠지..

채팅창이 곱창 났구나.

“ 야야야야! 제대로 대답하라고.....!”

유지영이 계속 말을 시키는 것을 무시한다.

나한테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씨가 참 좋던데...

이 혼돈의 도가니를 봐도 무덤덤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진짜 레알 참 트루 해탈한 것 아닐까?

.

.

.

.

.

방송을 끝내고 유지영과 잡담을 나누다보니,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나는 남은 달고나 커피를 최대한 입안에서 굴려 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제 가볼게요.”

“ 그래.”

.

“ 안 데려다 줘도 돼?”

“ 아 네 뭐. 택시 타고 갈 꺼라. 진짜 갑니다. 쉬세요.”

문을 닫고 나와 폰을 확인했다. 아 또 저녁 뭐 먹지..

나는 안 먹더라도 오랜만에 이지은 저녁을 챙겨줄 생각이었다. 나는 근처 마트로 향하면서 대충 메뉴를 구상했다.

휴대폰을 들어 메뉴를 대충 찾아보는 그때였다.

“ 문자가 왜 이렇게 많이 왔냐..?”

그것도 평소에는 ㅇㅇ만 보내는 최지현의 것이었다. 나는 당황한 채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전화를 걸었다.

“ 여~~ 이지훈 이 개새끼야아...!! 왜 전화 안 반냐고..!”

“ ‥술 마셨어요?”

“ 그래. 좀 마셨다.. 안되냐아? 에라이 시발 별걸 다 참견이야 진짜. 오늘 너 때문에 얼마나 좃같았는 줄 알아아아!?”

“ 제가 언제 참견했어요? 어이 없네.”

“ 또 그만 좀 마시지... 하면서 지랄할꺼아냐. 히히흐흐...”

… 어떻게 알았지? 지성이 생긴 고릴라...아니 최지현이었다. 그건 그렇고 설마 밖에서 마시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억울한 점이 많았지만 일단 챙기러 가야하긴 해야겠다.

전화랑 문자 많이 한 것도 신경 쓰이고.

평소에는 근손실 타령하면서 술을 입에도 안대던 사람이 이러니까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어디에요. 데리러 갈게요.”

“ 시발 오지마아!! 오면 또 술 뻇을 꺼지 너? 몰라몰라!”

“ 같이 마실 테니까 얼른 말해봐요.”

“ 진짜냐아? 거짓말 아니야?”

“ 총각 남자친구여? 어여와서 데려가...”

“ 아잇...!”

‘ 아 ..’

떠 올리기 싫은 악몽이 떠오른다. 결국 나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최지현의 위치를 알아냈다.

왜 이놈의 친구끼리는 술도 궁상맞게 마시는 거야!

일단 움직인다.

아니 그냥... 집갈까.

[ 밥 시켜먹어. ]

오늘 밤도 길어질 것 같았다.

**

최지현은 체력이 바닥 날 정도로 체육관의 바닥을 구르고, 센드백을 두들겼다. 때문일까. 그 과정에서 관장님이 골골 대긴 했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몸이 힘들면 딴 생각을 못하게 된다는 것은 역시나 옳았다.

그녀는 굉장히 괜찮은 하루를 보냈을 터였다.

이지훈의 행방에 대해서 집요하게 캐묻는 도장 회원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 지현씨....”

멀리서 쭈뼛쭈뼛 다가오는 마른 체구의 한 여성. 얼굴도 귀엽게 생긴 것이 인상이 좋아 보였다.

최지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그러고선 말했다.

“ 네?”

“ 지훈씨...언제 나오시는지 혹시 아세요...? 하하.. 번호라도 한번 따보고 싶어서...”

“ 아. 저도 몰라요.”

자신의 연락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안단 말인가? 최지현의 날카로운 말투에, 여성은 ‘죄송합니다.’ 라며 거의 도망치듯 탈의실로 향했다.

최지현의 기에 눌려 결국 도망간 것이다.

최지현은혀를 차며 탈의실 입구를 응시했다.

올 때마다 얼굴이 보여서, 성실히 나오는 도장 회원인 줄 알았는데, 이지훈 때문에 온 거였나. 좋았던 인상이 한순간에 뒤 바뀌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하다. 실제로 이 도장에 이지훈이 다니고 나서 회원들이 대폭 늘었다는 건 과장이 아닌 사실.

관장님이 유독 이지훈을 예뻐하는 이유도 그거였으니까.

이지훈을 알고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외모만 보고 저러는 것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최지현은 약간 심기가 불편한 채로 다시 샌드백을 찼다. 묵직한 샌드백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다시 샌드백이 돌아올 때 주먹으로 콤비네이션을 처넣었다.

그리고 또 다음 주자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살이 조금 토실토실하게 오른 여성이었다.

“ 저... 지훈씨는 안 오나요? 하하... 주짓수 좀 배우고 싶어서.. 친절하게 잘 알려주신다는 소리를 들어서..”

“ 관장님이랑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 아니 아 그게... ”

같은 여자로써 의도는 뻔히 보였다. 운동으로써의 목적이 아닌 남자와 한 번이라도 몸을 섞어보려는 불순한 의도. 원투도 제대로 못 치면서 주짓수를 한다.. 이 개 좃같은.

아까의 여성은 이에 비하면 양반이었던 것이다.

“ 제가 알려드릴 수도 있는데요? 저도 타격보다는 힘쓰는데 자신이 있어서.”

“ 아 아닙니다.. 수고하세요....”

최지현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샌드백을 강하게 차자, 여성은눈을 내리깔며 소심하게 쉐도우복싱을 시작했다.

누가 봐도 하기 싫은데 말을 내뱉은 것이 있어서 하는 척 하는 동작.

' 미친년인가.'

또 한명 의 변태 년을 처리한 그녀는정신적 피로를 느끼며, 눈두덩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또한 새삼스럽게 이지훈의 인기를 실감하고, 다시 한번 하늘 같은 어머니의 장난스러운 말투를 떠올랐다.

지금 놓치면 후회한다...

지금 놓치면 후회한다...

지금 놓치면 후회한다...

' 에라이.'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운동을 더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다 문득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따지고 보면 지금 나랑 저년 들이랑 처지가 똑같다는 거 아니야?

문자와 전화를 몇 통이나 넣은 꼴이, 손가락을 빨며 떠나간 신랑을 기다리는 아낙이었다.

결국은 연락도 안 됐잖아?

애초에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날선 신경과, 아랫배의 둔중한 통증은 그녀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치우치게 했다.

최지현은 또 접근하려는 한량 년을 눈빛으로 쳐낸뒤, 빠르게 옷을 챙겨 입었다.

“ 아 술 땡기네 시발.”

구체적으로 매운 것이 땡겼다. 아니, 음식이란 음식은 전부다 먹고 싶다.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고딩 때 엄마 술을 훔쳐 먹었다가 진짜 죽도록 맞은 기억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방송 때문에 몇 번 홀짝인 적은 있어도 절대 사적으로는 마시지 않았는데.

근손실이고 뭐고 오늘은 마셔야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녀는 당당한 걸음으로 허름한 포장마차의 비닐을 재끼고 들어갔다.

“ 이모 여기 닭발하고 소주 3병이요.”

“ 몇 명이여?”

“ 저 혼자입니다. 얼른 주세요. ”

“ 아아.. 알겄어.”

최지현은 다리를 꼬고 건방지게 흔들며 소주를 기다렸다. 물론 식당 아주머니가 볼 때는 급하게 오므렸지만.

이윽고 닭발이 아주 맛있게 볶아져 나왔다. 매운 냄새가 입안의 군침을 자극했다.

그녀는 마요네즈를 듬뿍 찍은 후 입으로 가져갔다.

오도독.

“ 쓰압.... 이거 왤케 매워...”

“ 엉? 보통 맛은 학생들도 잘 먹는 것인디..”

“ 스아스아..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먹어서 그래요 오랜만에.”

입안이 얼얼한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게 스트레스 해소인가?

최지현은 거의 살얼음이 낀 수준으로 차가운 소주를 까고, 입술을 o자로 모으고, 한입에 꿀꺽 삼켰다.

“ 끄... 달다..”

결국 플레그는 세워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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